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과 의의 철학자 남명 조식을 만나다
합천·산청 여행기, 3 [대철학자 남명 조식 선생]
산청 성철스님 문도사찰인 겁외사 입구는 일주문 대신 기둥 18개가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양의 누각이 있다. 누각 정면에는 '지리산 겁외사'라고 쓰인 현판이, 뒷면에는 벽해루(碧海樓)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벽해루라는 이름은 성철스님이 평소 자주 말하시던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라는 의미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라는 문구를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누각 아래를 통과하면 큰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스님의 입상을 비롯하여 거대한 염주, 목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동상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내부에 비로자나부처를 모시고 있다.
또한 수묵화의 대가 중에 한 분인 김호석 화백이 배채법으로 그려낸 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외벽 벽화에는 스님의 출가, 수행, 설법, 다비식 등을 묘사하고 있어 특별한 볼거리다.
스님의 동상 뒤편으로 2000년 복원한 생가가 있다. 이곳은 스님이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 스물다섯 해를 살았던 곳으로, 아쉽게도 모든 건물은 새로 지어진 것이다. 대문인 혜근문(惠根門)을 통과하면 정면에 선친의 호를 따서 율은고거(栗隱古居)라고 이름붙인 안채가 보인다.
오른쪽은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齊), 왼쪽에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 있다. 안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거처하실 때의 방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기념관에는 누더기가사, 장삼, 고무신, 지팡이, 친필자료, 안경, 필기구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볼 만하다.
나와 일행은 잠시 묵상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측 위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약간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평지에 지어진 절로는 상당히 볼품이 있어 좋았다. 이어 우리가 이동한 곳은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 대철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이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山天齋)'와 이웃한 '남명기념관'이다.
먼저 본 산천재는 선생이 61세 되던 해에 이곳으로 들어와 강학(講學)에 힘쓰던 곳이다. 산천재라는 이름은 주역에 나오는 대축괘(大畜卦)에서 따온 말이다.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는 그 형상을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평생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을 강조했다.
여기에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했다. 선생이 말한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하여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결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선생은 벼슬자리를 거부하고 언제나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탐관오리의 등살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었다.
선생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켰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이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난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학당이었던 산천재는 상당히 터가 좋아 서북쪽으로는 지리산의 영봉인 천왕봉이 우뚝 솟아 있다. 아울러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 삼장으로 흐르다가 양당에서 합수가 되어 덕천을 이루면서 아담한 들판을 여는 산천재 앞을 지난다.
여기에 매화나무와 백일홍이 여러 그루 서 있다. 좋은 스승을 모시고 터가 좋은 곳에서 공부하면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길 건너에 자리 잡고 있는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으로 갔다. 지난 2004년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완공한 기념관이다. 내부는 3개의 전시관이 있으며 영상실, 교육관, 세미나실, 유물 수장고가 있다.
1전시실에는 선생의 서적인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등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진열되어있다. 2전시실은 선생의 제자들과 관련된 유물과 미니어처,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3전시실은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공간으로 사숙(私淑) 및 문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외부 공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신도비, 선생의 석상, 선생과 부인의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가묘인 여재실 등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퇴계 선생과 함께 영남사림의 중심인 남명 선생의 깊은 철학적 성찰과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고, 경(敬)과 의(義)의 정신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두 곳을 살펴본 우리들은 인근에 있는 '보현식육식당'으로 이동하여 한우갈비로 식사를 했다. 지리산 아래라서 그런지 쇠고기 속에 지리산의 향과 정취가 숨어 있는 듯 매우 맛이 좋았다. 시골식당 치고는 너무 정갈하고 상추 하나하나도 정성을 다하여 내어온 주인장의 노력에 감격을 했다.
난 조식 선생에 대하여 너무나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 산청군청의 임길선 계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는 식사를 같이 했다. 오랜 만에 산청에 와서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뻤다. 임 계장은 우리들에게 산청군 달력과 약초향주머니 등을 선물로 주었다.
▲ 산청군겁외사 성철스님상 ⓒ 김수종
벽해루라는 이름은 성철스님이 평소 자주 말하시던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라는 의미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라는 문구를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누각 아래를 통과하면 큰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스님의 입상을 비롯하여 거대한 염주, 목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동상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내부에 비로자나부처를 모시고 있다.
