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인디밴드에 밀렸지만...우리 아직 살아있어요
민중가수의 고민, 투사와 음악가 사이
▲ 지난 11월 16일 쌍용차 노조와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 골든 브릿지 증권노동자, 베링거잉겔하임 해고자들이 사회단체들의 합동 문화제에서 민중가수 지민주씨가 노래를 불르고 있다. ⓒ 박종원
지난 11월 16일 오후 6시 국회 정문. 여의도에는 꽤 많은 비가 내렸다. 축축해진 옷과 차갑고 습한 공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모두 어깨를 움츠리며 퇴근을 서둘렀다.
버스정류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국민은행 사거리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함께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새누리당 중앙당사였다. 당사 앞에는 파랗고 하얀 우비를 입은 사람들 서른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우비를 입은 그들의 모습이 우산을 쓴 샐러리맨들과 대비됐다. 마치 섬 같았다.
그들은 노조원이었다. 천막농성을 이어가며 국정조사를 요구중인 쌍용차 노조를 포함해,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 골든 브릿지 증권노동자, 베링거잉겔하임 해고자들이 사회단체들과 함께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 가슴 높이밖에 안 되는 간이 천막 안에는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김 지부장은 건강악화로 19일 병원으로 실려갔다)과 노조원 세 명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흥건하게 젖은 아스팔트 바닥은 걸음을 디딜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젖은 바닥에 앉을 수 없었던 노조원들은 우두커니 서서 문화제를 지켜봤다. 우비를 입은 소수인 그들은 우산을 쓴 다수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농성을 시작한 지 38일째가 저물어 갔다.
"평상시에는 지금보다 괜찮아요. 오늘은 비가 와서..."
17년차 민중가수 지민주씨는 그렇게 오늘의 첫 무대를 평가했다. 무대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묻어났다. 그럴 만했다. 행사 차량에는 덜덜거리는 간이 발전기와 어린아이 몸통 만한 구식 콘솔, 물먹은 나팔 스피커 두 대가 실려 있었다.
녹음된 음원을 재생하는 CD 플레이어는 금방이라도 판이 튈 듯 주둥이가 들썩거렸다. 그녀를 비춰주던 스탠딩 조명 한 대는 비바람에 시달리다 결국 뒤로 넘어졌다. 그 조명은 지씨가 무대를 끝마칠 때까지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쌍용차 노조와 지씨는 서로 미안해했다. 노조는 준비된 무대를 제공할 수 없음에, 그녀는 더 활기찬 분위기를 마련해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지씨는 날이 좋은 날에 다시 와 "제대로 된 걸 보여 주겠다"며 다음 목적지인 인천 부평으로 향했다. 콜트 콜텍 노조 문화의 집이 위치한 곳이었다.
민중가수 역시 음악가다. 하지만...
▲ 민중가수 지민주씨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 자신의 음악을 통해 노동자들이 작은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은 그녀의 큰 자부심이었다. ⓒ 박종원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질문을 던졌다. "음악가로서 음향에 욕심이 있지 않냐"고. 지씨는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열 곳 중 일곱 곳은 음악가로서 음향 연출을 요구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했다.
"당연히 음향 욕심이야 강하죠. 하지만 콘서트랑은 다르게 집회는, 오늘 터질 수도 있고 내일 터질 수도 있어요. 공연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최대한 음질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생존권 싸움을 하는 현장에서는 사실 그렇게 할 수가 없죠."
대중음악가에게 무대는 자신들의 음악세계를 펼쳐놓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음향 확인을 하고 무대 동선과 카메라 움직임을 확인한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예행연습을 한다.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스태프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음악가들도 종종 있다. 그들에게 무대란 혼신의 힘을 다해 구축한 작은 우주다.
민중가수 역시 음악가다. 자신의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치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은 때가 많다. 지씨는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전경이 들이닥친 적도, 스피커 전원이 내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의 투쟁과 용산 참사 추모제가 그랬다.
그들의 무대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울려 퍼지는 치열한 생존투쟁의 최전선이다. 이런 현장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사치나 아집으로 비칠 수 있다. 그들이 올라서는 곳은 무대지만 또한 무대가 아니기도 하다.
