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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춤판에서 벌어진 할머니들의 기싸움

할머니들과 한춤 배우던 화려했던 날들... 등산으로 갈아탄 이유

등록|2012.12.02 12:11 수정|2012.12.02 12:11
밖에서 돈 버느라, 학교 다니느라 시달린 가족들을 붙들고 집에서 하루 종일 논 사람이 허리 좀 밟아주라, 다리 좀 주물러라, 머리 좀 눌러 주라 귀찮게 하니까 주변에서는 그러지 말고 운동을 하라고 했다. 조깅이나 헬스, 수영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움직여서 하는 모든 운동이 싫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괜히 돈 들여가면서 땀 빼고 시간 낭비를 하나. 밖에 나다니는 것도 귀찮아서 일주일에 한 번도 현관문 밖에 안 나가고 산 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십 년 가까이 한 동네에 살면서 변변한 친구 한 명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랑 한춤이 어울린다며 꼭 해보라고 권유했다. 한춤을 어디서 배우지? 동사무소 주민자치센터에서 소정의 수강료만 받고 가르친다고 했다. 한춤은 부드러운 운동이니 한 번 도전해볼만 하지 않을까?

중력의 법칙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내 몸

▲ <요가학원>의 한 장면. ⓒ 오퍼스픽쳐스


그렇지만 당시, 얼마 전 남들 말만 믿고 도전했다가 실패한 요가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때도, 요가는 꾸준히 연습하기 나름이니 한 번 해보라는 말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지 않았던가. 요가교실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경이로웠다. 우리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구부려 지기도 하고 말려 지기도 하고 공중에 뜰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교실을 가둔 메운 여자들처럼 나도 내 신체를 자유자재로 비틀고 꺾고 오므릴 머잖은 미래를 그리면서 가장 뒷줄에 매트를 깔고 앉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경직된 허리와 목과 팔다리는 몇 달 내내 일정 각도를 유지하며 단 1도도 더 구부려지거나 올라가지도 넘어가지도 않았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하다보면 결국 되게 돼 있어요. 조물주가 우리 몸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이 분들 중에도 처음엔 다들 허리굽혀 발목도 못잡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보세요. 아, 우리 몸이 얼마나 신비롭고 무궁무진한가를요."

거뜬하게 팔을 땅에 짚고 공중부양 자세를 유지하는 수강생들 사이에서 몇 달째 고개가 1도도 더 뒤로 안 젖혀지는 강직한 육체와 씨름하고 있는 가엾은 수강생을 요가 강사는 끈기를 갖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내 몸은 정직하게 중력의 법칙에 반응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공중부양은커녕 고양이자세, 코브라자세, 비틀기 자세 등에 근접해 본적이 없었다. 

강사는 매 동작마다 자세를 풀고 일어나 내 옆으로 와서 지그시 눌러주거나 감아주거나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육 개월이 지나도록 내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조금도 젖혀지지 않는 고개를 쳐들고 끙끙거리는 나를 보며 강사는 조심스레 혼자서 고개를 내젓고는 했다. 조물주가 인간의 육체에 부여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그녀 또한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요가강습을 계속 받는 것은 명백한 민폐였다. 강사입장에서는 나 한 사람 때문에 매 동작마다 일어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자꾸 호흡은 끊겼다. 6개월 만에 나는 조용히 요가를 그만두었다.

한춤배우기, 가장 불성실한 학생이 되고 말았어요

한춤은 요가처럼 고난도 운동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으로 동사무소를 찾았다. 나는 주민자치센터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수강생들이 당연히 젊은 여성들일 걸로 생각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문화센터 대기실을 가득 메우고 앉아있던 젊은 아이 엄마들을 연상했던 것이다.

요가교실에서처럼 또래 아줌마들 틈에서 또 혼자만 낙오되는 거 아닐까 은근히 걱정도 됐다. 그런데 동사무소 지하의 한춤반 연습실에는 모두 할머니들밖에 없었다. 환갑을 훨씬 지났거나 환갑 또래인 할머니들이 열심히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삼십대 중반이던 나는 그분들에 비하면 한참 젊었다.

할머니들은 제 발로 찾아온 젊은 회원 한 사람으로 인해 무척 고무된 분위기였다. 많은 분들이 춤 연습을 멈추고 와서 내 주변을 에워싸고 앉아 쓰다듬다시피했다. 앞으로 한춤반에서 즐겁게 같이 춤을 배우자며 설득하시는데 엄청 적극적이었다. 한춤을 시작하고 나서 당신들 몸이 얼마나 젊어졌는지, 춤이 얼마나 활력소가 되는지를, 수업 끝나고 함께 어울려 다니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서로 다투어 자랑했다.

건강과 친목도모, 그것들은 모두 내가 한춤을 배우기로 한 본래의 목적과도 부합하였다. 할머니 회원들의 적극적인 홍보와 열화와 같은 환대에 이끌려 그 자리에서 등록을 했다. 그로부터 2년여 동안을 일주일에 삼일, 하루에 한 시간 반씩 평균연령 60대 후반의 40여 명 할머니들 틈에서 허리춤을 질끈 동여맨 요염한 자태의 어우동 복장을 하며 한춤을 추었다.

