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메시아이다

[영화를 읽다] 노동자 자살과 <벌레이야기> 그리고 <밀양>

등록|2013.01.11 09:57 수정|2013.01.11 09:59

▲ 지난 12월 21일 부산 영도구민장례식장에 마련된 최강서씨의 빈소. 유족이 최씨의 영정 앞에 앉아있다. 최씨는 부인과 사이에 7살, 5살 난 아들을 남겼다. ⓒ 정민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노동계에 자살이 잇달았다.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 최강서(34)씨가 지난 12월 21일에 지회 회의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어 22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전 노조간부 이운남(42)씨가 자신의 아파트 19층에서 투신하였고, 같은 날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활동가 최경남(40)씨가 자택에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5일엔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노조 사무실에서 이호일(47)씨가 자살했다.

한진중공업 최강서씨는 5살·7살 어린 자식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랜 해고 끝에 지난 11월 회사에 복직되었지만 출근 이틀만에 무기한 휴업 발령을 받았다. 사측은 자살 이틀 전인 19일 지회가 운영하는 소비조합을 강제 폐쇄했고 지회사무실도 공장 밖으로 26일까지 이전하지 않으면 강제 폐쇄하겠다고 공문을 보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조를 손해배상소송으로 압박하는 사측에 대해 최강서씨는 유서에서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자본"이라고 비판하고 동료들에게 "민주노조 사수"를 부탁하였지만, 현실은 정리해고 투쟁 과정에서 이미 많은 조합원들이 복수노조로 빠져나가 20여 명만이 200일 동안 힘겹게 천막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라고 암담한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드러냈다.

대자본의 횡포 앞에 절규하며 자신의 목숨을 끊은 최강서씨를 추모하는 희망버스 집회가 새해 1월 5일 한진중공업 앞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버스 37대를 나눠타고 참가한 2000여 명은 노동자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간 사측을 규탄했다. 최강서씨의 아내 이선화씨는 "아직도 냉동고에 있는 남편이 너무 불쌍하다"며 "민주노총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이 남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뒤늦게 이렇게 아픈 마음을 잡고 부탁드린다, 제발 돌아와 남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달라, 하루빨리 남편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최강서씨의 죽음은 이익 증식을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인권 짓밟아도 누구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나라의 천박한 자본 세력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존엄성의 표현이었다. 죽음으로 외친 그의 목소리는 지금 전국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죽음의 길을 갔겠는가?' 라는 생각이 마음을 저민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850만 명이고 정리해고가 매일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불의한 시대에 우리들이 절망할 때 택할 수 있는 길이 죽음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길이 있는가.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는 노동자 이야기가 아니지만 절망적 상황에서 자살로 자신의 존엄성을 외치는 한 여자를 보여주는 반면에, 이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이창동의 <밀양>은 주인공이 지금까지 무시해 온 가까운 곳에 그녀의 삶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있음을 알려준다.

소설 <벌레이야기>는 화자인 남편이 자살한 아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를 이야기한다. 등장인물로는 화자·그의 아내·외아들 알암·알암이를 유괴 살해한 주산학원 원장 김도섭 그리고 김 집사가 나온다.

▲ 이청준의 <벌레이야기> ⓒ 열림원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리 한쪽이 불편하고 성미가 유순한 초등학교 4학년인 외아들 알암이가 어느 날 실종되자 아이 엄마는 그를 찾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아이를 찾지 못하자 그녀는 절간에 가서 촛불 공양을 하기도 하고, 아무 교회당에 가 헌금도 아끼지 않는다.

실종된 지 2달 20일이 지난 뒤 아이는 집근처 건물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아이가 다녔던 주산학원의 원장 김도섭이다. 여자는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로 지내다가 이웃집 김 집사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알암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예배와 기도와 헌금을 드린다. 그녀는 신앙심이 자라 주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고 감사의 말을 하게 된다.

