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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다카시의 유별난 인사방법

웃음에 관철된 다테마에

등록|2013.01.23 15:33 수정|2013.01.23 15:33
루이비통 디자이너 자리를 역임했던 카이카이 키키의 대표 이사 무라카미 다카시의 성공 방정식은 적지 않은 예술가들에게 깊은 좌절과 동시에 영감의 원천을 나란히 제공하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에 위치해 있다. 소비상품사회로 넘어오며 기존 예술의 지위와 권위 또한 시대의 흐름에 편승했고 자연히 작가들이 추구하는 명성의 성격 또한 조금씩 변모해왔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일수록 고독한 예술상보다는 보다 사회 참여적이고 혹은 무엇인가 차별화되는 자극적인 수식어를 이름 앞에 달고 싶어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런 그들에게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행보는 하나하나 주목받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앤디 워홀도 울고 갈만큼 신기발랄한 마케팅 능력을 선보이는 다카시는 여러 작가들의 부러운 질투를 사고 있다. 기실 예술가들에게 마케팅이란 측면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허나 인상주의 화가들이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마케팅의 재탄생으로 새롭게 화자되며 경매가를 갱신하는 현상을 대면하는 신진 작가들에게 이제 마케팅이란 예술가의 덕목에서 필수불가결한 전공 과목으로 부상했다.

상업미술과 고급예술의 경계가 와해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예술가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따른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덤덤히 고전적인 마케팅의 기본 원리에 충실히 응하며 자신의 작업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완성해 나간다. 그의 예술관은 얼핏 보면 철저히 셀링(Selling) 즉 판매의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워홀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워홀이 예술도 공장에서처럼 대량 생산하여 상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입증하였다면 첨단문물과 오타쿠의 산실에서 자란 무라카미 다카시는 단순한 예술 상품 위에 재미와 스토리, 그리고 마케팅을 충실히 입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다카시는 앤디 워홀의 철학을 답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훌륭하게 계승하는 뛰어난 안목의 비지니스맨이다. 다카시에게 있어서는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상품 이상의 이미지와 형상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다.

판매 이론에서 말하는 셀링(Selling)과 마케팅(Marketing)은 그 성격상 큰 간격을 보인다. 셀링이 말 그대로 단순한 판매를 뜻한다면 마케팅은 바로 상품이 보유한 물질성 위에 가상의 이미지를 덧씌운 뒤 새롭게 창출된 가치와 함께 되파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런 제품들은 굳이 판매에 열을 올리지 않아도 이를 구매하려는 구매자들로 줄이 넘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케팅은 단순히 기업에서만 활용되는 전문적 경영 활동은 아니기에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되는 있는 실정이다.