▲ 산청군겁외사 대웅전 ⓒ 김수종
또한 수묵화의 대가 중에 한 분인 김호석 화백이 배채법으로 그려낸 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외벽 벽화에는 스님의 출가, 수행, 설법, 다비식 등을 묘사하고 있어 특별한 볼거리다.
스님의 동상 뒤편으로 2000년 복원한 생가가 있다. 이곳은 스님이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 스물다섯 해를 살았던 곳으로, 아쉽게도 모든 건물은 새로 지어진 것이다. 대문인 혜근문(惠根門)을 통과하면 정면에 선친의 호를 따서 율은고거(栗隱古居)라고 이름붙인 안채가 보인다.
▲ 산청군겁외사 안쪽에 있는 성철스님 생가 ⓒ 김수종
오른쪽은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齊), 왼쪽에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 있다. 안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거처하실 때의 방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기념관에는 누더기가사, 장삼, 고무신, 지팡이, 친필자료, 안경, 필기구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볼 만하다.
나와 일행은 잠시 묵상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측 위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약간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평지에 지어진 절로는 상당히 볼품이 있어 좋았다. 이어 우리가 이동한 곳은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 대철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이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山天齋)'와 이웃한 '남명기념관'이다.
▲ 산청군산천재, 남명 선생이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 ⓒ 김수종
먼저 본 산천재는 선생이 61세 되던 해에 이곳으로 들어와 강학(講學)에 힘쓰던 곳이다. 산천재라는 이름은 주역에 나오는 대축괘(大畜卦)에서 따온 말이다.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는 그 형상을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평생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을 강조했다.
여기에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했다. 선생이 말한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하여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결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선생은 벼슬자리를 거부하고 언제나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탐관오리의 등살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었다.
선생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켰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이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난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 산청군산천재에서 바라 본 눈내린 지리산 천왕봉 ⓒ 김수종
학당이었던 산천재는 상당히 터가 좋아 서북쪽으로는 지리산의 영봉인 천왕봉이 우뚝 솟아 있다. 아울러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 삼장으로 흐르다가 양당에서 합수가 되어 덕천을 이루면서 아담한 들판을 여는 산천재 앞을 지난다.
여기에 매화나무와 백일홍이 여러 그루 서 있다. 좋은 스승을 모시고 터가 좋은 곳에서 공부하면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 산청군남명 조식 선생상 ⓒ 김수종
이어 길 건너에 자리 잡고 있는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으로 갔다. 지난 2004년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완공한 기념관이다. 내부는 3개의 전시관이 있으며 영상실, 교육관, 세미나실, 유물 수장고가 있다.
1전시실에는 선생의 서적인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등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진열되어있다. 2전시실은 선생의 제자들과 관련된 유물과 미니어처,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3전시실은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공간으로 사숙(私淑) 및 문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산청군경과 의, 남명의 사상 ⓒ 김수종
또한 외부 공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신도비, 선생의 석상, 선생과 부인의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가묘인 여재실 등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퇴계 선생과 함께 영남사림의 중심인 남명 선생의 깊은 철학적 성찰과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고, 경(敬)과 의(義)의 정신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 산청군지리산 아래 산청에는 쇠고기가 유명 ⓒ 김수종
두 곳을 살펴본 우리들은 인근에 있는 '보현식육식당'으로 이동하여 한우갈비로 식사를 했다. 지리산 아래라서 그런지 쇠고기 속에 지리산의 향과 정취가 숨어 있는 듯 매우 맛이 좋았다. 시골식당 치고는 너무 정갈하고 상추 하나하나도 정성을 다하여 내어온 주인장의 노력에 감격을 했다.
▲ 산청군산청군 문화관광을 담당하는 임길선 계장, 오랜 만에 뵈었다. 기념촬영 ⓒ 김수종
난 조식 선생에 대하여 너무나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 산청군청의 임길선 계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는 식사를 같이 했다. 오랜 만에 산청에 와서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뻤다. 임 계장은 우리들에게 산청군 달력과 약초향주머니 등을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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