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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에 얻은 귀한 딸, 인질로 잡혀갈 줄이야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 1편] 제국의 마지막 옹주, 덕혜

등록|2013.01.22 20:18 수정|2013.01.22 21:35

▲ 일본에 끌려갈 당시인 열네 살 때의 덕혜옹주. 사진 출처: <덕혜옹주 그의 애환과 복식>. ⓒ 이담

서울 경복궁 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있다. 그곳에서 열리는 '덕혜옹주 특별전'이 오는 27일 끝난다. 지난달 11일 시작된 이 특별전에서는 옹주의 탯줄을 담은 태항아리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옷과 신발,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일본에 있었던 유물들이 일본 측의 협조로 한국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이 망한 지 2년 뒤인 1912년에 덕수궁에서 고종과 양귀인(귀인 양씨)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고종은 예순한 살이었다. '환갑에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를 빼닮는다'는 속설처럼 덕혜는 아버지와 흡사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 둥근 얼굴, 시원한 이마, 쌍꺼풀, 오뚝한 코 등등.

기쁨을 감추지 못한 고종은 덕혜의 출생을 기념하는 행사를 여러 차례 성대하게 열었다. 후궁의 딸을 이렇게까지 환대한 전례는 없었다. 그만큼 덕혜를 끔찍이 위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덕혜의 동정을 흥미롭게 보도하곤 했다. 덕혜는 일종의 '국민옹주'였다.

환갑에 얻은 귀한 딸, 유모도 앉은 자리서 젖 물리게 해

고종이 덕혜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는 유모를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루는 고종이 덕혜의 방에 불쑥 들어왔다. 덕혜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 변복동이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자, 고종은 "아이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라면서 "그대로 있거라"라고 말했다. 유모가 그냥 앉은 채로 자신을 맞이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은 덕혜의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덕수궁 즉조당에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어줄 정도였다. 이 유치원에는 덕혜를 포함해서 귀족 집안의 아이들이 입학했다. 어린 덕혜는 덕수궁 안에서 부모만 바라보며 마냥 즐겁게 살았다. 궁 밖에는 망국의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덕혜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장래 희망은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 덕혜를 위한 유치원이 있었던 장소인 덕수궁 즉조당. ⓒ 김종성


덕혜가 다섯 살 때인 1916년에 이복오빠인 영친왕 이은이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훗날 이방자로 개명)와 약혼했다. 일본과 이완용이 이 약혼을 추진한 것은 왕족을 일본인의 곁에 둠으로써 조선 왕실의 혈통을 끊기 위해서였다. 이은과 이방자는 4년 뒤에 결혼했다.

이은의 약혼으로 충격을 받은 고종은 덕혜도 동일한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에게 덕혜를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 나서 김황진의 덕수궁 출입은 금지되고 덕혜의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때 품은 고종의 우려는 그가 죽은 뒤에 현실이 되고 만다.

고종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덕혜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종은 1919년에 여덟 살짜리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3·1운동 시기에 덕혜는 아버지를 잃었던 것이다. 그 뒤 덕혜는 어머니와 함께 덕수궁을 나와 창덕궁 관물헌에 살다가 열네 살 때인 1925년에 어머니와도 헤어져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덕혜옹주... "얼굴에는 애수와 절망감이 깃들어"

명목상으로는 일본 유학을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질로 끌려간 것이다. 일본은 왕족을 떼어놓음으로써 그들이 조선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아버지와 사별한 덕혜는 이로써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됐다. 도쿄에 도착한 덕혜의 막막한 모습이 올케인 이방자의 저서 <지나온 세월>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방자는 서울에서 덕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굉장히 성장했지만, 얼굴에는 애수와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했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작년 11월 3일 서울문화재단의 주최로 덕수궁 함녕전 앞에서 열린 덕혜옹주 연극. ⓒ 김종성


덕혜는 일본 귀족 소녀들의 학교인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세라복을 입은 그는 항상 우울하고 쓸쓸한 표정이었다. 반 친구들이 말을 걸어도 그냥 "하이, 하이"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루는 소마 유키카란 친구가 덕혜에게 시비를 걸어 보았다. 소마가 지은 <마음에 놓은 다리>란 책에 따르면, 소마는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할 텐데, 너는 왜 안 하니?"라고 물어봤다. 상처를 받을 만한 말인데도 덕혜는 말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상처를 받았겠지만, 대꾸할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덕혜는 멍한 표정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덕혜는 사실상의 인질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열다섯 살 때인 1926년에 오빠인 순종 황제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허가를 받아 한국에 와서 오빠를 간호했다.