결국 민중가수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가수 자신의 음악이 아닌 현장에 대한 배려다. 민중가수들이 집회 현장에서 투쟁적인 노래들만을 골라 부르는 이유다.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게 표현해줘야 하는데, 힘 빠진 노래를 부를 순 없으니까요. 그리고 셋 리스트(Set List)를 준비해 와도, 다른 곡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80%정도 돼요. 무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지체돼 동지들이 힘들어한다든가, 날씨가 좋지 않다든가, 또는 집회 진행시간의 문제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민중가요에 몰아친 세상의 변화
1980년대는 온 국민이 민중가요를 부르던 시대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8월 노동자 대투쟁은 민중가요의 전 국민적 확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대열에 합세했던 넥타이 부대와 평범한 소시민들이 결정적인 매개체 역할을 했다. 노래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결국 모두 하나가 되어 외쳤다.
1989년 가을에 발매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집 앨범 히트는 이러한 흐름의 절정이었다. 수록곡인 <사계>는 음악 교과서에 실렸고 MC 스나이퍼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리메이크해 자신의 정규앨범에 수록했다.
하지만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중가요는 점차 대중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문민정부가 집권하고 국민들의 소득수준이 전체적으로 향상되면서 대중들은 더 이상 민중가요에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때마침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교실이데아'를 통해 신세대에게 최신 경향을 따르면서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을 새롭게 제시했다.
▲ 서태지와 아이들은 '교실이데아'를 통해 신세대에게 최신 경향을 따르면서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을 새롭게 제시했다. ⓒ 서태지컴퍼니
그들의 음악을 통해 세대적 연대감을 느꼈던 X세대들은 포크와 진군가, 트로트 음계에 머물러 있던 당시 민중가요의 음악적 관습을 거부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자본주의적 소비와 정치적 저항을 구분짓기 원하지 않았다.
1996년 12월 20일 노동문화 월례포럼 실행위원회 주최로 종로성당에서 열린 <민중가요는 죽었다?!>포럼은 당시 문예 활동가들이 느낀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위기감을 피부로 느끼며 새로운 실험들을 시작한 때에는, 이미 자본을 앞세운 대형 음반사들이 유통망을 완전히 장악한 뒤였다.
"80,90년대는 대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민중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민중가요 음반을 팔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다 대학교 앞 헌책방들이 사라지면서 CD유통 회사들과 직접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들이 생겨났죠. 민중가수들 스스로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가 없었던 게 아니에요. 민중가수들끼리 독립 레이블을 만든 적도 있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기에는 자체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유통망에 한계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비교적 자유로운 인디 레이블에 들어가 활동하는 게 정치적 저항과 음악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지씨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인디 레이블도 결국 수익을 내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다. 그녀는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투사이기도 했다. 그녀의 앨범을 시중에서 구입할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실제로 많은 민중가수들이 앨범을 홈페이지와 이메일을 통해 직접 판매한다. 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물론 이익을 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앨범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보통 1~2천만 원 가량이다. 앨범 판매 수익은 대개의 경우 앨범 제작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도 앨범 제작은 포기할 수 없다.
"작가가 작업을 안 하면 존재 의미가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었다.
여기에 노동 시장의 급격한 변화는 문예 활동가들끼리 연대하고 고민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IMF사태는 그 시작이었다. 급격하게 진행된 자본시장 개방과 노동 유연화 정책은 비정규직 비율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심각한 임금 및 복지 격차는 노동운동 진영 내의 갈등의 불씨가 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 노총과 노조의 문화부는 예전만큼 문예 활동가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조직 내 문화부를 아예 공석으로 남겨놓거나 문화부장을 조직 내 오락부장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전문 문예 활동가들이 노조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문예 활동가들 일부에서는 "우리를 행사 뛰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예전처럼 문예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미래를 도모할 만한 정기적인 모임도 조직도 없다. 이제 남은 건 각개격파뿐이다.
민주화 이후 급격히 달라진 정치, 사회적 지형 역시 그들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민주화와 노동해방이 제1의 가치였던 80년대와 달리 현재의 사회적 현안은 인간의 미시적 삶 전체를 아우른다. 대학 등록금, 육아복지, 일자리, 대형마트 입점규제 등의 경제적 현안들이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됐다. 세상은 변했다. 다양한 의제, 다양한 계층들을 상대로 어떻게 소통을 시도할지가 현재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사회적인 지형 자체가 변했어요. 예전만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국회의원이 된다는 건 상상도 못했죠. 고문당하는 사람도 있었고. '운동이라는 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구나' 했는데 지금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잖아요. 노동만이 아닌, 삶의 여러 부분에서 계층적 문제가 생기고 있어요. 정치와 삶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죠. 인디밴드가 강정 마을에 들어오기도 하고. 문화지형이 점점 바뀌고 있는 걸 느껴요."
