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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리(酷吏)는 어떤 존재인가?

우충(愚忠)과 사충(詐忠)의 경계에서 혹리를 말하다

등록|2012.12.03 08:39 수정|2012.12.03 08:39
사마천이 남긴 3000년의 통사 <사기>의 열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도 감명 깊게 보았던 열전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그동안 혹리(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 열전에 관심이 없었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강직하고,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오직 법조문에 따라 엄중히 통치하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혹리 열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위하는 충신일까, 아니면 내부의 적 간신일까?

혹리 열전에서도 주목해서 볼 두 명의 관리가 있다. 그들은 바로 질도(郅都)와 장탕(張湯)이다. 질도는 한나라 경제 때 하동(河東) 대양 사람으로 유명한 혹리였다. 그는 '보라매'라 불릴만큼 엄격하여 제후나 황족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혹하게 법을 집행하였다. 그런데 질도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사사로운 편지나 서신을 받지 않았으며 집에 찾아와 뇌물을 남기고 가는 것 또한 받지 않았다. 기이하고 근거 없는 소문은 듣지도 않았다.

질도는 비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사사로운 정을 끊고 부모와 처자를 등지고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것은 개인적인 정에 휩싸여 사악한 무리들과 모의하는 간신들과는 다른, 우직한 우충(愚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나라 무제 때 또 다른 혹리인 장탕이 있었다. 장탕은 교만한 술수를 써 하급관리들을 통제하는 혹리였다. 또한 그는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법 집행을 가혹하게 하여 백성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장탕은 언제나 무제의 뜻에 부합되도록 판결을 내렸다.

당시 조정에서는 흉노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두고 격론이 일었다. 많은 대신들이 흉노를 공격하자는 무제의 의견에 반대하였지만, 무제의 심중을 알아차린 장탕만은 황제의 뜻에 따랐다. 황제는 절대권력을 쥔 존재로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멋대로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장탕은 군주의 욕심을 알아차리고 교묘하게 그 뜻에 아첨하는 간사한 인물이었고 한 무제는 간신을 충신으로 착각한 것이다. 충을 가장한 장탕의 사충(詐忠)은 질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덕이 재주를 앞지르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재주가 덕을 앞지르는 사람을 '소인'이라 한다. 군자이든 소인이든, 그가 관리가 아닌 평범한 백성이라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관리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면 타인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물론, 만세에 그 악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흥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여럿이 모여도 모자라나, 사충(詐忠)으로 무장한 간신 한 명이 나라를 단숨에 망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오늘날에도 장탕과 같은 간신 무리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들은 윗사람에게는 아첨을 하지만, 아랫사람들은 잔혹하게 다룬다. 백성의 피와 땀으로 공을 세우려 하니 민중은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선이 불과 몇 주를 남겨두고 있다. 사회 지도자들 모두가 자신들이 새 세상을 열어갈 훌륭한 지도자임을 유세한다. 그들이 어떤 탈을 쓰고 있는지 진면목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우충(愚衷)과 사충(詐忠)을 잘 구분하여 선택을 할 일만이 남았다. 부디 나라와 백성을 헤치는 간신이 당선되지는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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