김 집사는 이제는 죄인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사람에겐 애초 남을 심판할 권리도 없지만 ... 차제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마음 속의 모든 원망과 분노와 미움과 저주의 뿌리를 뽑아내고 주님을 영광되게 영접하라 하였다"고 말한다. 여자는 범인을 용서했다고 생각하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범인을 면회한 후 두문불출하며 방안에만 틀어박혀 벌레처럼 웅크린 채 절망감 속에 빠져 든다. 면회를 같이 갔던 김 집사에 의하면 범인은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김 집사는 "그의 영혼이 이미 주님의 용서를 받은 이상, 그는 '아이 엄마'와도 똑같은 여호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아들딸이 된 것"이라 말하고 "이미 주님의 사함을 받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아이 엄마'를 나무랐다."

그러나 여자는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예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 없어요"라고 외쳤다. 이에 김 집사가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종이 된 우리 인간들의 의무이니까요"라 말하자, 여자는 "(주님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하시고...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라고 절규한다.

범인의 교수형 소식이 라디오로 전해지자 여자는 김 집사에게는 물론 남편에게도 유서 한 마디 없이 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다. 이에 대해 작가 이청준은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 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같은 절망적 자각은 미물같은 인간이 절대자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로서 그의 삶 자체를 끝장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절대자'의 섭리의 세계를 함께 부수고 싶은 한계적 욕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절대자의 섭리란 이름으로 한 인간의 고유하고 기본적인 존엄성이 무시될 때 그 절대자는 폭군이며, 그 절대자 앞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자기존엄의 길은 절대자가 위협할 수 있는 최후 수단인 주체의 생명을 주체가 스스로 끊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 속에서 탈출하는 길은 자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절대자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절대자인 것도 아니다. 자살로  절대자에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자의 섭리를 수용하는 것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음을 영화 <밀양>은 보여준다.

<밀양>은 소설 <벌레이야기>를 각색한 것인데, 각색이 의미하는 것처럼 <밀양>에는 <벌레이야기>의 내용과 같은 것도 있고 변화된 것도 있다. 영화와 소설의 줄거리는 대체로 같은데, 그것은 유괴범에 아들을 잃고 고통 속에 있던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면서 슬픔을 벗어나고, 이윽고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가지만, 그녀는 범인이 이미 주님을 만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목격하고 심한 충격에 빠진다는 것이다.

▲ 영화 <밀양> ⓒ 시네마서비스


하지만 영화는 소설과 등장인물과 스토리 결말의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등장인물을 보면, <벌레이야기>에는 남편·그의 아내·알암이·유괴범·김 집사 다섯뿐이지만, <밀양>에서는 인물의 환경이 바뀌고 등장인물의 수가 많이 늘어나 다채로워진다. 영화에는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피아노 학원을 하며 사는 동안 아들 준이 웅변학원 원장에게 유괴 살해된다. 웅변학원 원장에게는 딸이 있고, 교회 사람들로는 김 집사, 그녀의 남편 장로, 목사, 다른 많은 신도들이 나오고, 밀양의 주민으로서는 로망스 옷가게 주인과 언제나 신애 가까이에서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는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 분) 등이 등장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소설과 결말부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소설에서 유괴당한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존엄성을 짓밟는 유괴범과 김집사와 주님의 섭리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영화에서 신애는 소설에서처럼 아들을 죽인 원장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방문하는데 범인이 주님께 자기 죄를 깊이 참회하고 주님에게서 용서를 받아 나날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안하게 지낸다고 하자 분노한다.

신애는 소설과는 다르게 간간이 하늘을 쳐다보며 금지된 일련의 행동을 한다. 즉, 김 집사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하여 성관계를 가지려하고, 음반 가게에서 디스크를 훔치고, 교회의 야외 부흥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동안 몰래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를 틀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가사가 나오게 하고 도망친다.

