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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자였지만, 이젠 헌옷 모아 세금냅니다"

[인터뷰] 넝마공동체 통해 자립 성공한 엄중섭씨

등록|2013.01.20 11:58 수정|2013.01.20 12:04
빈민운동가 윤팔병(72)씨는 지난 1986년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넝마공동체를 만들었다. 26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넝마공동체를 거쳐 갔다. 이들 중에는 넝마공동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립한 사람도 있다. 엄중섭(48)씨도 그 중 한 명. 지난 17일 경기도 하남시 담이동에 있는 엄중섭씨의 사업장 헌옷 수거 업체 '다리자원'에서 그를 만났다.

'다리자원' 입구에서부터 분주한 분위기가 풍겼다. 직원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헌옷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엄중섭씨는 인터뷰 중간에도 전화를 받고 직원들에게 일을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가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고,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좀 바빠요, 그래서 넝마공동체 집회 현장에도 가기 힘들죠."

"헌옷 수거는 하기 싫었지만, 날 바꾼 것은..."

▲ 넝마공동체에서 자립에 성공한 엄중섭씨 ⓒ 김은희


엄중섭씨와 넝마공동체의 인연은 지난 1999년부터. 오갈 곳 없던 그는 윤팔병씨를 따라 넝마공동체에 몸을 담았다. 그는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었던 시절, 그를 받아준 곳은 오직 넝마공동체 뿐이었다고 말했다.

"넝마공동체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리저리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어요. 식당 일도 해보고, 나이트 웨이터도 해보고... 그래도 젊을 때라서 그랬는지 파지를 줍는 일이나 헌옷 수거는 지저분해 보여서 하기 싫더라고요.

근데 지저분해 보이는 일 피하는 것도 젊을 때 얘기죠. 점점 나이가 들고,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정적인 삶을 찾고 싶더라고요. 그때 형님(윤팔병)을 통해 넝마공동체에 들어왔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대치동 파지는 제가 싹쓸이 했죠."

엄중섭씨는 자신을 넝마공동체로 이끌었던 윤팔병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자신에게 윤팔병씨는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자,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윤씨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중섭씨는 넝마공동체에서의 독립을 준비했다.

"저한테는 형님이라는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을 일이 뭐가 있었겠어요. 나가서 비도 맞아봐야 되는데... 그래서 독립했죠. 제가 독립하겠다고 했더니 형님이 '그래 한번 해봐라, 나가서 자빠지든지 찌그러지든지'라고 말해주셨어요. 벌써 6년 전 일이네요."

철거된 그들의 '뿌리'... "참 안타깝다"

▲ 매일 강남구민센터 앞에서 집회하고 있는 넝마공동체 사람들 ⓒ 김은희


독립한 지 6년이 지난 지금, 엄중섭씨는 든든한 '가장'이자 '사장님'이다. 넝마공동체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배웠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규모를 키워, 지금은 10명 정도 직워이 있는 '다리자원'까지 탄생시켰다. 넝마공동체에 들어갈 당시 초등학생이던 두 딸은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넝마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넝마공동체는 제 뿌리입니다. 오죽하면 자원 이름을 '다리자원'으로 했겠어요. 남들은 자원 이름을 왜 '다리'라고 했냐고 웃지만, 전 좋아요. 제가 다리 밑에서 컸고, 다리 밑에서 배웠던 일들을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현재 넝마공동체 사람들은...
넝마공동체 사람들이 살던 영동5교 밑 컨테이너들은 '불법시설물'이라는 이유로 지난 해 강남구청에 의해 철거당했다. 그후 공동체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유랑하다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크리스마스 무렵부터는 성남의 한 아동센터에서 지내고 있다.

공동체 사람들은 강남구청에 의해 철거당한 후부터 매일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강남구청이 우리에게 행했던 인권침해를 인정하고, 우리의 자활터전을 마련해줬으면 한다"고 요구하면서 "현재 강남구청에서 임시거처를 마련해준 사람들은 넝마공동체에서 제명당한 사람이거나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강남구청은 "영동5교 다리 밑은 위험한 가스 시설 등을 갖춘 불법 주거지였기 때문에 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또한 행정대집행 당시 인권침해는 없었다"고 밝혔다.
넝마공동체는 저에게 단순히 '변화'만 줬던 곳이 아닙니다. 제 삶을 확 뒤집어 놓은 곳이죠. 신용불량자였는데 자립하면서 다 해결했고요. 국가에 제대로 세금 내본 적도 없었는데, 이제는 세금 내고 살아요. 만약 넝마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제대로 살고 있지 않았겠죠."

결국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의 모든 것은 영동5교 '다리'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현재 넝마공동체의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영동5교 다리 밑의 넝마공동체는 삶의 밑천이었다.

"철거라니, 웃음 밖에 안 나와요. 제 뿌리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영동5교 밑 넝마공동체는 저에게는 상징적으로도 의미가 큰 곳이에요.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 자주는 못 가봤지만 그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는데요. 지금 거리에 있는 넝마공동체 사람들도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인데... 참 안타깝죠."
덧붙이는 글 김은희 기자는 <오마이뉴스> 17기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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