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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 해결해주겠다는 정치인만 있다면..."

[백병규의 현장과 사람들] 2012년 겨울, 을지로·성수동 인쇄골목 사람들

등록|2012.12.06 10:07 수정|2012.12.06 10:45

▲ 을지로4가 인쇄골목. 인쇄할 용지나 인쇄가 끝난 인쇄물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3륜차와 소형 용달차들의 행렬이 잦다. ⓒ 백병규


'웅~' '색, 색~' '착, 착~'

인쇄 버튼을 누르자, 케바우 오프셋 인쇄기가 롤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인쇄할 종이에 바람 넣는 소리, 한 장 한 장씩 롤러에 종이 넣어주는 소리 등이 합쳐쳐 오프셋기 특유의 인쇄음을 토해낸다. 종이가 두루마리째 끊이지 않고 들어가는 신문사 윤전기의 '웅' '차르륵' 하는 고속음과는 달리 오프셋 인쇄에서만 들을 수 있는 독특한 합주다.

인쇄 시작 버튼은 본격 인쇄에 앞서 몇 차례 더 누른다. 처음 들어가는 종이들이 첫 유닛(롤러)에 들어가기 전 걸리곤 한다. 종이가 걸리면 인쇄기는 여지없이 멈춘다. '종이'와 '인쇄기' 사이 일종의 길들이기 수순이다. 일단 종이가 잘 들어가기 시작하면 거침 없다. 국전(939×636mm)이든, 4×6전(788×1091mm) 규격이든, 시간당 최대 1만5000장까지 찍는다.

12년 차 독일제 케바우(KBA-PLANETA) 인쇄기. 2001년 을지로에서 첫 번째로 도입된 게바우 기종이다. 일본산 인쇄기에 비해 견고성이 뛰어나고, 두꺼운 종이에 진한 농도의 인쇄에 제격이어서 도입 당시 을지로에선 이 기계를 구경하러 온 사람이 꽤 있었다. 국내 공급대리점에서 '제품설명회'를 열 정도였다. 그러나 이 기계도 12년 쓰다 보니 지금은 '구닥다리'가 됐다. 이제는 시간당 2만 장 까지 찍는 기종도 나왔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제일인쇄사업조합. 성수역 2번 출구에서 500m 거리 안쪽 골목에 있는 4층 빌딩에는 30여 인쇄업체들이 입주해 있다. 대부분 오프셋 인쇄기들이지만, 인쇄소마다 기종도, 특성도 제각각이다. 스티커 전용 인쇄기부터 양쪽 면을 한 번에 찍어내는 양면 인쇄기, 그리고 케바우 같은 5색, 4색 오프셋 인쇄기 등등. 그 지하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서광프리텍의 현경남(54) 사장. 12년 전 케바우 인쇄기를 사면서, 그의 삶도 '인쇄'에 묶였다.

잘나가던 인쇄골목 영업맨, 13억 투자로 승부 걸다

▲ 서광프린텍의 케바우 인쇄기. 독일제 인쇄기로 두꺼운 용지 인쇄가 용이하고 진한 색을 내는 데 장점이 있다. 기둥 처럼 서 있는 유니트에서 흑색과 적색, 청색, 노랑색 등을 각각 나눠찍게 된다. 시간당 1만5000장까지 찍을 수 있지만 보통 시간당 8000~1만 장 정도의 속도로 돌린다. ⓒ 백병규


독일제 케바우 5색(4색+별색) 인쇄기의 2001년 당시 구입가격은 13억7천만 원. 별로 가진 게 없었던 그로서는 인생 '최대의 투자'였다. 그가 인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 조선대 법대 휴학생으로 서울에 와 해직언론인단체에서 일하다가 <월간 말> 등과 인연을 맺은 것 등이 계기가 돼 인쇄 영업 쪽으로 나섰다. 그때 그는 "사업으로 돈을 벌어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해보고 싶은 것 신나게 해볼 수 있는 밑천은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별로 가진 게 없었던 그가 가진 밑천이라곤 무엇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보겠다는 패기, 튼튼한 몸,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는 끼치지 않겠다는 자신에 대한 약속 정도였다.

영업은 잘나갔다. 자잘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품질과 납기를 맞춰준 것이 입소문 나면서 자연스럽게 영업선도 크게 늘었다. 한때는 월 2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1997년, 고비가 찾아왔다. 외환위기 때였다. 인쇄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주 활동무대였던 을지로의 크고 작은 인쇄업체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시설'이 필요했다.

