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차라리 김영삼에게 한 수 배워라
인수위 앞서 떠오른 20여년 전 <경향>의 기억... 인수위 과제는 언론 정상화
▲ 지난 14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언론단체 합동기자회견 현장. ⓒ 강기석
지난 14일 오전 삼청동 인수위에 갔다. 이명박 정권에서 해직당한 언론인들의 복직을 촉구하기 위한 언론단체 합동기자회견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이날 기자회견은 단순히 해직 언론인들의 복귀를 촉구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이명박 정권 아래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언론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4년 전, 나는 현역에서 물러난 뒤 시위가 됐든 기자회견이 됐든 이런 종류의 모임에 숱하게 참여해 왔다. 그때마다 비분강개하는 심정이 앞섰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뭔가 처연하다고나 할까, 그보다 죄스러운 마음이 더 강했다. 대선에서 우리가, 아니 나부터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도 이렇게 인수위 앞에서 목청을 돋우고 있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지금쯤 우리 스스로 언론 정상화를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신나게 짜고 있을 터였다. '멘붕'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해직 후배들에게 미안한 노릇이었다. 죄스러운 일이다.
인수위 앞에 모인 선후배 동료들의 면면이 우선 그랬다. 정동익 선배.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다시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못한 채 이제 칠순이다. 민언련 박우정 이사장. <한겨레>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도 1980년 경향신문에서 해직당한 뒤 8년여를 고생한 바 있다.
언론의 숙명인가... 대를 이은 해직
▲ 이강택 전국언론노조 위원장과 정영하 MBC 노조위원장, 김종욱 YTN 노조위원장 등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내 마련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당선인에게 해직언론인의 복직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이들은 "지난 5년간 언론의 공공성을 지키며 온갖 핍박을 감내해온 해직언론인들의 복직이야말로 박 당선인의 국민 대통합 출발점이자 정권의 성패를 결정짓는 길이다"고 주장했다. ⓒ 유성호
신태섭 교수. KBS 이사를 지내다가 이명박 정권 들어 KBS 이사직은 물론 교단에서도 쫓겨났다. 박래부 새언론포럼 회장. 언론재단 이사장을 지내다가 역시 이명박 정권 들어 10개월 만에 쫓겨났다. 이들에겐 해직이란 남의 일이 아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다.
그런 점에서는 나도 마찬가지다. 1989년 12월 <경향신문>은 노동조합 1기 집행부 5명을, 임기가 끝난 지 1년이나 지난 뒤에 강제 해직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전날 오후 11시께 동료들에 의해, 말 그대로 '번쩍 들려' 나왔다. 당시 경향은 한화로의 인수가 임박한 시점이었다. 재벌이 신문사를 인수하는데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는 강경한 세력을 그대로 놔두면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우리를 몰아낸 것이다. 진눈깨비 쏟아지는 밤거리에서 철문을 굳게 닫은 회사를 향해 울부짖던 그때의 모습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해고를 단행한 장본인들이야 당시 경영진이었지만, 배후 조종자가 누구였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자명했다. 재벌이 노조를 껄끄럽게 여기는 것이야 당연한 것. 하지만 우리의 해직은 <경향신문>이란 하나의 신문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노조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가던 언론 민주화운동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무언가 경고음을 내야만 했다. 그 시범 사례로 선택된 것이 인수 합병을 앞둔 취약한 <경향신문>이었던 것이다.
쫓겨난 우리 해직 5인은 그 추운 겨울날 언론노조 시멘트 바닥에 침구를 깔고 자고 먹으며 100일 동안 매일 출근투쟁을 했다. 신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다 보면 수염에 얼음꽃이 피곤 했다. 그런다고 경영진이 각성해서 해고 결정을 번복하리라고 믿었던 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쫓겨나가는 과정에서 눈을 질끈 감았던 동료들에게 '참언론'의 꿈을 잃지 말라고 촉구하면서 우리의 복귀 의지를 다지고 싶었을 뿐이다.
시범 사례로 쫓겨난 <경향신문> 노조 5인
그 뒤 우리는 해직문제를 법의 판단에 맡긴 채 나를 비롯한 3명은 평화방송으로, 박인규(현 <프레시안> 대표)는 기자협회 편집국장으로 새로운 일터를 찾아 갔다. 초대 노조위원장을 지냈던 고 이성수만이 취업하지 않고 대의의 깃발을 계속 들고 법정 투쟁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경향신문사는 한화그룹에 인수됐고, 정권은 바뀌었다.
말이 정권교체지 실은 3당 야합으로 노태우 정권이 김영삼 정권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간절히 바랐던 우리는 절망했다. 1심에서 이겼지만 대법원 판결까지 나오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받은 사면·복권장. ⓒ 강기석
나는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단독으로 그런 통 큰 결정을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김영삼 정권 쪽의 암묵적 동의가 없었다면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언론에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과 재벌간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나는 정권의 내밀한 지시 아니면 최소한 권고 정도는 있었지 않나 추측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노태우 정권이 '싸질러 놓은' 나쁜 일들을 정권 초기에 싹 치우고 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초기에 아주 강력했다. 물론 그는 3당 야합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왜곡시킨 원죄가 크고,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고 IMF사태를 불러들인 책임도 막중했지만 하나회를 해체시키고 금융실명제를 단행한 공적도 있다. 하나회를 해체시키고는 측근에게 "놀랐제?"라고 놀렸다는 그 배짱이 한 작은 신문사 해직기자들의 원상 회복에도 영향을 줬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전 정권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력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고 싶었던 것이다(이듬해 김 대통령은 내게 사면복권장까지 보내 나를 놀라게 했다. 사실 나는 잠시 가 있던 평화방송에서도 편집권 독립 투쟁을 벌이다 해고당하고 구속까지 된 일이 있다).
노태우 털고 간 김영삼의 배짱... 박근혜는 어떤가
▲ 지난 14일 오전, 언론단체들이 기자회견을 마치고 정익훈 국민행복제안센터장에게 요구안을 전달하고 있다. ⓒ 강기석
이 지점에서 박근혜 당선인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이명박 정권의 악행을 정권 초기에 일거에 털어 버리고 깨끗한 상태에서 자신의 권력 운용을 개시해야 한다. 잘못 그려진 그림에 개칠하지 말고 백지 위에 자신의 구상대로 새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언론도 그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날 '제18대 대통령인수위원회에 드리는 언론단체 요구문'에도 밝혔듯 이명박 정권에서 해직 등 징계를 받은 450여 명의 언론인들을 즉각 원상회복시키고 낙하산 사장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여기에 "정부 불신을 치유하기 위해 언론장악 포기선언"과 함께 "공영언론 지배구조와 현업언론인의 제작자율성을 제도적으로 개선함으로써 탈정치적이며 언론의 사명에 투철한 이사와 사장을 선임하고 공영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해 공영언론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간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 당선인을 '칠푼이'라고 놀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박 당선인은 지금쯤 자신의 용감함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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