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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등록|2012.12.14 18:21 수정|2012.12.14 18:21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선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는 이유가 여러가지다. 그  하나는 각 당과 후보가 내거는 선거 이슈가 대동소이해진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득표를 위하여 대다수 유권자의 필요와 여망을 좇아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점은 선거를 여러번 치를수록 선명해진다.

이미 끝난 미국의 대선이 그랬고, 코 앞에 다가온 한국의 대선이 그러하다. 안철수씨의 사퇴 전 유력 후보 세 사람의 선거 공약이 후보자 이름을 떼버린다면 어느 게 누구 것인지 알 수 없을만큼 비슷했다는 한 매체의 평이 실감난다.

차이가 있다면 개인으로서 박근혜 후보의 역사성, 안 후보의 무당파성, 그 외는 약간 앞서 나간 야권의 대북 정책이 아니었던가 싶다. 박 후보의 역사성이란 그의 당선은 5·16으로 시작된 군사정권의 정당화와 그 정권 아래 승승장구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새로운 방어벽을 의미할 것이라는 의구심이다.

안씨가 떠남으로써 대선은 여권의 박 후보와 단일화 된 야권의 문재인 후보 간 사실상 양자 대결이 되었다. 어느 쪽에 표를 던져야 할 것인가? 투표에 직접 참여하는 유권자와 관전하는 국민 모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 개인의 의견과 희망이라면, 양 진영 간 이슈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어느 쪽에 기회주의적 인재가 더 많이 모여들었는가를 보고 한 표를 던졌으면 한다. 기회주의가 이번 대선의 메인 이슈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은 혼자서 통치를 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는 어떤 사람들이 일등 참모로 그를 둘러 쌓을 것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 등 대통령을 보필할 사람과 대통령이 임명할 다른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대선 캠프에 직접 몸을 담았거나 이런 저런 다른 방법으로 당선에 기여한 공신 풀에서 나오게 되어 있지 않은가. 이들 가운데 원래 기회주의 변신의 귀재들이 많다면 새 정권에 크게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잘 듣지 못한 외람된 제안인 줄 안다. 왜 기회주의가 우리 정치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이 질문에 될수록 짧게 대답해보려는 게 이번 글의 목적이다.

개발을 위해 독재는 필요?

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는 그 사회를 조명해 보는 연장이 필요하다. 대개 학술 개념이 그런 역할을 한다. 한국의 정치행태를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중요한 그런 개념으로 나는 정치적 기회주의를 꼽는다.

기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있겠나. 기회주의란 쉽게 말해서 오늘 한 말과 오늘 내세운 이론과 한 행동을 내일 바꾸는 인간의 행태이다. 사람들은 이 경멸해야 변신을 무단히 하는 게 아니다. 그에 필적하는 목전의 자기이익 때문인 게 보통이다. 하루 벌어 먹고 사는 막노동자나 행상이 그런다면 그 피해는 당사자간, 또는 관련된 몇 사람으로 그치게 되어 있다.

공직자와 지식인의 경우는 이와 크게 다르다. 공직자는 대다수의 삶을 주름잡는 공권력을 갖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 앉은 자가 기회주의적으로 권한을 행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식인은 어떤가? 나는 지식인의 개념을 이렇게 규정한다.

첫째로 그는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체계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둘째로 그 지식을 개인 이익과 타협하지 않는 지조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여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집단이 살아있어 여론을 정직하게 이끈다면 공직사회는 썩지 않을 것이고, 한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길이 밝혀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학의 권위'가 거창하게 언급되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런 사상의 자유가 어려웠다. 독재정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이권에 대한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다. 군사정부 시절 정치학사전에도 없는 통치자금에서 나오던 촌지는 그 한 가지 예다. 돈은  마약과 같아서 사람의 판단과 시각을 흐리게 한다.

그 외 여러 형태가 있다. 매 정권 교체 때마다 평소의 소신을 버리고 해바라기가 된다면  전국구 의원, 장관, 청장, 대사, 국영기업체, 연구소장 등 굵은 자리와 푸짐한 이권이 보은으로 호박 넝쿨 굴러 들어오듯 한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사람 몇이나 있겠나.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라는 썩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미 기회주의 정치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궁정정치를 어지럽힌 간신들과 지금도 논쟁이 계속 되는 일제강점 시기 친일파의 암약이 그것이다.