이는 남녀 간의 고전적인 연애 방식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래된 무성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형식적이고 진부한 사랑 고백은 몇 십번을 시도해도 항상 차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볼품없는 외모라도 자신에 대한 마케팅과 함께 그럴 듯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이들은 사랑하는 이성을 쉽게 사로잡고 여기에는 그들만의 숨겨진 비법이 함께 한다. 하물며 사랑도 그런데 예술이야 두 말할 필요가 있을까. 무라카미 다카시는 바로 이 비결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간파하고 있다. 대미언 허스트의 죽음에 관한 시리즈들이 그 진부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대중들에게 소비되고 판매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심리와 소비 자본사회를 영악하게 관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다카시는 대미언 허스트보다 분명 한 수 위의 마케터이고 보다 빠른 승진 기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대미언 허스트가 그의 설치 작업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무라카미 다카시는 굳이 어느 분야에 자신의 역량을 한정시키지 않는다. 대미언 허스트가 예술에 무관심한 이들도 그 파격적인 서술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에 끌여들였다면 무라카미 다카시는 보다 간결한 방법으로 연령에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폭 넓게 다가서고 있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다카시의 예술 마케팅 프로세스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어떤 전략을 선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마케팅의 기본 원칙은 타사 제품과의 비교 분석을 통한 차별화 시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를 대상하는 연령대 혹은 성별을 정하는 선별 작업이 진행된다. 그 안에서 세부적으로 출시될 제품의 시장 규모와 성장성 그리고 경제상황까지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고려되야 한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사전에 요시토모 나라, 쿠사마 야요이 및 여타의 일본 인기 작가들이 성취한 예술적 업적과 그 과정들을 면밀하게 분석했을 것이다. 그리고선 애니메이션에서 아이디어를 채용한 뒤 그의 독창적인 언어로 설치 미술을 재탄생시킨다면 기존의 일본 작가들과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충분한 승산이 있을 것으로 타진했을 것이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요시토모 나라나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이 각각 소녀 팬들과 귀부인 계층 등의 특정 부류에 한정된다면 무라카미 다카시는 연령층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보편적인 집단의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포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무라카미 다카시의 무겁한 계산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실패에 대한 보험으로 마련한 그의 예술세계에 관철시킨 기본적인 토대는 바로 웃음의 미학이다. 웃음이란 보편적인 요소는 얼핏 여러 예술 사조들에서 다뤄졌을 듯이 여겨지지만 사실 그다지 빈번하게 채용된 적은 없다. 웃음의 미학은 오히려 가장 일반적인 공통의 언어였던만큼 오히려 예술계에서 도외시되던 요소이다. 비단 종교적이고 웅장하던 중세 미술 뿐만이 아닌 근대 사회를 거쳐오면서도 웃음은 인류에게 딱히 환영받아온 요소는 아니다. 그렇기에 웃음의 미적 채용은 그 위험성 역시 동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다카시는 이를 자신의 예술관에 적절하게 녹여낸 뒤 그만의 마케팅 언어로 재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그 웃음의 주체는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도, 아름다운 청춘의 젊은 남녀도 아닌 어려서부터 텔레비전에서 숱하게 보아온 아기자기한 그림의 캐릭터들이고 그들은 현상 너머의 인위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웃음을 과연 그 어느 당대의 예술가가 쉽게 이겨낼 수 있을까. 죽음의 사조를 다루는 대미언 허스트와 웃음을 이야기하는 무라카미 다카시, 승리의 여신은 어느 쪽에 미소를 지을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웃는 얼굴에 능한 장사는 없는 법이다. 인간은 성인으로 성장하며 웃는 횟수가 하루 10회 이내로 줄어들고 심지어는 하루에 단 한 번도 웃지 않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이다. 그렇기에 더욱 웃음에 목말라하는 역설적인 존재들이다. 또한 인간이란 동물은 논리적인 의사소통보다 정서적인 소통에 약한 법이다. 만약 앤디 워홀이 회귀하여 자신의 제자 다카시와 허스트의 세기의 대결을 직접 참관했다면 그는 어느 작가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었을까. 아마도 그 자신으로서도 시도해보지 못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예술관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웃음은 성공을 불러온다는 고전적인 지혜를 무라카미 다카시는 의심의 명제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라카미 다카시의 미학이 단지 웃음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대미언 허스트의 죽음이 죽음의 미학 형식만을 담아낼 때 다카시의 웃음 미학은 저 현상 너머 죽음의 관념까지도 끌여들인다. 카이카이 키키의 알록달록한 연분홍빛의 캐릭터들은 모두 활짝 웃는다. 그 주위로 핀 해바라기들 역시 함박웃음을 연신 지어낸다. 심지어는 일본인들의 가슴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남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검은 버섯 구름조차도 무라카미 다카시의 아기자기한 조형언어로 재탄생한다. 비단 일본 문화의 고전 '국화와 칼'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웃음 뒤에는 그 어떤 함묵적인 조형 장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카이카이 키키 월드의 해맑은 웃음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죽음의 현장에서 잉태된 변질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라카미 다카시는 자신의 작품 안에 서구 사회의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또한 담아냈다고 서술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전략은 오타쿠 및 소수의 예술 관련 종사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또 하나 무라카미 다카시는 스마일을 자신의 마케팅 요소로 적극 채택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그 자신과 작품과의 연계성 및 자칫 가벼움이란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만화 캐릭터들을 끊임없는 브랜딩 과정과 접목시키며 고급 문화로 재탄생시키는 데 노력한다. 그런 무라카미 다카시의 총체적인 마케팅과 브랜드 기법이 만개하며 백미를 발한 곳은 바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전시회에서였다. 17세기에 지어진 루이 왕가의 고풍스런 베르사유 궁전 안에 놓인 카이카이 키키의 설치 작품들은 기존의 고전 회화작들 및 궁전과 그 어떤 이질적인 부조화 없이 하나의 공감각적 이미지를 재조합해내며 탄성을 자아냈다.