그는 1998년 동진프린텍(전 동진문화)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일제 아키야마 2절4색기 중고를 3억5천만 원에 사들였다. 1년 후에는 다시 미쓰비시 국전 4색기로 바꿨다. 중고 기계여서 고장이 잦았다. 그때 독일 케바우기종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 인쇄기종들에 비해 짙은 색 처리에 뛰어나고, 내구성이 강한 점이 '차별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3여억 원이나 되는 기계값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운 좋게 리스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다.

▲ 을지로3가 인쇄골목. 각종 인쇄소와 지업사, 제본소, 코팅 업체들이 모여 있다. 이곳 인쇄 골목에서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3륜 짐차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골목이 좁아 이들 3륜차들이 각종 인쇄물과 용지의 배달을 맡고 있다. ⓒ 백병규


"한 때는 을지로에서 불이 커지지 않는 집으로 소문날 정도로 일감이 많았다. 직원도 13명 까지 둔 적도 있다."

케바우 인쇄기를 도입했던 2001년 직후 2~3년 동안 을지로 인쇄업계는 한 동안 활황이었다. 김대중 정부 말기, IT업종이 크게 번성했고, 마침 부동산 경기도 불이 붙기 시작했던 때였다. 케바우 인쇄기는 특히 색감이 진하고 선명하게 나와야 하는 아파트 분양 카탈로그나 브로슈어에 안성맞춤이었다. 거래선도 200여 곳 가까이 됐다. 주변 인쇄소들의 외주물량(다른 인쇄업체가 수주받았지만,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하거나 기종이 맞지 않아 다른 인쇄소에 내보내는 물량)도 적지 않았다. 케바우 인쇄기를 밤에도 쉬지 않고 돌려야 겨우 납기를 맞출 수 있었다. 밖으로 내보내는 물량도 많았다. 한 달에 일요일 단 이틀만 쉴 정도였다. 현 사장 말대로 "미친 듯이 일하던 때"였다.

그로부터 10여 년. 현 사장은 얼마 전 인쇄업을 접을까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게바우 인쇄기를 매물로 내놓기도 했다. 케바우를 팔고, 남은 리스료를 청산해 몸집을 가볍게 한 후 비교적 저렴한 일제 중고 인쇄기로 인쇄업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아예 '업종 전환'까지 고려했다. 지금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구상하고 있다. 경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하지만,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 패턴으로 갈 것 같지는 않아서다. 그는 지난해부터 직접 인쇄기를 돌리기 시작해 이제는 웬만한 '기장급' 이상이 됐다. 인쇄는 밤낮 없이 돌리는 일이 많아, 낮일은 '기장'이, 밤일은 '현사장'이 분담하고 있다.

경기 위축에 '출혈 경쟁'... 인쇄 시장도 양극화

▲ 인쇄될 종이가 쌓여 있는 입력부. 사진 오른쪽의 노즐에서 바람이 나와 종이를 띄우면 흡착 밸브가 종이를 한 장씩 잡아 인쇄기로 보낸다. ⓒ 백병규


그런 그가 한 때 업종전환까지 생각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체적으로 인쇄 물량이 크게 준 것이 가장 큰 타격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결국 내 문제였던 듯하다. 사업가로서 내 자질이 부족했다. 더 냉정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좀 더 치밀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결단을 내릴 때 내리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지금 보면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내 탓'으로 돌렸다. 아무리 여건이 어려워졌다 해도 나름 '돌파'할 수 있는 기회와 방안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인쇄가 '사양산업'이라곤 하지만, 대형 인쇄업체는 여전히 기계 돌리기에 바쁘다. 중소업체들도 괜찮은 대형 거래선 하나만 잡더라도 기계에 딸린 식구들은 먹고 살 수 있다. 또 나름 전문화와 특성화를 통해 활로를 찾고 있는 인쇄업자들도 많다. 하지만, 현 사장처럼 나름 열심히 해왔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폐업하고 있는 중소인쇄업체들이 그보다 훨씬 많다.

