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속인 건 김지하인가, 우리들 자신인가?
김지하의 이름 앞에 붙여놓았던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떼자
시인 김지하의 연이은 돌출 발언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웠다. 혹자는 '막말'이라 평했고, 혹자는 '변절'이라 평했다. 한때 김지하를 '저항시인'으로 추앙했던 이들로서는 그의 행보에 내심 당혹스럽기도 했으리라. 박정희 정권 당시 모진 탄압을 받았던 김지하가 대선을 얼마 앞두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것도 모자라 선거가 끝나자마자 야권의 후보들을 일제히 비판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민주진영과 김지하 사이의 불화가 비단 최근의 사태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91년 분신정국 당시에는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해 변절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또, 2009년 소설가 황석영이 이명박 대통령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하고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 정부'로 평가해 누리꾼들로부터 맹공격을 당하자 "작가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며 황석영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지하와 야권의 불화는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김지하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1970년대 그의 삶에 준거하고 있음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김지하라는 이름 앞에 '민중시인' 또는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는 것은 김지하가 아니라 명백히 우리들이다. 자, 이렇게 묻자. 우리를 속인 건 김지하인가, 우리들 자신인가?
김지하 자신이 말하는 '박정희 시해 당시'
김지하를 말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일는지 모른다. 김지하라는 이름 앞에 여전히 붙어있는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이 그 필요성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김지하를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석방되었다가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구속되는 등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김지하의 이력에 비춰보면 박정희에게 맺힌 그의 원한이 대단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 당시 김지하의 반응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2003년 출간한 회고록 <흰 그늘의 길>에서 그는 당시의 생각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때였다. 내 속에서,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꼭 허공 중에 애드벌룬 떠오르듯이 그렇게 세 마디 말이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인생무상." 첫 번째 마디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두 번째 마디였다.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세 번째 마디였다. ― 독재자의 죽음, <흰 그늘의 길> 2, 학고재, 2003, 437쪽.
'독재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부분적으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표상하는 것이지만, 그의 시해 소식을 접한 김지하의 반응은 실로 놀랍다. 물론 이것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서술한 회고록이기 때문에 그의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지하는 박정희를 용서한 것일까? 그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내가 '용서'를 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고 나고 간에 언젠가는 모두 다 떠나야 할 그 '무상함'을 깨달은 것뿐이었다"(438쪽)라고.
저항시는 김지하의 출세작, 그러나 대표작은 아냐
필자가 김지하의 행보를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비판받을 점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판의 이유만큼은 정당해야 한다. 김지하에 대한 오늘의 비판은 어떤 준거에 기초한 것인지 필자는 묻고 싶다. 그는 정말 '변절한' 민중시인인가, '변절한' 저항시인인가? 이에 대해 김지하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일본에서 이십여 년 전 '김지하가 전향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는데, 그 말 자체가 우스운 것이고 그 뒤 나를 향한 극좌들의 비난 역시 오해의 산물에 불과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나를 지독한 빨갱이로 우상화시킨 결과인 것이다." ― 박정희의 코, <흰 그늘의 길> 2, 학고재, 2003, 341쪽.
위 글에서 말하는 '이십여 년 전'은 1980년대 초반을 일컫는다. 그 무렵 김지하는 각 종교의 생명존중 사상을 수용하여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었다. 1970년대 김지하를 바라보던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보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바로 이때 그의 사상이 1991년 분신정국 당시 '변절 논란'을 일으켰던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김지하의 사상들은 의외로 뿌리가 깊다. 그는 등단작 <황톳길>을 쓴 시기부터 환청(幻聽)·환시(幻視)의 체험을 기록하며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전환질서를 모색해왔다. 이러한 시적 질서는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김지하는 이러한 질서를 참여시가 아닌 서정시 계열의 시를 통해 드러냈다.
물론 김지하가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또, 그가 <오적>이나 <타는 목마름으로>로 대표되는 참여시를 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흘에 걸쳐 썼다고 하는 <오적>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세상에 빛나게 만들어준 '출세작'이지만, 결코 그의 '대표작'은 아니다. 이는 40여 년에 이르는 그의 시력에 비춰 양적으로 봐도 그렇고 질적으로 봐도 그렇다.
김지하의 이름 앞에서 '저항시인' 호칭을 떼어내야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시기에 많은 문화인들이 탄압을 당했다. 그 탄압들은 대개 독재의 정치적 논리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민중들의 열망에서 빚어진 탄압도 없지 않았다. 일례로 <아침이슬>의 경우, 작사자인 김민기는 작사 단계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곡은 이내 민주화운동의 상징곡이 되었고, 1975년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김지하를 바라보는 좌파의 시각이 이러한 예와 비슷하지 않을까. 김지하가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것도, 참여시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더 이상 '저항시인'의 아이콘이 아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이래로, 혹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91년 이래로 줄곧 그래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70년대 민주화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있던 이들이, <오적>의 풍자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김지하를 저항시인으로 추앙했을 따름이다.