이러한 흐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건 인디밴드들이었다. 자신들의 의견을 당당히 표현하며 소외 계층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2011년 7월, 강정 해군기지 건설 강행 사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 인디밴드들은 홍대에서 <나의 강정을 지켜줘>라는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3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스턴사이드킥, 시베리안 허스키, 킹스턴 루디스카 등이 참여했다. 수익금 전액은 강정마을 투쟁 후원금으로 전달됐다.
출구가 없는 고민, 투사와 음악가 사이
▲ 지난 10월 26일 덕수궁 대한문에서 열린 '희망밥콘서트'에서 록밴드 옐로우몬스터즈의 공연에 참가자들이 호응하고 있다. ⓒ 최지용
지난 10월 26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대한문에서 열린 <희망 밥 콘서트>에는 네바다 51, 게이트 플라워즈와 옐로우 몬스터스가 무대에 섰다. 일부에서는 사회관을 명확히 밝히는 인디밴드들이 등장하면서 민중가요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지씨는 "입지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가 내면의 문제"라고 했다.
"저의 결론은 입지의 문제가 아닌, 음악가 각자의 신념 차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코드 자체가 달라요. 요즘 맵시있는 음악을 하는 분들이 사회적 접근성을 띠는 건 맞지만, 우리는 무조건 현장의 최전선에 서요. 당사자들의 내면 안까지 들어가고 동지애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는 구분이 안 간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현장에선 그게 큰 차이에요. 담을 수 있는 그릇, 영역 자체가 다르죠. (인디밴드에게) 밀린다고 하는 데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더 나아가고 싶으면 민중가수들도 노력을 해야죠. 입지가 좁아지네마네 말하기 보다는…."
투사와 음악가 사이에서 민중가수들이 가진 고민은 생각보다 깊고 복잡하며 또한 출구가 없다. 더 이상 질문하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차는 콜트 콜텍 노조 문화의 집에 도착했다. 저녁 8시 40분이었다.
널찍한 실내에는 3년 째 투쟁중인 노조를 후원하기 위한 일일주점이 열리고 있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부침개와 육회, 떡볶이, 수육을 소주와 함께 마시며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의 첫 무대를 장식할 예정이었다.
무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대의 메인스피커와 사이드 필, 큼직한 메인 콘솔이 보였다. 이제야 좀 무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지씨가 부르는 '나의 동지'가 일일 주점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작지만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다.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수 백 회에 걸친 집회 공연으로 쌓인 내공이란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씨가 두 곡을 부르는 내내 '그녀가 오디션 프로에 나갔다면, 인디신에 발을 들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을 직접 말할 순 없었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 같이 식사를 하던 중, 지씨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절반은 투쟁중이거나 실업 상태에 처해있어요.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민중가요의 생명력은 아직까지 유효하죠."
▲ 지난 16일 콜트 콜텍 노조 문화의 집에서 열린 일일 주점. 지민주씨는 이 행사의 첫 무대를 장식했다. ⓒ 박종원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하며 산다는 사실까지 변하진 않았다. 노동은 여전히 삶의 일부다. 자신의 음악을 통해 노동자들이 작은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은 그녀의 큰 자부심이었다.
동시에 지씨는 슬프다고 했다. "집회 때는 항상 민중가요가 나오는데 정작 집회 뒤풀이에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더 즐겨 불린다"고 했다. 그럴수록 지씨는 "더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중과의 소통을 얘기했다. 때로는 투쟁 현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뛰쳐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기회가 없다면 직접 판이라도 깔아야 한다고.
주점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중, 문득 민중가요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20,30년 뒤의 민중가요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가늠할 수 없었다. 급격한 시대의 변화, 투사로서의 고민,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고뇌. 민중가요와 민중가수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대학에서 만약 민중가요를 접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됐거나 모던 록을 하지 않았을까요?"
주점에서의 식사 도중 그녀가 한 말이 귀를 맴돌았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났다. 밤 11시 50분, 합정역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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