학교에서 '제대'한 고3들 "억지로 더 자요"
[학생부장 일기 33] 수능 끝난 고3 교실, 을씨년스럽네
▲ 수험생 떠난 고3 교실의 모습불과 오후 1시 반인데, 고3 아이들 모두 집에 가고 없다. 빈 교실에는 교과서와 참고서가 나뒹굴고 책상 위에는 '대학 배치 참고표'만 널브러져 있다. ⓒ 서부원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공부 열기로 뜨거웠을 교실이 환한 대낮인데도 냉기가 흐를 만큼 을씨년스럽다. 수능이 끝난 지금 고3 교실은 주인 떠난 빈집 마냥 썰렁하다. 째깍거리는 벽걸이 시계 소리만이 적막감을 깨울 뿐이다. 고개 들어 시계를 보니 겨우 오후 1시 반이다. 평상시 같으면 점심시간인데, 아이들은 이미 집에 가고 없다.
애지중지하며 가족처럼 친구처럼 소중히 다뤘을 교과서와 문제집은 교실 뒤편 폐지함에 버려져 수북이 쌓였고, 애써 작성한 오답노트는 분풀이라도 당한 듯 갈기갈기 찢겨져 교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아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책과 씨름했던 책상 위에는 사설 입시학원에서 배포한 듯한 '대학별 배치 참고표'만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고3 아이들의 학교교육은 사실상 정지된다. 등교시간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사실 '자율'에 가깝고, 점심시간 이전에 하교하니 오전 일과가 학교생활의 전부다. 교복을 입은 아이는 아예 찾아볼 수 없고, 파마, 염색에다 남자 아이들인데도 귀걸이를 하고 등교하는 경우까지, 수능시험은 차라리 고등학교 졸업식이다.
그들에게 주상과 같은 학교생활규정은 있으나 마나다. 늘 지적해온 대로 교복을 입고 다니라고 말하면 되레 생긋 웃으며 "선생님도 참! 저희 수능이 끝났잖아요"라며 눙치기 일쑤다. 제발 후배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 달라고 하소연하듯 주문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교실에서의 세 시간짜리 오전 일과라 해봐야 '독서 시간'이 전부다. 말이 좋아 그렇지, '시간 때우기'다. 수시 논술과 구술 면접을 준비하는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게임하며 놀기 바쁘다. 모든 시험이 끝난 마당에 시간표상 정규 과목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지만, 수업시간에 스마트폰을 대놓고 꺼내도 나무라는 교사는 거의 없다.
학교는 '군대'... 지금 놀지 않으면 억울해 못 견디겠답니다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두 달 가까이를 이렇게 보내게 된다. 어느새 오랜 관행이 됐다. 물론 학교마다 수능 이후 교육 프로그램은 마련돼 있긴 하다. 인근 대학의 협조를 얻어 '예비 대학' 프로그램에 단체로 참여시키기도 하고, 곧 겪게 될 군입대를 대비하여 병무 상담을 받게 하는 등 학교 나름대로의 대책은 세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고3만 참여하는 체육대회를 따로 열고, 주변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견학하는 등 다양한 행사도 마련된다.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참여할 수 없었던 소풍과 체육대회를 한꺼번에 원 없이 누려보라는 학교의 '배려'다. 하지만 막상 수능시험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반응이 시큰둥해 참여하는 아이들을 손에 꼽을 정도다. 학교에서 뭘 준비하든 관심 없다는 표정이다.
지금 고3 아이들에게 학교란 출석 확인 차 잠깐 들르는 곳일 뿐이다. 그들과 한 해 동안 동고동락해 온 교사들도 20여 일 뒤에 나올 수능 성적표만 기다릴 뿐, 아이들이 방과 후에 무얼 하며 지내는지 별 관심이 없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어디서든 푹 쉬고, 하고 싶은 일 맘껏 하며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려니 바랄 뿐이다.