자, 이제 김지하의 이름 앞에 붙여놓았던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떼자. 그것을 떼어내야만 김지하와 대중의 불화는 끝날 수 있다.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떼는 것은 박탈이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붙여놓았던 호칭을 조금 늦게 떼는 것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민주진영과 김지하 사이의 불화가 비단 최근의 사태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91년 분신정국 당시에는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해 변절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또, 2009년 소설가 황석영이 이명박 대통령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하고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 정부'로 평가해 누리꾼들로부터 맹공격을 당하자 "작가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며 황석영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지하와 야권의 불화는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김지하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1970년대 그의 삶에 준거하고 있음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김지하라는 이름 앞에 '민중시인' 또는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는 것은 김지하가 아니라 명백히 우리들이다. 자, 이렇게 묻자. 우리를 속인 건 김지하인가, 우리들 자신인가?
김지하 자신이 말하는 '박정희 시해 당시'
▲ 2012년 12월 13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오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지하를 말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일는지 모른다. 김지하라는 이름 앞에 여전히 붙어있는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이 그 필요성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김지하를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석방되었다가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구속되는 등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김지하의 이력에 비춰보면 박정희에게 맺힌 그의 원한이 대단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 당시 김지하의 반응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2003년 출간한 회고록 <흰 그늘의 길>에서 그는 당시의 생각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때였다. 내 속에서,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꼭 허공 중에 애드벌룬 떠오르듯이 그렇게 세 마디 말이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인생무상." 첫 번째 마디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두 번째 마디였다.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세 번째 마디였다. ― 독재자의 죽음, <흰 그늘의 길> 2, 학고재, 2003, 437쪽.
'독재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부분적으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표상하는 것이지만, 그의 시해 소식을 접한 김지하의 반응은 실로 놀랍다. 물론 이것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서술한 회고록이기 때문에 그의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지하는 박정희를 용서한 것일까? 그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내가 '용서'를 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고 나고 간에 언젠가는 모두 다 떠나야 할 그 '무상함'을 깨달은 것뿐이었다"(438쪽)라고.
저항시는 김지하의 출세작, 그러나 대표작은 아냐
필자가 김지하의 행보를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비판받을 점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판의 이유만큼은 정당해야 한다. 김지하에 대한 오늘의 비판은 어떤 준거에 기초한 것인지 필자는 묻고 싶다. 그는 정말 '변절한' 민중시인인가, '변절한' 저항시인인가? 이에 대해 김지하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일본에서 이십여 년 전 '김지하가 전향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는데, 그 말 자체가 우스운 것이고 그 뒤 나를 향한 극좌들의 비난 역시 오해의 산물에 불과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나를 지독한 빨갱이로 우상화시킨 결과인 것이다." ― 박정희의 코, <흰 그늘의 길> 2, 학고재, 2003, 341쪽.
위 글에서 말하는 '이십여 년 전'은 1980년대 초반을 일컫는다. 그 무렵 김지하는 각 종교의 생명존중 사상을 수용하여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었다. 1970년대 김지하를 바라보던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보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바로 이때 그의 사상이 1991년 분신정국 당시 '변절 논란'을 일으켰던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김지하의 사상들은 의외로 뿌리가 깊다. 그는 등단작 <황톳길>을 쓴 시기부터 환청(幻聽)·환시(幻視)의 체험을 기록하며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전환질서를 모색해왔다. 이러한 시적 질서는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김지하는 이러한 질서를 참여시가 아닌 서정시 계열의 시를 통해 드러냈다.
물론 김지하가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또, 그가 <오적>이나 <타는 목마름으로>로 대표되는 참여시를 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흘에 걸쳐 썼다고 하는 <오적>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세상에 빛나게 만들어준 '출세작'이지만, 결코 그의 '대표작'은 아니다. 이는 40여 년에 이르는 그의 시력에 비춰 양적으로 봐도 그렇고 질적으로 봐도 그렇다.
김지하의 이름 앞에서 '저항시인' 호칭을 떼어내야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시기에 많은 문화인들이 탄압을 당했다. 그 탄압들은 대개 독재의 정치적 논리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민중들의 열망에서 빚어진 탄압도 없지 않았다. 일례로 <아침이슬>의 경우, 작사자인 김민기는 작사 단계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곡은 이내 민주화운동의 상징곡이 되었고, 1975년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김지하를 바라보는 좌파의 시각이 이러한 예와 비슷하지 않을까. 김지하가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것도, 참여시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더 이상 '저항시인'의 아이콘이 아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이래로, 혹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91년 이래로 줄곧 그래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70년대 민주화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있던 이들이, <오적>의 풍자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김지하를 저항시인으로 추앙했을 따름이다.
자, 이제 김지하의 이름 앞에 붙여놓았던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떼자. 그것을 떼어내야만 김지하와 대중의 불화는 끝날 수 있다. 저항시인이라는 호칭을 떼는 것은 박탈이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붙여놓았던 호칭을 조금 늦게 떼는 것일 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