2002년, 2003년 을지로 인쇄업자들의 '반짝 호황'은 짧았다. 곧 이어 불황의 바람이 을지로를 덮쳤다. 인쇄업종은 경기민감 업종이다. 기업들은 경기가 어려워지면 홍보비부터 줄인다. 홍보비가 줄면, 인쇄 물량부터 줄이거나 없앤다. 한 때 유행했던 학습지가 쇠퇴하면서 인쇄 물량이 크게 준 것도 여파가 컸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종이 매체가 급격히 인터넷으로 대체되면서 종인 인쇄의 수요 자체가 큰 폭으로 줄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대세다. 그것은 곧 대형 인쇄소부터 납품 단가 경쟁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 마지막 고리인 중소 인쇄업체의 심각한 물량 감소와 경영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인쇄를 시작한 후 나온 인쇄물에 잡티가 묻어나자 해당 색깔의 유니트를 열어 인쇄판(CTP) 판을 다시 닦아주고 있다. 인쇄가 일단 시작되면 보통 시간당 7~8000장에서 1만 장까지 찍어내지만 그 준비 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 백병규


인쇄업계의 물량이 전반적으로 줄면서 대형 인쇄업체들부터 단가 낮추기 경쟁에 나섰다. 대형 업체들은 여러 가지로 단가 면에서 유리하다. 종이는 물론 각종 인쇄 재료들을 중소업체 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사들인다. 물량이 많다 보니 제지업체나 인쇄재료 공급업체들과의 직거래를 통해 중소업체들보다 10%에서 크게는 30%까지 저렴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다. 그만큼 중소업체에 비해 '단가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특히 중소업체들 대부분이 부담하고 있는 금융비용 측면에서도 대형업체들이 훨씬 유리하다. 여기에 CTP(과거 필름을 떠 소부판을 굽던 공정을 생략하고 컴퓨터에서 바로 데이터를 직송해 출력하는 인쇄판) 등 인쇄 앞공정과 접지나, 제본 등 인쇄 뒷공정을 모두 처리하는 일관시스템을 갖춰 단가 면에서 중소업체에 비해 훨씬 우위에 서 있다. 대형인쇄업체들의 브랜드 파워도 중소인쇄업체의 물량을 빨아들이는 주된 메리트 가운데 하나다.

인쇄 시장의 큰 고객인 대기업과 유통업체들은 인쇄업자들의 이런 '출혈 경쟁'을 100% 이상 활용하고 있다. 을지로 3가에 있는 세원제지의 남석형 이사는 "인쇄업체들이 너도나도 단가를 낮추다 보니까 빚어진 일이어서 대기업 탓이라고만 말 할 수는 없다"며 "그러나 대기업 담당자들을 보면 어떻게든 단가를 낮추는 것이 바로 실적으로 이어져 이런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예상과는 달리 대기업 인쇄 물량을 이름 난 대형 인쇄업체에서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대형 인쇄업체들은 어기간해선 대기업 입찰에는 참여하지도 않는다. 최저가 입찰 방식이기 때문에 단가가 너무 낮은 것도 그 요인 가운데 하나다. 대기업들은 또 직접 인쇄 물량을 발주하는 경우도 드물다. 기획사 등을 대행사로 내세우고, 그 사이에는 또 대기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브로커'들이 끼어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물량이 많고, 결제조건이 나은 편이어서 여기에 목을 매는 인쇄업자들이 많다. 실제로 대기업 일감 하나만 받으면 수십 명 먹거리는 된다. 그러나 위험부담도 크다. 대기업과 특수 관계에 있는 인사를 임원 등으로 영입해야 하고, 더불어 꽤 많은 영업비용을 써야 한다. 자금에 여유가 없는 업체로서는 대기업 물량 수주에, 또 그 유지에 사활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에는 계열 제지사 등을 내세워 아예 인쇄업체들을 사실상 '계열화'하는 움직임까지 있다. 대기업 물량과 계열 제지업체의 용지 공급을 연계하고, 제지업체가 이를 통해 인쇄 시장까지 엿보는 추세다.

인쇄 단가에 대해서는 대기업만 그런 것은 아니다. 출판 등 다른 발주처도 마찬가지다. 생존의 위기에 몰린 중소인쇄업체들도 인쇄 단가를 올려달란 말은 꺼낼 수도 없다. 인쇄기를 놀리느니, 물량만 있다면 낮은 단가라도 얼마든지 감수할 태세가 돼 있다. 지난해에만 을지로에서 사라진 인쇄 관련 업체 수는 600여 개나 된다.

이 때문에 인쇄 단가는 지난 10년 동안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떨어졌다. 대기업들은 그동안 매년 인쇄단가를 10~15%씩 떨어트려 왔다. 1990년대 중반 연(인쇄용지의 단위 : 1연은 국전이나 4×6전 전지 500장)당 3000~4000원씩 갔던 인쇄비는 이제 연당 1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10여 년 사이에 인쇄비용이 3분 1, 4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것이다.