이렇게 저항하며 방황하는 동안 어느날 밤 신애는 손목을 칼로 찌른다.  그녀는 한동안 병원에 입원한 후 종찬의 도움을 받으며 퇴원한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다 미용사가 범인의 딸임을 알고 못견뎌 뛰쳐나간다. 집에 온 그녀는 마당에서 종찬이 들어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머리를 자른다. 신애, 종찬을 한 프레임에  보여주던 카메라는 종찬의 거울에 반사된 빛을 따라 가다 마당 구석을 비추는 햇살을 클로즈업한다.

소설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영화의 신애는 절대자의 섭리에 포획되지 않는다. 소설의 어머니가 저항하긴 했지만 절대자의 섭리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다르게, 신애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교회에 가거나 김 집사의 영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쪽빛이긴 하지만 따듯한 햇살이 비추는 자기 집의 마당에서 종찬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신을 추스린다.  

▲ 영화 <밀양> ⓒ 시네마서비스


소설에 없는 인물인 종찬은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센터를 운영하는 그는 동네 남자들과 다방레지의 속옷이나 가슴에 관심을 보이고, 돈 많고 권력있는 지역 유지들과 교분 있는 것을 과시하는, 신애 말에 의하면 '속물'이다. 종찬은 신애가 밀양에 처음 올 때 도시 입구에서 고장 난 그녀의 차를 끌어다 준 이후로 그녀의 주변을 항상 맴돌며 변함없이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신애에게 종찬은 귀찮은 속물일뿐이다. 스토리의 시작부터 거의 끝까지 신애에게 무시당하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는 종찬은 영화 마지막에서 그녀의 집 마당 구석에 있는 따듯한 햇살처럼 그녀의 삶의 '비밀스런 햇볕'임이 암시된다.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원하는 메시아는 교회도 주님도 절대자의 섭리도 아닌, 늘 그녀에게 가까이 있지만 그녀가 무시한, 지금까지 그녀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속물 종찬의 관심과 사랑인 것이다.

소설의 알암이 어머니와는 다르게 영화의 신애가 삶의 희망을 찾은 것은 절대자의 섭리 이야기에 포획되지 않고 구질구질해 보이는 일상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을 해고 불안에 시달리게 하고, 청년실업이 넘쳐나고, 850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일 매일 부당대우 받게 하고, 600만 자영업자들이 언제 사업에 실패할지 모르게 만드는, 하우스푸어들이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가계빚에 신음하게 만드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체제는 절대자의 섭리처럼 우리를 목 조르고 있다.

자본주의체제의 절대자인 거대 자본이 정당한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 섭리를 내세워 우리를 짓밟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알암이의 어머니처럼 죽음으로 저항해야 하는가? 그것도 존엄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자본주의체제는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다양한 얼굴로 절대자처럼 군림해왔다. 중간에 공산주의혁명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프랑스·독일·스웨덴 등이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수정자본주의를 하게 된 것은 1960년대 말에서야 가능해졌다.

그것은 프랑스대혁명·파리꼬뮨·68혁명·식민지 지배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댓가로 했던가.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도 노동자들의 자살 같은 수많은 피를 흘려야하는가? 이것이 필연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사회제도나 체제는 당연히 없애고 바꿔야 한다. 그러한 변혁을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는 나서서 투쟁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신애가 절대자의 섭리 이야기에 포획되지 않듯이 우리는 체제와 제도의 모순과 죄악에 우리 존재 전체를 포획당해서는 안 된다.

신애의 집 마당 구석에 조각난 빛이 있듯이, 속물 종찬에게 따듯함이 있듯이, 우리는 투쟁을 하면서도 구질구질해 보이는 일상에서 삶의 온기를 찾아야 한다. 힘든 시기일수록 이웃에 대한 우리의 조그만 관심과 사랑이 구원의 햇살이 된다. 구원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는데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피폐한 이 땅에서 서로 보듬는 손길과 마음에 있다. 먼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오늘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오늘도 노고와 투쟁을 멈추지 않지만, 바로 지금 이곳에서 서로 관심주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메시아는 우리 민중 간의 사랑에 있다. 희망버스에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려운 이웃에게 먼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정경훈 시민기자는 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영화를 읽다>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