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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남영동1985>와 박근혜 당선

등록|2012.12.21 16:35 수정|2012.12.21 16:35
나와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를 비롯해 주변에 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설마 한국이 어떻게 되겠냐"며 자위하고 위로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 못하고 있을 뿐이지,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한국의 분단상황을 고착시키고, 식민시절 침략국에 충성을 강요하던 지도자가 후대 역사에 의해 정당화되고, 그의 잘못이 경제발전이라는 허울에 가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현상은 정권에 의해서 철학과 사상이 왜곡되어 운용되는 정치적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일 뿐, 민주적 가치와 국민의 권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되는 21세기 선진국가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박근혜 후보의 당선 이후 유럽의 대부분의 매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고, 거기에는 덧붙여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러시아 같은 세습정권과 정경유착, 제왕적 정권의 대표적인 나라들이 거론된다. 빨갱이가 싫어서 박정희 시대로 돌아가길 원했던 기성세대들은 오히려 '그런 빨갱들이 지배하는 나라'의 정치제도를 자진해서 선택한 셈이다.

한국에서 화제가 된 <남영동 1985년>이라는 영화를 봤다. 박근혜 당선자 아버지 시대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은 사회에서 살아야했던 많은 이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공교롭게 1991년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신문(訊問)>이라는 폴란드 영화와 유사하다.

▲ 영화 '신문'의 영어권 국가용 포스터. ⓒ filmweb.pl


이 영화는 공산주의 시절 폴란드에 사는 한 여성이 억울한 이유로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채 온갖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고문과 신문을 당하며 정권이 요구하는 죄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남영동1985>와 상당히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보다 고문의 기술이 덜 발달해 영화 <신문>에는 물고문 정도만 등장하며, <남영동 1985>의 주인공은 고문에 못이겨 끝내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리지만 폴란드의 여주인공은 끝까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이다.

1982년 제작되어었으나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폴란드에서보다 다른 나라에서 먼저 개봉을 해야했던 이 영화에 출연한 크리스티나 얀다는 칸느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게다가 할리우드에서 여성감독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그네스카 홀란드가 정치범의 누명을 쓴 죄수로 출연해, 그의 색다른 모습 역시 감상할 수 있다.

폴란드 영화 <신문>의 주인공 토냐가 목숨 걸고 거부했던 '빨갱이 폴란드' 시절의 시스템은 이제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빨갱이들의 권력을 거부하며 싸운 결과 그런 말도 안되는 인권유린과 학정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위에 이야기한 아제르바이잔과 벨라루스는 유럽에서 얼마 안되는, 세습과 통제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다. 아마 폴란드에서 한국과 비슷한 선거결과가 나왔다면 "쟤네들 어떻게 된거 아니야?"하는 평가를 내려졌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바로 그렇다.

한국에서 빨갱이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아마 한국전쟁 이후 '그 무시무시한 진짜 빨갱이'들이 들끓었을 때, 죽창과 횃불을 들고 지주들의 집에 쳐들어가 불을 지르고 창고를 약탈했던 그들을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설령 '빨갱이'들이 합법적으로 정권을 차지한다해도 일어나지 않는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미 사회주의는 엄연한 정치제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엄연히 '사회주의'라는 단어을 내세워 그 가치를 표명하는 정당들도 정부를 구성하고 대통령을 배출한다. 영화 <신문>의 시간적 배경이 되던 시절 활동하던 사회주의 정당 역시 폴란드에서는 국민들의 적잖은 지지를 받고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것은 공산주의를 경험한 동유럽 대부분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박애, 그리고 유일신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어느 나라에 전래된 후 근본주의, 정종유착, 지역적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같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어느 곳에서는 종교라는 허울로 인권이 심하게 유린되는 반면 다른 어느 곳에서는 그것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기도 한다.  사상이나 철학은 그 지역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 그 형태가 변화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행태나 운용형태 자체만 가지고 확연히 나쁘다 좋다 지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정치적 이념을 채택한 사람들의 몫이다.

얼마전 한 방송에서 '음악의 가치란 악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쇼팽이나 베토벤의 곡을 아무리 연습해도 그냥 악보에 적힌대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두들겨서는 예술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 역시 그렇다. 그 정보 속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직시하고 현실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그냥 사회는 악보에 적혀 있는대로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골이나 녹음기 같은 것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 주변에서 박근혜를 지지하고 그의 당선을 축하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골라서 접하는 이들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제는 명백하게 옳지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흐르는 것을 알면서도 왜곡된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데 있다.

박근혜의 당선을 부정적으로 보며 그동안 여러 가지 장황한 이론과 개념을 들어 설명하며 박근혜의 실패를 예감했던 지식인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고 비판한다면 그들은 그냥 입력한 정보로만 오르골을 연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다.

앞으로 5년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덧붙이는 글 리투아니아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남영동 1985를 감상하고 난후 박근혜의 당선과 관련해 영화 <신문>이 생각나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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