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명이 사흘째 '떼 김장'... 팔 걷고 나선 이유
사랑의 김치를 담는 못골 사람들과 김명순 부녀회장
▲ 수원시 팔달구 지동 주민자체센터 앞 주차장이 김치공장으로 변했다 ⓒ 하주성
매년 이맘때만 되면 수원의 각 동은 떠들썩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판을 벌이기 때문이다. '판'이라고 하면 '먹자판'이나 '놀이판' 정도로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수원 주민자치센터별로 벌이는 판은 바로 '김치판'이다. 수십 명이 모여 1000포기 정도의 김치를 담근다. 물론 자신들이 먹을 건 아니다.
23일 아침 일찍 수원시 팔달구 지동 주민자치센터 주차장에서도 판이 벌어졌다. 5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앞치마를 두르거나, 혹은 비닐을 앞에 대고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그리고는 너른 판 위에 있는 속을, 열심히 절인 배추에 집어넣는다. 배추 잎을 하나씩 들춰가며 속을 가득 채운 배추는, 금방 붉은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웃사랑의 본보기
▲ 넓은 판 위에 가득 쌓인 김치 속. 1000포기의 배추속이다 ⓒ 하주성
말로만 하는 이웃사랑은 사실 사람들만 더 피곤하게 만들기 일쑤다. 하지만 이렇게 날이 쌀쌀한데도 사흘씩이나 고생하며 몸소 실천하는 이들이야 말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벌써 사흘째 김장에 매달린 사람이 무려 100여 명에 달한다고. 첫날은 배추밭에 가서 배추를 뽑고, 둘째 날은 배추를 다듬어 절였다. 그리고 셋째날인 23일, 김장을 한단다.
오늘(23일) 지동자치센터 앞에는 지동 내 8개 단체가 모두 모였다. 김장담그기의 주관 모임인 새마을부녀회를 비롯해 주민자치위원회·통장협의회·새마을지도자회·바르게살기협의회, 심지어는 방범기동대까지도 합세했다. 한편에서는 배추를 나르고, 한편에서는 속을 넣고, 또 한편에서는 상자에 담아 하나씩 정리한다.
'2012 사랑의 김치'를 담그는 사람들
▲ 11월 22일 소금에 절인배추를 꺼내고 있다 ⓒ 하주성
▲ 절임통에서 꺼낸 배추를 씻는 지동사람들 ⓒ 하주성
부녀회원들과 함께 열심히 김장을 담고 있는 지동새마을부녀회 김명순(58세) 회장은 여기저기 다니며 일손을 챙기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 와중에 잠시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포댁이 지동으로 시집 온 것은 벌써 35년. 그동안 부녀회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남편(정광수·65)과 남매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는 게 현모양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농사는 반듯하게 지은 것 같아요.(웃음) 남매를 다 유학까지 보냈어요. 큰애가 아들인데 가정을 꾸렸고, 딸애는 유학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제가 부녀회를 맡은 지는 3년이 조금 지났어요. 지동 부녀회가 있다가 해체됐다고 하는데, 동장님과 여러분이 계속 부녀회를 맡으라고 종용해도 거절했죠."
▲ 홀몸어르신들께 겨울 식량으러 나누어 드릴 사랑의 김치 담그기 ⓒ 하주성
그러다가 반 강제로 부녀회를 맡게 됐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연신 부녀회원들이 '회장님'을 찾는다. '2012 사랑의 김치'는 모두 150 박스 정도를 마련한다고. 이렇게 담근 김치는 홀몸 어르신(예전에는 독거노인이라고 했으나 요즈음은 명칭이 바뀌었다)의 겨울 식량으로 보내드린다고.
"와서 가져가실 수 있는 분들은 오늘부터 와서 가져가시고요. 하지만 대개 어르신들이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동직원분들과 통장님들이 배달 해주시죠. 이렇게라도 해야 겨울에 반찬 걱정을 좀 덜하고 사실 수가 있으니까요. 한 달에 한 번은 저희들이 밑반찬을 만들어서 갖다 드리기도 하고요."
봉사하다 보니, 세상이 달라 보여
▲ 김치 담그기를 주관한 지동 새마을부녀회 김명순 회장 ⓒ 하주성
그동안 몰랐다고 한다. 지동이 지금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지동에 거주하는 주민들만이 갖고 있는 '정'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지동에 산다고 하면 이상하게 무시를 하는 투로 대했다는 것. 거기다가 지동은 '꼴통 동네'라고 하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정말 화도 많이 났어요. 그런데 살다가 보니 지동처럼 정이 넘치는 마을이 없는 것 같아요. 지동 분들은 떡을 해도 나누고, 하다못해 수제비를 떠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분들이죠. 저희들이 어려운 이웃을 돌보려고 도움을 요청하면, 한 분도 거절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오히려 저희에게 힘을 되는 말들을 해주시고는 하죠."
그는 부녀회를 맡고나면서 점점 지동에 빠져든다고 한다. 사실 김명순 부녀회장 부부는 지동에서는 봉사를 잘하는 부부로 유명하다. 부녀회에서는 결손가정 돌보기, 홀몸어르신 찾아뵙고 도움주기, 불우한 이웃돕기, 김장 등 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회원들이 만나 함께 일을 한다고.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부모 같은 사람 되고 싶어
▲ 홀몸어르신들께 나누어 들리 김치 상자가 쌓여있다 ⓒ 하주성
김치를 담그느라 바쁜 일손을 오래 뺏을 수는 없는 법. 그에게 부녀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물었다.
"어르신들도 물론 도와야 하지만,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저희들이 부모처럼 따듯하게 함께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이 이아들이 영 마음을 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죠.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아이들 대답이 '얼마 안 있으면 또 우릴 떠날 텐데'라며 고개를 떨구는 거예요. 아이들 마음속에는 친 부모도 자신들을 버렸는데, 남이 언제까지 우리들을 끼고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단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을 그냥 놓아둘 수가 없어 동사무소에 부탁해 주차장 옆에 가건물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반찬도 만들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 아이들을 돌봐야 하잖아요. 부모도 없이 저희끼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혼자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못 된 길로 들어서도, 누구하나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저희들이 앞으로 이런 결손가정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그 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베풀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당에는 김치 상자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부녀회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정성이 가득한 사랑의 김치. 이 김치를 받아서 고마워할 어르신들의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수고를 하는 분들을 위해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보내줬다고, 꼭 '고맙다'는 말을 빼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김명순 회장.
그녀는 "세상에 우리 지동 같은 마을은 없어요, 정말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곧 거듭날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찾아오세요"란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푹하다. 가슴이 따듯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 것인지.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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