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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투사' 마르코스와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이 되다

[대선특집 - 한국인을 위한 필리핀 현대사 1]

등록|2012.12.08 17:35 수정|2012.12.11 17:13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고 판세는 초박빙이란다. 흥미롭게도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필리핀에는 한국의 정치상황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꽤 많다. 빅2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모습도 필리핀 정치사의 인물들과 비교가 가능하다. 더더욱 비교가 가능한 인물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고 그 이후의 대통령들도 해당한다.

이 글은 특히 현대사와 관련하여 필리핀과 한국의 비교할 만한 점들을 몇 차례로 나누어 서술할 예정이다. 이 글들을 통해 한국인들의 필리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다음은 앞으로 연재할 글의 순서인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조금 속도감있게 글을 집필하고자 한다.

 ① '반일투사' 마르코스와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이 되다.
 ② 마르코스의 계엄령과 박정희의 유신체제, 민주투사 아키노와 김대중
 ③ 정권교체후 병원연금된 아로요 전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미래
 ④ '독재자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와 '독재자의 딸' 박근혜,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후보 ... <기자의 말>

아버지 선거 돕다가 상대 후보 사살... 무죄 판결 후 반일투사로

최근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젊은 세대에게는 많이 잊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비할 필리피노는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다. 그는 20년 동안 필리핀을 통치했고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독재자'라는 일반적 평가와 더불어 고향지역에서는 사후에도 여전히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그의 딸과 아들이 현재 유력한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선후보 중 하나기도 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65년 합법적인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했다. 그는 필리핀 최고의 대학인 국립 필리핀 대학의 수재로서 학업과 그밖의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재학 중 아버지 마리아노 마르코스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의 운명은 한번 요동쳤다. 마리아노는 고향마을인 필리핀 북쪽 일로코스 노르테(Ilocos Norte)에서 1939년에 국회의원에 출마했는데 나룬다산에게 패했다. 그런데 다음날 당선자 나룬다산이 괴한 4명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범행은 마르코스 일가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마리아노와 친척들이 가담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필리핀 대학 사격부 출신인 마르코스가 사살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마르코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극적으로 복역 중에 사법시험을 봤던 마르코스가 합격했다(또한 마르코스는 복역기간에 필리핀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했는데 27일간의 복역이 없었다면 수석졸업을 하였을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이어 마르코스는 대법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하 괴뢰정부의 대통령이었던 호세 로렐이 당시에는 대법관이었는데 마르코스의 재능을 아까워해 그를 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르코스는 북부 루존 지방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고 한다.

약 9천여 명이 되는 대부대를 이끌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주장하나 이후 조사에 의하면 마르코스의 주장처럼 큰 전과를 올렸는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항일투쟁을 하였던 반일투사였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반일투사' 마르코스, '친일파' 박정희, 둘 다 대통령에 당선

박정희는 1961년 4·19 혁명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을 거꾸러뜨린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었다. 일제시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큰 칼을 차보고 싶은 마음에"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였다고 한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를 피력한 편지와 혈서를 제출하면서 그는 결국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한 그는 이후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여러 증거를 통해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증명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정치 경력을 거치고 상원의장이 된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을 지지하였다. 그가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카파갈이 이를 번복하고 재선에 출마하자 마르코스는 당적을 바꾸어 로렐이 있는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입당하자마자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속히 하겠다는 약속을 계속 미루다가 결국 본인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도 역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선 과정에서 마르코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반일투사의 이미지를 한껏 고양시켰다. 상대 후보들은 과거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선거전략은 효과적이었다. 당선된 후에는 경제발전과 정부개혁, 그리고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하지만 그의 초임 재위기간 내에는 농민들이 공권력에게 학살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경찰관이 승진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많은 비판이 있었다.

박정희 후보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친일파 경력보다는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이었다. 광복 직후 남로당에 입당하여 여순 사건을 조직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후 역시 경제발전과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였다. 

마르코스, 베트남전 참전 결정...관련국 회담에 박정희도 참석

▲ 마닐라 정상회담 참석자들. 마르코스를 중심으로 찍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소홀히 취급되었다. 필리핀 책 <A Nation Reborn>(1998)에 실린 사진 ⓒ


마르코스의 첫 번째 임기 중에 눈여겨볼 만한 정책은 베트남 참전 결정이다.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베트남 지원법을 통과시켰고, 연인원 만 명 이상의 필리핀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비전투 활동에 참여하였다.

처음부터 논란이 되었던 것은 베트남전에 대한 마르코스의 태도 변화였다. 상원의장이었을 당시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마카파갈의 베트남 파병법에 반대하였고, 하원에서 통과된 지원법을 상원에서 지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폐기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는 180도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는 경제 지원 때문에 미국에 넘어갔다는 의심을 받았고, 지지자들에게까지 비판을 받았다.

베트남 전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마르코스는 마닐라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1966년 미국을 방문했던 마르코스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 "마닐라에서 아시아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정상회담의 목적은 베트남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상황을 끝내고 베트남을 도우려는 목적이라고 하였다. 양심적 지식인들은 "뻔뻔스럽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다" 등등으로 비판하였고, 이에 정상회담의 이름이 '마닐라 정상회담'으로 바뀌었다.

정상회담에 참가한 국가는 베트남전에 참가하는 7개국이었는데 필리핀, 미국, 타이,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남베트남, 그리고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고, 따라서 정상회담의 대표 참가자도 박정희였다. 척 봐도 피비린내 나는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힘들어 보였다.

결국 정상회담은 북베트남의 조롱만 받았다. 필리핀측 자료에 따르면 마르코스는 평화적 대응을 하려 했으나 남베트남과 한국의 대표가 강력한 대응을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대표였던 박정희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므로 어떤 면에서는 그의 태도가 이해할만 하기도 하다. 

베트남전 참전 결정을 한 마르코스와 박정희도 공통점이 있지만,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양심적 세력과 학생들의 시위 모습도 양국 간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는 한국이 필리핀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반(反)정상회담 시위에서 대학생들은 "양키고홈", "먼저 쏘고 나중에 대화하라- 잔슨", "헤이 잔슨, 오늘은 몇 명이나 죽였나?" 등의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나 "베트남: 핍박받는자들의 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의 폭력집안 과정에서 학생들은 신발을 잃고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또한 시위대는 그 과정에서 필리핀 국가를 제창하고 대열을 흩뜨리지 않고 경찰 앞에 섰다. 이 광경은 태극기를 둘러메고 뿌연 최루탄 사이에 서 있거나 애국가를 부르며 대열을 유지하는 한국의 대학생들의 시위를 떠올리게 한다.
덧붙이는 글 양두영 기자는 국립필리핀대학에서 필리핀 역사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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