젊은 나는 한춤반에서 가장 불성실한 수강생이었다. 잦은 지각과 결석에 연습은 늘 태만했다. 연로하신 회원들처럼 어려운 동작을 반드시 마스터하려는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한두 시간씩 먼저 나와 열심히 예습, 복습을 했다. 할머니들 사전에 결석은 없었다. 신변에 천재지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시간엄수에 백프로 출석률을 기록했다. 일찍이 어느 배움의 장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드높은 학구열을 자랑했다.  

새가 모이를 쪼는 귀여운 시늉을 흉내 낸다며 얼굴에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연습하는 할머니, 오른쪽 터닝 모션에 스텝이 꼬여서 어지러울 때까지 돌고 도는 할머니, 팔다리를 교차로 움직여 사뿐사뿐 오목걸음을 떼느라 몇 번씩 넘어지시는 할머니. 그분들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현기증이 날 때까지 쥐어짜면서까지 춤사위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옆의 할머니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춤동작 하나를 두고 누가 더 한들한들 나긋나긋하게 강사의 시범처럼 몸놀림을 할 수 있는가를 견주는 경쟁은 치열했다.

그냥 춤추는 일이 좋아서, 건강 때문에, 함께 어울리는 재미에 한춤을 배운다던 할머니들의 설명은 겉치레였다. 암암리에 서로를 향한 견제와 질시가 끊이지 않았다. 옆 홍여사, 김여사가 자신만 따돌리고 혹 다른 과목을 추가 신청하여 몰래 다니지는 않는지, 수영 초급반에 자신만 두고 몇 몇이 중급반으로 옮겨버릴 것은 아닌 지, 송여사는 오늘 한춤반에 얼마나 일찍부터 나와서 저렇듯 부채춤을 연습하고 있었던 건지 등.

무심한 척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심각한 기류는 언뜻 보면 우정과 화합같았다. 어지간한 관찰력으로는 포착하기 힘들 만큼. 서로 감시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늘 함께 있어야 했다. 할머니들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수영반으로 요가반으로 스포츠댄스반으로 한춤으로 또 사우나로 몰려다니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한춤 배우러 왔는데... 소리없는 각축전이 펼쳐지다

▲ 한춤공연(자료사진) ⓒ 박미경


한춤반 내의 감투자리를 놓고도 회원 상호간에 소리 없는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별한 활동도 없이 몇 년째 이름만 차지하고 있는 회장님이 인제 물러나야지'하는 불만들이 일부 소장파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팽배해 있었다.

그럴수록 회장 할머니는 매시간 강사 다음으로 회장 인사말을 하는 걸로 자신의 굳건한 위치를 만방에 과시했다. 소장파 할머니들의 수장격인 J할머니의 반발과 민심 회유책도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거저나 다름없는 비용으로 일반 한복을 어우동 복장으로 개조해 준 의류수선집을 내게 알선해 준 분도 J할머니였다.

J할머니는 회원들 경조사를 알뜰히 챙겼다. 연습에 지친 회원들을 위해 휴식시간에 맞춰 시원한 수박을 배달시켜 갈증을 풀어준 적도 있었다. 춤에 소용되는 자질구레한 소품들은 한꺼번에 사서 거저 나눠주었다. 이 모든 선행을 위해 J할머니는 무리한 사재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민심잡기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소장파 할머니들은 회장에 대한 은근한 비토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현 회장이 물러나야.....' 라는 분위기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회장 할머니는 나에게 어우동복장 안에 갖춰야할 부품, 속바지랑  버선등을 모두 사주셨고 부채도 한 쌍 구해주는 등 적잖은 호의를 베푸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정권교체의 기회는 생각지도 않게 찾아왔다. 어느 날 회장님 영감님이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세상에, 회장님 어떡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걱정 하면서도 이번에야말로 평화적인 권력교체를 이룰 절호의 기회로 회원들은 흥분했다. 회장님은 당분간 결석을 할 것이고 회장직무대행체제가 장기화되면 자연스럽게 차기 회장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다들 믿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날도 회장 할머니는 어김없이 제 시간에 나타났다. 순간 회원들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완연했다. 회장님은 그런 회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흥겨운 창부타령에 맞춰 그날분의 수업을 훌륭하게 완주했다. 그렇게 J 할머니의 정권교체 꿈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그렇게 회장 할머니는 회장 공석에 따른 회원들의 불필요한 동요를 원천 차단했다.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의 발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호시탐탐 차기 회장을 노렸던 J할머니의 꿈은 사라지고 회장교체의 열망도 모처럼의 호재마저 활용하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안타깝게도 J할머니가 노리는 '차기'는 영원히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J할머니의 권력의지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새롭게 '총무'라는 직책을 만들어 스스로 그 자리에 취임했다. 기습적으로 발의되고 통과된 안이었기에 회원들의 충분한 동의도 구하지 못했다. 어쨌든 J할머니와 소장파 할머니들의 적극공세로 회장님을 비롯한 구체제와 소장파간의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회장님은 여전히 회장직을 유지했고 새로 총무가 된 J할머니는 회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회장 못지 않은 권위와 명예를 누렸다. 우리가 그해 망년회를 노래방을 겸한 뷔페에서 만족스럽게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젊은 총무할머니의 활약 덕분이었다.

