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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무렵의 뜨거운 삶을 추구하며

등록|2012.12.13 13:36 수정|2012.12.13 13:36
환갑을 먹던 2008년 몇 가지 큰 경험을 했다. 천주교 태안성당 총회장으로 '기름과의 전쟁'에 전력투구했다.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 사고는 내 일상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매일같이 바다에 나가는 생활을 서너 달 동안이나 지속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맡고, 밤에는 글 짓는 일을 해야 했다.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 환자(현재 상이등급 6급) 처지임에도 내 몸을 돌보지 않았다.

결국 과로가 지나쳐 면역력이 다운되는 바람에 세균 감염에 걸려들었고, 천안 순천향대병원과 서울성모병원에서 44일이나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4시간의 흉부외과 수술과 4시간 30분 동안의 정형외과 수술로 내 몸에는 곳곳에 수술 자국이 남게 됐다.

퇴원 후 곧바로 전국 각지의 성당들을 다니며 내 책들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회갑 기념으로 펴낸 세 권의 책(신앙시집·신앙산문집·신앙소설집)을 들고 전국 각지의 많은 성당들을 순례했다. 물론 내 일생 초유의 일이다. 그 일은 2009년 11월까지 이어졌다.

병상생활을 하고 난 2008년 10월부터 '오체투지 순례기도'에 적극 참여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파괴사업을 막기 위한 피눈물 나는 기도였다. 문규현·전종훈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함께 한 오체투지 순례기도는 한국 최초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 사제들과 불교 스님이 함께 한 세계 최초의 오체투지 기도이기도 하다.

합장을 한 채 서너 걸음 뗀 다음 땅바닥에 엎드려 두 팔을 뻗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가 징소리에 맞춰 일어서는 이 고행 기도는 2008년 9월 4일부터 2009년 6월 6일까지 겨울을 제외한 124일 동안,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임진각 망배단까지 400여 Km(하루 약 4Km씩 전진)의 길에 아로새겨졌다. 나는 피땀을 흘려야 하는 이 오체투지 기도에 먼 길을 달려가서 여러 번 동참했다. 아내와 고등학생·대학생이던 아이들도 함께 하곤 했다.

2009년에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저녁 거행된 '용산미사'에 수없이 참례했다. 그해 6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노친이 암세포 전이와 확장에 의한 골반 골절로 11월부터 입원생활을 하기 전까지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서울 용산을 다녔다.

노친이 암을 이기고 8개월 만에 퇴원하신 2010년의 11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일 년 동안 꼬박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서울 여의도를 갔다. 국회의사당 앞 길거리에서 거행되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4대강 파괴사업 저지를 위한 '생명·평화미사'에 매번 참례했다. 미사 전에 5단씩 바치는 묵주기도 주송을 내가 전담하곤 했다.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하는 동안 네 번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올해 2012년 7월 2일부터는 다시 매주 월요일 오후 서울을 다니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거행되는 '대한문미사'에 참례하는데, 이 고행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문미사'의 표어는 '민주주의 부활을 위하여 용산참사·쌍용차해고노동자·4대강·제주 구럼비, 그리고 오늘을 생각하는 월요미사'이다.

태안에서 사는 내가 먼 길을 달려가 오체투지 순례기도에 참여하고, 수없이 서울 용산을 다니고, 또 3년에 걸쳐 매주 월요일 서울 여의도와 덕수궁을 가는 것은 분명한 '고행'일 터이다. 속된 표현으로 '돈 쓰고 시간 쓰고 고생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 열정의 절절한 표현이기도 하고, '투쟁정신'의 뜨거운 발현이기도 할 터이다. 나는 서울을 가면서 곧잘 "쥐떼와 싸우는 일인데 이 정도 고생은 당연하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어지간히 힘든 고생이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건강치도 못한 몸으로 매주 서울을 가고, 저녁시간 내내 한데 서 있다가 먼 길을 돌아오는 일이 정말 고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차를 가지고 가기도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오후 8시 10분 이후에 태안까지 오는 버스는 없다. 서산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오밤중에 내 차가 있는 서산문화회관까지 혼자 쓸쓸히 15분 가량을 걷노라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호해지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저 내 손에 들린 묵주가 유일한 동무였고, 지팡이였다. 묵주라는 이름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음을 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명박 정권이 다각적으로 우리나라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몰상식함과 치졸함이 강을 이루고, 음험함과 뻔뻔함이 숲을 이룬 지난 5년이었다.

5년 전 너무도 많은 국민들이 나쁜 정권의 탄생에 손을 담갔다. 그것은 이미 관성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관성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이 자신의 나쁜 관성을 깨닫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관성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재연될 조짐마저 보인다. 

그것을 뼈아프게 자각하기에 나는 더욱 열심히 서울을 다니고, 한시도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는다. 이달 17일 '대한문미사'가 끝난 이후에도 여의도를 가고,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를 가고, 공주 금강을 가고, 제주 강정을 가던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현재 정권교체를 위한 '국민연대'에 참여하고 있고, 서산·태안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덧 석양빛을 밟고 사는 시절이다. 내가 저녁놀빛 속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더욱 뜨겁게 살고자 한다. 내 저녁놀을 뜨겁게 사랑하며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소망이 오늘도 나를 힘차게 이끌어간다.

어느새 2012년도 거의 기울어 꼬리 끝만 남았다. 요즘 대선 국면과도 맞물려 더욱 바쁘게 살기에 글을 쓸 여유를 갖지 못하는 가운데서 오늘은 내 삶의 한 자락을 고백해 보았다. 지난 한 해 동안 내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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