하지만 오빠는 곧 죽고 말았다. 이때 일본은 덕혜의 장례식 참석을 불허했다. 분노한 한국인들이 덕혜를 중심으로 뭉칠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덕혜는 장례식도 못 보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6·10만세운동을 일으킬 당시, 덕혜는 쓰라린 마음을 누르며 일본 집에서 슬픔을 달래야 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때인 1929년에 덕혜는 어머니 양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은 덕혜가 상복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 덕혜는 조선 왕족으로 인정했지만 양귀인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덕혜는 상복도 입지 못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문상객의 자격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스무 살 된 덕혜에게 일본은 또 다른 불행을 강요했다. 네 살 연상의 대마도 도주인 종무지(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을 명령한 것이다. 조선 왕족을 조선인들로부터 확실히 떼어놓을 목적이었던 것이다.

1931년에 거행된 이 결혼으로 덕혜는 이덕혜에서 종덕혜가 되었다. 부인이 남편의 성씨를 따르도록 한 일본 법률 때문이었다. 그 뒤 덕혜의 성씨는 한 번 더 바뀐다. 이 점은 뒤에서 설명한다.

정략 결혼한 덕혜옹주, 우울증과 불면증의 시작

결혼을 전후한 시점부터 덕혜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구체적인 병명은 조발성 치매증 즉 정신분열증이었고, 덕혜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고종·순종·양귀인의 잇따른 죽음이 상처가 됐겠지만, 단지 그런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위한 의식이다. 장례식을 통해 산 자는 슬픔을 치유한다. 그런데 덕혜는 일본의 방해 때문에 슬픔을 제대로 치유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오빠의 장례식 때는 참석조차 못했고, 어머니의 장례식 때는 상복을 입지 못했다. 마음에 한이 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열증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덕혜옹주와 종무지의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 대마도 이즈하라 소재. ⓒ 김종성

덕혜의 결혼은 행복할 리가 없었다. 정략결혼 자체도 불행한데, 거기다가 정신분열증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종무지가 지은 시에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란 대목이 나온다. 집안에 멍 하니 앉아 있는 덕혜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덕혜는 스물한 살 때인 1932년에 딸 정혜를 낳았다.

덕혜의 결혼생활은 처음 15년간은 그럭저럭 유지됐다. 이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두 부부에게 돈이 많았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들이 덕혜를 보살폈다. 그래서 남편은 성가실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덕혜가 서른네 살 때인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은 덕혜 부부를 포함한 귀족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재산헌납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이 부부는 평민으로 전락하고 재산도 대부분 헌납했다.

이 때문에 도우미를 쓸 수 없게 되자, 종무지는 덕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버렸다. 덕혜를 간호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아예 방치해버린 것이다. 덕혜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갇힌 줄도 모르고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때 덕혜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덕혜는 마흔 살 때인 1951년에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무국적 상태가 된 것이다. 덕혜를 보호해줄 법적 장치가 사라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1955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종무지가 아무것도 모르는 덕혜를 상대로 이혼절차를 진행한 것이다. 물론 오빠 부부와의 협의는 거쳤다. 이혼 뒤에 종무지는 새장가를 들었다.

이혼과 함께 덕혜는 종덕혜에서 양덕혜가 되었다. 원래는 이덕혜로 돌아가야 했지만, 친정인 이씨 집안에서 이혼녀라는 이유로 거부했기 때문인지 덕혜는 이씨 성을 못 쓰고 어머니 성을 쓰게 되었다. 물론 덕혜 본인은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이 당한 비극의 상징 덕혜옹주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덕혜가 마흔다섯 때인 1956년에 딸 정혜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눈 덮인 설산에 올랐던 것이다. 산에 오른 뒤 하늘에 오르는 것이 이 등산의 목적이었다. 정혜는 그렇게 세상과 이별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덕혜는 정신병원에서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 창덕궁 낙선재 구역. ⓒ 김종성


이렇게 덕혜의 불행이 가중되고 있을 때,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 왕실이 자신의 위상을 침해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영친왕과 덕혜의 귀국을 불허했다. 결국 덕혜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인 1962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덕혜는 승용차를 타고 덕수궁 앞을 지나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자기 집이었던 덕수궁 정문을 지나는데도 덕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귀국했던 것이다.

덕혜는 서울대병원에서 요양했다. 한동안은 건강이 호전되는 듯했다. "정혜야! 정혜야!" 하고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얘가 어디 갔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그는 "아리랑~ 아리랑" 하며 혼자서 흥얼거리기도 했다.

덕혜의 기억에 존재하는 것은 정혜와 아리랑, 그리고 10대까지의의 추억뿐이었을 것이다.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만 선명할 뿐,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다 흐릿하거나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나온 덕혜는 창덕궁 낙선재 구역의 수강재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에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였다. 한편, 전 남편 종무지는 새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낳고, 문학 활동을 즐기며 마음 편하게 살다가 덕혜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멀쩡했던 덕혜를 정신질환자로 만들어서 돌려보낸 일제의 만행. 그 만행의 피해자는 비단 덕혜옹주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 모두가 그런 만행의 피해자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옹주로 태어나 망국의 한을 고스란히 안고 살다 간 덕혜옹주는 우리 민족이 당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27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덕혜옹주 특별전에 가본다면, 덕혜옹주를 포함해서 우리 민족 전체가 겪은 근대사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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