까마득한 나이 차 때문에 나는 할머니들의 질투와 견제의 시선에서 비켜났다. 그분들에게 비교와 경쟁의 대상은 동료 할머니들에 한해서였다. 할머니들로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김 여사가 좀 더 젊어 보이거나, 박 여사의 춤사위가 훨씬 날렵해 보이는 것이 못 견딜 배신이었다. 다행히 젊다는 이유로 나는 모든 전란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분들은 유일한 젊은 사람인 나를 무척 애지중지했다.

"젊은 사람이라 금방 따라하는구먼. 자네 몸매가 호리호리해서 춤사위가 낭창낭창하니 뒤태가 아주 예쁘네 그려. 오늘은 신랑 앞에서 한 번 멋들어지게 쳐봐. 신랑이 아주 예뻐서 숨넘어가겠네. 호호호"

이십년 나이 차는 어쩔 수 없어서 할머니들이 그렇게 잘 대해 주고 다독여 주는데도 나는 늘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흘러도 할머니들과의 간격은 좁혀지지가 않았다. 행동반경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춤이 끝나면  할머니들은 나머지 오후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우나로, 할인마트로 몰려가시고 나는 혼자 집으로 오곤 했다.

한춤 배운 지 2년, 다시 등산으로!

그렇게 2년이 가까워 올 무렵 한춤을 그만두기로 했다. 태평무가 끝나고 입춤과 살풀이 과정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굳이 그만 둔 이유를 대자면 또 다시 할머니들의 악착같은 춤사위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나는 '취미삼아' 추고 싶은데 할머니들의 지나친 향학열은 나의 고상한 취미에 죄책감을 자극했다. 갖은 해찰을 다 부리고도, 할머니들이 며칠 걸려 연습한 춤사위을 단 몇 번 만에 따라잡을 수 있는 나의 무지막지한 젊음도 그때는 부담스러웠다.

어지러울 때까지 턴을 연습하고, 좀처럼 귀여워지지 않는 주름진 얼굴을 찡그려가며 모이 먹는 새의 표정을 지어야 하고,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팔다리로 하강한 선녀처럼 사뿐 사뿐 스텝을 밟아야 하는 할머니들의 지난한 노력을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들은 운동으로, 취미로 춤을 추고 있지 않았다.

어느 날 덜컥 맡겨진 손녀를 떼어놓지 못하고 칠십의 몸으로 세 살짜리 손녀를 둘러업은 채 날마다 춤을 배우러 오는 할머니 옆에서 나는 결코 신명나지 않았다. 내려 달라 등에서 보채는 손주를 업고 아등바등 앞 친구의 춤동작을 따라하는 칠십 노인 옆에서 어떻게 감히 '취미'로 춤을 출수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보조를 맞춰도 한춤반에서 나는 너무 진도가 잘나갔다. 잦은 결석과 지각을 일삼는 불량학생이 단지 젊다는 이유로 우등생 할머니들을 가차 없이 앞지르는 것은 바람직한 학습내용이 아니었다.  

한춤을 그만두고 지금은 홀가분하게 등산에 열중하고 있다. 동네 뒷산을 오른 지 몇 년째이다. 나는 여전히 혼자다. 나는 혼자 하는 이 운동이자 취미인 등산이 너무 좋다. 남들이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공중부양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절망할 필요도 없다. 옆에서 칠십 할머니가 등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세 살짜리 손주를 받쳐가며 춤추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민망함도 없다.

그리고 예전에 춤추던 할머니들을 보면서 늘 품었던 강한 의문이 산에 와서 비로소 해소되었다. 할머니들이 수영장으로, 스포츠댄스반으로, 사우나로 몰려다닐 때, 도대체 할아버지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때 묘연했던 할아버지들의 행방이 산에서 확인되었다. 내가 거의 날마다 오르는 우리 동네 뒷산의 등산인구 8할은 할아버지들이다. 할머니들이 지상에서 권력암투와 친목의 상반된 우정으로 드잡이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들은 일렬로 조용히 비탈길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들은 모두 산에  있었다.

같은 산을 몇 년째 오르면서 많은 할아버지들과 안면을 익혔다. 할아버지들은 톱과 삽으로 산책로를 손보기도 하고 산책로를 따라 예쁜 꽃과 나무를 심기도 하신다. 예전 할머니들과의 친목도모는 매우 극렬하고 어수선했는데 할어버지들과는 몹시 차분하고 편안하다.

그리운 할머니들을 버리고 와서 나는 지금 할아버지들과 잘 사귀고 있다. 요즘, 산에 오르며 나는 지상의 한춤반 선녀 할머니들과 산위의 나무꾼 할아버지들을 부킹시켜주는 상상을 하며 슬며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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