단가 하락에는 인쇄 기술의 발전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에는 최고 성능의 오프셋 인쇄기의 시간당 인쇄 속도가 전지 5000~7000장 정도였지만, 지금은 시간당 2만 장까지 찍는 기계들이 많다. 그래도 연당 1500~2000원 정도는 돼야 '적절한 마진'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지금 단가는 연당 1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당 800~900원, 심한 경우에는 500원인 경우도 있다. 반면 종이 값은 지난 몇 년 동안 30% 이상 올랐다. 대기업에서 공급하는 알코올이나 잉크 등 재료비용도 오를 만큼 오른다. 서광프린텍 현 사장의 말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은 4도 컬러 인쇄의 경우 인쇄비로 시간당 10만 원은 받아야 채산이 맞는다. 24시간 풀로 돌렸을 때 이야기다. 그러나 시간당 7~8만원 받기 힘들 때도 많다."

시간당 10만 원이면, 어림잡아 한 달 25일 거의 쉬지 않고 돌릴 때 5000만원 정도가 인쇄비로 떨어진다. 디자이너·경리 등 지원인력을 최소화하더라도 하루 종일 인쇄기를 돌리자면 인건비(낮밤 교대 2조, 1조 2명 기준)만 1500만 원이상 들어간다. 여기에 임대료(500~1000만 원), 전기료(200~300만 원), 잉크나 부품 등 재료비와 부품비(1000만 원) 등 대략 3000여만 원이 들어간다. 현 사장처럼 금융비용(리스료) 부담이 있을 경우 1000만 원 정도 남을까 말까다. 

중소인쇄업체들의 치명적인 '덫' 미수금

▲ 인쇄조합 건물 안 복도에는 인쇄물 등을 쌓아놓을 수 있도록 공간이 널찍하다. 건물에는 물건을 싣고 내리는 대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지만, 사람 전용 엘리베이터는 없다. ⓒ 백병규


그렇더라도 한 때 불 꺼지지 않는, 잘 나가는 인쇄소였다면 지금은 어렵더라도 그동안 벌어놓은 것은 있지 않을까.

"지난 12년 동안 못 받은 돈이 어림잡아 12억 원은 되는 것 같다. 연간 1억 원 꼴이다."

무슨 소리인가. 직원을 13명까지 뒀을 때 동진프린텍(서광프린텍의 전신)은 한 해 매출이 15~17억 원까지 했다. 종이값과 인건비·재료비 등을 제외하면 어림잡아 2억 원 정도가 남았다. 문제는 미수금이다. 지금은 결제조건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통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어음이나 가계수표로 결제를 받는다. 하지만,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에는 1년, 2년, 그리고 지금까지 받지 못한 것이 그렇게 쌓였다.

그래서는 '속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 줄 돈도 제때 못주게 된다. 하지만 세금이나 임대료·리스료 등은 계속 미룰 수도 없다. 종이값은 선불이거나, 곧바로 결제하지 않으면 다음 거래가 어렵다. 잉크나 알코올 등 인쇄 재료비도 결제를 유지하지 못하면 '신용'이 바닥난다. 그래선 인쇄기를 돌릴 수 없다. 받을 돈은 제대로 못 받아도 줘야할 돈은 어떻게든 융통하는 수밖에 없다. 인쇄기를 돌려야 하고, 인쇄물이라는 '제품' 생산의 제일 마지막 공정에 있는 인쇄업자들이 대부분 겪고 있는 '고통'이다. 그러다 보면 직원들의 '퇴직금' 등이 결국에는 문제가 되곤 한다.

인쇄를 맡기는 유형은 다양하다. 인쇄물을 발주한 곳에서 직접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소인쇄업체들은 대부분 한 단계 정도를 더 거친다. 디자인이나 출판·인쇄를 대행하는 기획사 등을 통하는 경우가 많다. 영업만 뛰는 영업맨들이 맡기거나 다른 인쇄업체가 수주받은 것을 다시 넘기는 경우도 꽤 있다. 문제는 이들 중간에 있는 기획사나 영업맨들이 인쇄비 지급을 당연히 지급해야 할 비용으로 제 때 털지 않는다는 데 있다.

"중간에 있는 기획사 등이 대금을 받으면 당연히 거기에 들어간 비용을 먼저 지급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먼저 자신들이 써야 할 것부터 쓰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쇄비 지급은 제일 나중으로 밀린다. 비단 인쇄만 그러겠느냐. 대한민국이 온통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먹이사슬의 제일 끝에 위치한 사람들은 죽어난다."

