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전 세계의 뮤지컬이 모여있는 곳

[유럽기행 99] 런던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 기행

등록|2012.12.06 10:06 수정|2012.12.06 10:06
우리는 런던 시내를 달리는 빨간 2층버스를 타고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에서 내렸다. 피카딜리 서커스는 국제도시 런던에서도 최고의 번화가로 유명한 곳이다. 꽃과 채소를 팔던 시장이었던 피카딜리 서커스는 현재 패션과 쇼핑 거리, 뮤지컬 극장들로 둘러싸인 원형광장이 되어 있다. 서커스라는 이름에 맞게 이 원형광장에서는 여러 개의 도로가 퍼져나가고 있다. 광장 한 중앙의 전자 광고판에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피카딜리 서커스런던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번화가이다. ⓒ 노시경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숱하게 보았던 피카딜리 광장 위에 섰다. 원형의 계단이 올려진 광장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고 분수대 중앙에는 에로스 상이 있다. 에로스는 푸른 하늘 밖으로 사랑의 화살을 쏘고 있다. 이 동상은 한 발만 분수대에 딛고 서서 몸을 앞으로 구부린 천사상이지만 화살을 쏘고 있는 모습이 에로스를 닮아 에로스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별명이 이제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에로스상원래 천사로 조각되었지만 사랑의 화살을 쏘는 에로스가 되었다. ⓒ 노시경


에로스 분수대가 런던 시민들의 단골 약속장소로 이용된다는 사실은 분수대 중앙의 계단에 수많은 시민들이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런던을 동경하는 외국 여행자들은 동상 주변에서 서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아무리 봐도 런던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이다. 런던의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오늘은 동상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밝다.

레스터 스퀘어런던의 뮤지컬과 영화의 중심지이다. ⓒ 노시경


나는 아내, 신영이와 함께 피카딜리 서커스의 수많은 가게들을 뒤로 하고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를 향해 걸었다. 레스터 스퀘어! 영국의 살아 숨쉬는 뮤지컬 극장과 영화관, 그리고 다양한 노천카페와 식당, 서점가 등 다양한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광장 중앙의 작은 공원에 들어서니 셰익스피어와 채플린 동상이 오가는 젊은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주변에는 옷차림 수수한 런던의 젊은이들이 이 거리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레스터 스퀘어에 도착하자 기타를 치는 거리공연이 우리를 반겼다.

거리공연레스터 스퀘어에는 이색공연이 끊이지 않고 열린다. ⓒ 노시경


레스터 스퀘어 주변을 보니 영화관도 많은데 영화관 건물 높이가 너무나 낮은 것이 의외다. 이 오래된 영화관의 낮은 건물 높이에서 어떻게 스크린이 갖추어져 있을지 의문일 정도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관의 외관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영국인들의 고집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도 레스터 스퀘어의 영화관에서는 유럽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가장 먼저 상영하는 일이 많고 유명 영화시사회도 자주 열린다. 유명 영화배우들이 레드 카펫을 밟고 나타나는 시사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이곳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영화관 바로 앞 길바닥을 보니 1996년 <미션 임파서블> 개봉 당시 이곳을 방문했다는 영화배우 톰 크루즈의 손바닥이 찍혀있다.

뮤지컬 할인티켓레스터 스퀘어에서는 당일 뮤지컬 표를 싸게 구할 수 있다. ⓒ 노시경


그러나 레스터 스퀘어의 이름을 가장 빛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뮤지컬이다. 레스터 스퀘어는 전 세계 뮤지컬의 중심지이자 뮤지컬의 원조인 곳이다. 이곳에서는 최근 런던에서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을 볼 수 있고 뮤지컬 표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곳도 많다. 당일 뮤지컬 표를 구하려면 레스터 스퀘어에서 대부분의 뮤지컬 티켓을 다루는 TKTS 등을 다니면서 가장 싼 곳을 찾으면 된다. 그러나 인기가 높은 뮤지컬 극장의 좋은 좌석을 구하려면 오전 10시 이전에 레스터 스퀘어에 와야 좋은 좌석의 표를 구할 수 있다.

나는 런던 현지에 와서 뮤지컬 표를 구하면 원하는 표가 없을 수도 있고 표를 구하러 다니는 시간이 아까워서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뮤지컬 극장 2곳을 예약해서 왔다. 그 많은 런던의 뮤지컬 중 뮤지컬 2개를 고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아내, 딸과 함께 볼  수 있는 뮤지컬로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와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을 골랐다. 뮤지컬 표를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하면서 느낀 점은 수천 km 떨어진 영국 극장의 표를 너무나 손쉽게 집의 책상에 앉아서 구한다는 사실이었다. 참 놀라운 세상이지만 너무 간편해진 세상에 여행의 재미는 반감되는 것 같다.