▲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는 8일 오전 인천 연수구 인천여고 정문에서 문일여고 2학년 학생들이 수험생을 위해 율동을 하며 응원하고 있다. ⓒ 조재현
아이들은 세 시간의 짧은 '학교 방문'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면 대체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까? 점심 무렵 싱글벙글한 얼굴로 하교하는 몇몇 아이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수시 논술을 준비하는 소수 아이들은 학교가 아닌 사설 학원으로 등교한다고 하는데, 아예 서울로 올라가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개 하루 일과가 비슷하단다.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미리 입을 맞춘 듯 이구동성으로 한 대답이, "그냥 놀아요"다. 지난 1년 동안 방학은 물론 주말도 없이 책상에 앉아서 책과 씨름하며 보냈는데, 지금 원 없이 놀지 않으면 억울해서 못 견딘다고 했다. 수능 끝난 후 지금껏 매일 열 시간 넘게 잔다면서, 억지로라도 더 잔다고 말했다.
기실 아이들이 애꿎게 잠과 놀이에 분풀이 하는 건 학교가 부추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능이 끝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며 낡은 레코드판처럼 외쳐오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오로지 수능을 위해 '올인'할 뿐, 정작 수능이 끝나면 아이들 스스로 무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아까운 시간을 쪼개가며 의미 있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용돈도 벌 겸 경험삼아 해볼 요량으로 여기저기 '알바'를 구하러 다닌다는 아이도 있고, 운전 학원에 등록해 다니거나 기타를 배우러 다닌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 토익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는 아이와 '몸짱'을 꿈꾸며 매일 헬스클럽과 수영장을 다닌다는 아이도 있었다.
억눌린 자유 쏟아내겠다는 '울분'... 입맛이 씁쓸
그러나 마음이 한껏 들떠 스스로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일탈에 빠져드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늦은 밤 친구들끼리 모여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거나, 심한 경우에는 운전면허도 없이 오토바이나 차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해마다 이때쯤 어이없는 사고를 저질러 목숨을 잃는 고3들의 소식을 어김없이 접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이는 교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학교가 통제하기 어려울 뿐더러 부모들의 무관심과 묵인 아래 방치된 결과다. 정부와 교육청에서는 수능 이후 수험생들의 일탈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공문 한 장 달랑 내려 보내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이고, 관행이라 여기며 그들의 일탈을 알고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인 학교도 방관자일 뿐이다.
얼마 전 다녀온 도로교통안전공단 주최 교통안전 담당교사 연수에서도 수험생 일탈의 정점에 오토바이가 있다면서, 그들이 오토바이 등 차량 사고를 내지 않도록 학교에서 교육해달라고 강조했다. 무면허는 말할 것도 없고, 오토바이 사고의 경우에는 상해 정도가 클 뿐만 아니라 책임보험만 가입하도록 돼 있어 사고 시 보상 문제로 심각한 장기간의 법적 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수차례 강조했다.
고3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11월 중순의 학교는 늦가을 날씨마냥 스산하다. 학교가 조용해진 꼭 그만큼 교문 밖은 그들로 인해 왁자지껄해졌을 것이다. 대낮 교문 밖을 나서는 아이들의 표정과 머리 모양새, 옷차림 등을 보노라니 지금껏 학교로부터 억눌린 자유를 모두 쏟아내겠다는 울분 같은 게 느껴진다.
수능시험과는 상관없이 밤늦도록 학교에 남아 공부해야 하는 1, 2학년 학생들은 고3 선배들을 부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 '수능만 끝나면 질곡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사실을 곱씹으며, 하나 같이 오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는 의연한 표정이다. 바로 지금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내일의 행복도 기약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들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이들 모두 '학교는 군대이고, 수능은 제대일'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능과 대학입시가 고등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을 틀어쥐고 있는 현실에서, 수능 이후 고3 아이들의 학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운 탓이다. 학교교육을 무력화시키는 아이들의 이러한 왜곡된 '믿음'을 어떻게 하면 깨뜨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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