물론 거래처의 70~80% 정도는 늦어지더라도 결제는 한다. 그러나 20~30% 정도는 제대로 못 받거나 아예 받지 못하는 경우다. 그 중에는 몇 년 씩 거래를 한 곳도 있다. 조금씩 쌓인 것이 3~4년 되면 미수금만 몇천만 원을 훌쩍 넘긴다. 그 때 쯤 되면 다그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믿는 수밖에 없지만, 끝내 그 믿음이 무너지는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어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인쇄 발주처 등이 부도나거나 크게 일을 벌였다가 망한 경우다. 그러나 받을 것은 다 받아놓고도 당장 자신들이 쓸 곳부터 쓰고, 인쇄비는 떼먹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려워지는 인쇄골목 사정·야박해지는 인심, 그래도...

▲ 10평도 채 안되는 을지로 3가의 마스터 인쇄가게. 한 때는 이 작은 마스터 인쇄기에도 두 사람이 붙어 하루 종일 기계를 돌린 때도 있었다. 마스터기는 각종 서류 양식이나 세미나 인쇄물, 단도의 단행본을 주로 찍는다. 천장 기준으로 7000~8000원을 받는다. 7000~8000장 인쇄 자체는 10분이면 끝나지만, 색 조절 등 그 준비 시간까지 치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경우가 많다. ⓒ 백병규


2교대로 밤낮없이 돌리던 동진프린텍의 케바우 인쇄기도 2006년께부터 밤에 쉬는 날이 많아졌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학습지가 줄고, '종이'가 '인터넷'으로 대체되면서 을지로 인쇄골목에 들어오는 물량 자체가 눈에 띄게 줄었다. 독특한 인쇄 품질로 한 몫 하던 케바우도 그 힘을 잃었다. 단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품질은 주된 경쟁 요인에서 밀려났다. 동진프린텍이 많이 찍었던 월간지들의 사정이 갈수록 어렵게 된 것도 한 요인이다. 월간지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결제도 늦춰지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단체나 시민 사회단체의 기관지 가운데 이곳을 거친 곳이 많다.

반면 조금은 무리했던 초기투자 비용은 리스료로 남아 큰 압박요인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느닷없는 세무조사로 세금폭탄(?)을 맞았다. 비영리단체의 인쇄 물량이 문제가 됐다. 부가세와 관련한 영수증 처리를 정밀하게 하지 못한 것이 빌미가 됐다. 할 말은 많았지만 법은 여지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억대에 육박하는 세금은 큰 타격이었다. 2011년 6월, 몸집을 줄이고 인쇄기계를 성수동으로 옮겼다.

매월 돌아오는 월급날은 중소인쇄업체 사장들에게는 무던히도 힘든 날이다. 다른 것은 못 주어도 월급만큼은 제때 맞춰야 한다. 하루라도 늦을라치면 기계가 선다. 기장들도 훌쩍 떠나버린다. 을지로 인쇄골목은 의외로 인심이 야박하다. 기름때를 묻히며 일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계산은 칼이다(사장 입장에서는 나름 배려한다고 배려했지만). 조금이라도 손해본다고 생각하면 안면을 싹 바꾼다.

한 번은 기장으로 채용한지 한 달이 채 안 돼 국민연금 등이 미처 처리되지 못했다. 다음 달에 월급도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월급 받은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 게바우 기종은 국내에 많지 않아 제대로 다루는 기장을 구하기가 힘들다. 임시로 기장을 구하기는 더욱 어렵다. 납품기일이 촉박한 인쇄물이 쌓여 있는데 기계를 돌릴 수 없게 됐다. 통사정을 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기장과 결국 멱살잡이 까지 갔다. 그가 직접 기계를 돌려야 하겠다고 작심한 이유다.

"생각해보면 사회 탓이다. 그동안 얼마나 당했으면 그럴까 싶다. 이 바닥에선 사람들 사이의 신뢰나 배려 같은 것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힘들어지다 보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싫다."