누가 봐도 안정기조정책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위정자의 뜻을 따라 가난을 나눌 수는 없지 않느냐며 성장정책을 옹호한 학자 출신 관료가 있었다. 이런 경제정책에 대한 기회주의적 발언의 사례는 비교적 괜찮은 편에 든다. "후진국에서 군대의 지지 없이 정치적 안정은 없다", "개발을 위해서는 독재와 부정도 감수해야 한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아직 이르다", "일본도 민주주의를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라가 망해버리면 인권이 무슨 소용이냐"와 같은 강변으로 밀어서는 안 될 정권을 옹호하고 다닌 학자와 저명 지식인들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어제까지 대학의 강단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의하던 학자가 긴급명령이나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발언이나 처신에  대하여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이 그들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겠지만, 그것을 정직한 대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정권에 기생하여 떡고물을 챙긴 사람들이 아닌가.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양쪽 캠프에 영입되어 포진하고 있는 신참, 고참을 자처하는 각각 기백명에 달하는 정치인, 전문인, 학자, 지식인, 저명 예술인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과거 발언이나 행적으로 봐 끼어서는 안 되는 편에 가 있는 인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번 새 정부의 한 자리가 아니면 차기 총선 때 공천이라도 약속을 받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런 기회주의자가 득세 못하게 살펴서 한 표를 던진다면 그게 바로 애국이 될  것이다.

양대 정당 정치는 왜 안 될까

호주와 한국에서 정당들이 치졸하게(?)서로 비난을 하는 것을 보고 정당정치를 사색당쟁으로 치부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정당은 필요하다. 그보다 나은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국사를 맡김으로써 한다. 이때 선거가 서로 생각이 다른 분산된 사람들을 뽑아놓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모여 정권을 인수할 수 없고, 인수한 뒤에도 정치를 해나갈 수 없다.

민주주의 정치를 잘하는 서방 선진국들에서는 대개 정당은 크게 두 개로 정리되어, 선거는 당이 정한 정책을 중심으로 출마하는 당의 후보를 선택하는 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한국은 이것이 잘 안 되고 있다. 양대 정당제도 (two party system)는 고사하고 어느 한 당도 선명한 정강정책과 전통을 가지고 건실하게 오래 커온 것이 없다. 왜 그랬을까? 여러 사정 가운데 아마도 가장 주요한 것은 정치인들의 기회주의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간의 실제를 보면 정당은 그때그때 왕초 정치인이 만드는 사조직과 같은 것이어서 그가 사라지면 당도 사라져버린다.

당이 정치적 신념과 이념이 아니라 각자 이익을 좇는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으로 조성된  파벌(faction) 수준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기존의 정치적 행적과는 관계없이 같은 인물을 놓고 서로 영입 경쟁을 하는 현상, 독립적이어야 할 학자와 근신해야 할 구 정치인들이 불러주기만 하면 노선과는 관계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 들어가는 현상, 자기 당의 전망이 어둡다면 당적을 하루 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당으로 옮겨가는 철새 정치인  현상, 모두 양대정당 제도가 뿌리를 못 내리는 이유다. 역시 우리 국민의 기회주의 행태가 문제다.

이번  대선에 이르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현 대통령을 낸 여당인 한나라당이 그 정부가 인기가 없자 당 이름을 하루 아침에 새누리당으로 바꿔버린 사실을 상기시켜야겠다. 당과 정부의 인기가 떨어졌으면 실책을 시인하고 차기를 기다려야 옳지 이름까지 바꿔 만회하고자 한다면 그건 꼼수다. 양대정당 제도를 수백년간 지켜온 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런 일이 어디 한 번이나 있었나. 우리의 그런 정치인들의 멘털리티로는 양대정당 정치는 아무리 시간이 가도 정착될 수 없다.

정당의 기반 없이 나온 안철수 전 후보를 나무라는 사람들은 왜 그런 후보가 한국에서 나올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선풍적 인기를 한때 얻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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