우리는 레스터 스퀘어 주변에서 식사를 먼저 하고 뮤지컬을 즐기기로 했다. 광장 주변에서 식당을 찾아가면서도 우리는 대로변에 자리한 수많은 뮤지컬 전용극장들을 만났다. 그런데 뮤지컬 전용극장들을 보면서 놀라운 점은 각 극장들마다 오로지 그 뮤지컬만 전용으로 공연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며칠만 상영하다 간판을 내리는데 수 년, 수 십년 동안 한 극장에서 뮤지컬을 공연하면서도 수많은 관객들이 뮤지컬 극장에 모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허 머제스티스 극장오페라의 유령을 20년 넘게 공연하는 전용극장이다. ⓒ 노시경


우리는 대로변 가게의 마음씨 좋아보이는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다. <오페라의 유령>을 전용으로 공연하는 '허 머제스티스 극장(Her Majesty's Theatre)'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1986년에 런던의 이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의 유령>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쉼 없이 공연 중이다. 나는 내 머리 속에 강한 인상으로 각인되었던 <오페라의 유령>을 오리지널 영어 공연으로 만나보고 싶었다.

발길을 서둘렀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 시작 시간에 늦지 않게 극장에 도착했다. 오랜 역사의 극장이기에 극장 안 통로는 아주 좁다.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극장에 몰리는 상황에서 모두들 침착하게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좁은 통로에 가득 찬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좌석을 찾아가고 있었다. 극장은 생각보다 조금 작고 좌석도 좁은 편이며, 무대를 바라보는 좌석의 경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심했다. 좌석의 경사가 심해서 앞 사람 머리가 공연 감상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극장의 관객들뜬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 노시경


조금 불편하지만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 옛날 극장을 개조하지 않고 전통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새 것보다 오래된 건축물과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온 손때 묻은 물건들에 더 가치를 두는 영국인들의 특성이 이곳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2층 좌석과 천장 사이에는 극장을 지탱하는 작은 기둥들이 옛스러운 극장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랑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장 종업원 아가씨는 사랑의 꽃을 팔고 있다. 우리는 2층 객석에 앉았지만 극장이 아담해서 무대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극장 종업원극장 안의 아가씨는 사랑의 꽃을 판다. ⓒ 노시경


관객들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이내 좌석은 가득 찼다. 뮤지컬이 시작되면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나는 극장의 무대와 함께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는 관객들의 사진을 찍었다. 곧 공연은 시작되었다. 뮤지컬의 스토리는 알고 있기에 영어 대사도 드문드문 들렸다. 나는 눈앞의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과연 뮤지컬을 보면서 정녕 마음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지 말이다. 풍성한 문화를 즐기는 서양의 중심, 런던에서 백인들이 즐기는 문화적 취향을 같은 극장에서 즐기며 내가 특별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생각이었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서 나는 무대의 뮤지컬 배우들에게 몸을 기울이며 압도당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의 가운데에 흰 천으로 가려져 있던 물건은 샹들리에였다. 유리구슬로 만들어진 무게 500kg의 샹들리에가 공연 도중 극장의 2, 3층 높이까지 올라오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객석으로 달려들던 샹들리에는 무대 위에서 곤두박질 치듯이 내려온다. 눈 앞에서 보이는 무대의 장관은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이다. 무대의 바로 밑에서는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무대음악을 열심히 연주하고 있다. 음악이 무대에서 살아나오기 때문에 공연이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오페라의 유령런던에서 시작되어 가장 장기간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중의 하나이다. ⓒ 노시경


가면 속에 얼굴을 숨긴 팬텀의 연기와 바리톤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다. 크리스틴의 맑고 놀라운 고음은 소름이 끼친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재현한 무대와 배우들의 오페라 하우스 의상은 저 멀리 환상 속에 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팬텀과 크리스틴을 태운 작은 배는 지하호수를 지나며 몽환 속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무대 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세상, 힘들고 바쁜 삶 속에서도 이런 꿈 속의 무대가 있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뮤지컬 광고판지하철 역에도 온통 런던의 뮤지컬을 광고하고 있다. ⓒ 노시경


아침부터 런던을 걸었기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몸이 무거웠다. 나는 얼굴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아내와 신영이를 데리고 피카딜리 서커스 역으로 내려왔다.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 옆을 보니 이곳에도 온통 뮤지컬 광고판이다. 아내와 신영이는 해머스미스(hammersmiths)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곯아 떨어졌다. 나도 피곤했지만 나까지 자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피곤을 다 버리고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하루만 지나도 오늘 밤의 피곤은 잊어버리고 <오페라의 유령>의 소름 끼치는 고음만이 머리 속에 되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