11월 중순, 취재차 세 번째 그를 만난 날, 서광프리텍 바로 옆에 위치한 인쇄소에서 사고가 났다. 앞뒷면을 한 번에 찍을 수 있는 양면오프셋기를 갖고 있는 곳이다. 2013년도 수첩 속지 인쇄에 문제가 생겼다. 인쇄할 때 색이 조금 진하다 싶어 잉크 농도를 약간 줄였는데, 상당수 페이지에서 조금 진하게 나와야 할 선이 약하게 나와 버렸다. 인쇄 시작 때 나온 교정지에서는 구분이 됐지만, 인쇄기가 속도를 내면서 잉크 농도가 옅어진 것이다. 전량 반품 처리다. 들어간 종이만 100연이 넘는다. 종이값만 최소 360만 원은 손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광프린텍에서 인쇄를 의뢰한 책 본문의 페이지가 뒤섞이는 사고도 발생했다. 128쪽 뒷면에 224쪽이 인쇄된 식이다. 인쇄판(CTP)을 걸 때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좀체 일어나기 힘든 사고다. 일감이 몰려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며칠 밤낮을 거의 쉬지 못한 채 돌리다 보니 난 사고였다. 이 책은 하드커버의 양장본이어서 제본비까지 합하면 500~600만 원이 더 들어가게 됐다. 본문 용지는 인쇄소에 여분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한두 달 인쇄기 돌린 것은 헛일이 되기 십상이다. 현 사장도 표지 인쇄를 다시 해야 하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부부 둘이서 운영하고 있는 이 업체의 곽아무개 사장은 "현 사장을 도와줘야 하는데 되레..."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각박하다지만, 어려운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는 마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닌 듯싶다.

연말 경기도 옛말... 인쇄골목 사정 살필 대통령 나올까

▲ 서광프린텍이 입주해 있는 제일인쇄조합 건물 전경. 지상 4층, 지하 1층에 30여 중소인쇄업체들이 입주해 있다. ⓒ 백병규


알코올 등 인쇄 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이종갑(61) 사장은 누구보다 인쇄업 돌아가는 사정에 훤하다. 재료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들 중소 인쇄소 경기가 어떤지 단박에 헤아릴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최근 을지로와 성수동 인쇄 경기는 "IMF(외환위기) 때보다 더 안 좋다." 을지로 인쇄소들은 보통 여름 휴가철에 일감이 제일 없는 편이다. 찬바람 부는 10월부터 물량이 늘어나 지금 밤낮없이 인쇄기를 돌려야 할 때다. 그런데 "여름 휴가철 보다 지금이 더 한가하다"고 한다. 

을지로 3가 세원제지의 남 이사도 "연말엔 캘린더 시장이 큰 데 큰 물량을 따낸 몇 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재미를 보지 못하게 생겼다"고 말했다. 지난해보다 물량이 준 데다 단가까지 크게 떨어져 일감을 딴 곳도 수지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 남 이사는 "물량도 물량이지만, 단가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밤낮없이 인쇄기를 돌리고 있는 대형인쇄업체들도 속사정이 매우 심각하다"고 했다.

인쇄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사양산업인가. 남 이사는 "인쇄 물량 총량이 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출판 등 전통적인 종이 인쇄 시장은 줄었다. 그러나 박스나, 스티커 등 상업(혹은 산업) 인쇄 물량은 더 늘었다. 문제는 그 쪽 사정도 종이 인쇄 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상업인쇄 쪽도 '그놈의 단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현 사장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한 때는 주변의 인쇄쟁이들과 논쟁도 많이 했다. 어떻게 정치를 바꿔야 하는지, 어떻게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에도 세상이 별로 바뀐 게 없고, 더구나 먹고 사는 현장에서 열심히 노력해도 더 어려워지고 힘들다 보니까 정치에 무슨 기대를 했던가 싶어진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어지다보니 '정치'라는 것이 뜬금없어 지더라는 것. 그래선지 "주변에서는 여간해선 정치 이야기는 아예 안 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 논의가 한창이다. 대선 후보들은 앞 다퉈 재벌을 규제하고, 골목상권을 보호하며, 중소기업을 살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웃물이 맑아지면 아랫물도 맑아지기 마련. 이러한 제도들이 도입돼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나 단가 후려치기 등에 제동이 걸리면 언젠가는 현 사장 같은 중소 인쇄업체들도 최소한 밑지지는 않는 '단가'를 받아 그나마 조금은 숨통이 트일 날도 올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1월 22일, 마침 TV에서 막판에 몰린 '야권후보 단일화' 뉴스를 보던 제지사의 남 이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정치인만 있다면..."이라며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오기는 올 것인가. 어느 정권이 됐든 적어도 그런 희망의 단초라도 제공할 수 있을 때 을지로나 성수동 인쇄골목에서도 다시 '정치 이야기'가 되살아날 듯싶다.
덧붙이는 글 백병규 기자는 오마이뉴스 편집기획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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