루이 13세의 궁전에 자신의 캐릭터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풀어논 무라카미 다카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케팅 믹스의 핵심적인 네 가지 요소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를 버무리며 자신의 천재성을 유럽의 한복판에서 입증하였다. 마야 문명과 티벳의 불교에서 영감을 얻어 새롭게 제작한 형이상학적 설치 작업 Tongari-Tun을 베르사유 궁전 내부에 들여놓음으로써 해당 장소와의 역사적인 문맥에 대응하고자 했고 제품의 가격들 역시 유럽의 숨겨진 부호층을 겨냥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가벼움과 무거움을 공존시키고자 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유별난 자식 사랑에 적합한 최적의 장소였고 베르사유 궁전 또한 문화적 활기를 더하며 프랑스의 위대한 산물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효과를 이끌어냈다.

서로 윈윈 전술을 취한 프랑스인들에게 무카마키 다카시는 더 없이 사랑스러운 파트너였을 것이 틀림없다. 베르사유 궁전은 태양왕 루이 14세가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화려하게 재증축하였고 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보다 젊음이 발산되는 새로운 취향의 공간을 원한 곳이었다. 그런 루이 14세에게 무라카미 다카시의 만화 캐릭터들은 보다 반가운 방문객이었을 것이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 내부의 거울의 방에서는 1783년의 미국독립혁명 조약과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이 체결된 위대한 역사성을 보유한 장소이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카이카이 키키를 데리고와서 바로 이곳에서 서구 문명이 이뤄낸 유산과 일본의 망가 문화 조약을 체결한 것이니 어찌 그보다 위대한 예술가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색상이 요란하여 프랑스 문화와 본질을 달리하기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전시회를 중단할 것을 법원에 제소한 루이 14세의 후손은 필경 자신들이 자부하는 문화적 산실이 문화 변방으로 여겨온 아시아에 의해 공격 당했다는 사실에 그 당혹감이 기인할 것이다. 국내 작가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금의 시대에 있어서 방 안에만 틀어박히는 예술가는 이제 무책임한 작가로 간주되곤 한다. 예술 세계에 대한 성찰의 고전 책만이 아닌 그들의 다른 한 손에는 마케팅과 프로파간다에 대한 서적들 역시 들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미술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국내에서 그 어느 작가보다도 다세포적인 발군의 감각과 영민함을 보유한 최정화 역시 베르사유 궁전에 초대받지 못할 이유가 하등 없다. 루이 14세의 궁전 내부에 한 가득 매달린 최정화표 초록색 빨간색의 플라스틱 소쿠리들을 대면하고 싶은 이유는 왜일까.

일본 최고의 두뇌들이 모이는 동경대학의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을 최단기간에 졸업한 영민한 예술가이자 비지니스 사업가인 무라카미 다카시, 그는 또한 모든 마케팅과 브랜딩의 가장 고전적인 철칙인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그의 마케팅은 실패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그의 외모 또한 날카로운 예술가의 범주보단 보다 구수한 마케터의 외형과 닮아있다. 그가 노린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비평글에서도 자연스레 예술이란 어휘는 상품으로 대체되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 앞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마르쿠제가 지적한 일차원적 인간의 군상에 우리 자신들이 기꺼이 능동적으로 참여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편한 대면이다. 마르쿠제는 50~60년대 선진산업사회의 인간들을 기존 사회에 대한 불만보다 성공의 욕구에만 갈망하는 순응주의적 인물군으로 묘사했다. 물질적인 풍요와 성적인 욕구 속에서 인간들은 2차원적 사고를 멈추고 놀라울만큼 현실의 질서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 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 와서도 우리들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 앞에서 열광하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 자신들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그 어떤 마법적 장치에 걸려든 것은 아닐까. 미국 정부는 소련이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감을 양산하며 더욱 일차원적 국민들을 수월하게 생산해냈고 이는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다카시의 웃음의 미학에 대한 제조법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인 특유의 '타테마에 たてまえ' 를 무기로 '웃음'으로 중무장한 만화 캐릭터들은 서구 사회 및 적으로 여겨지는 반대편의 침공에 대항한다. 그것이 루이14세의 어느 후손을 더욱 심기불편하게 만든 실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스마일을 그의 도그마로 사용하고 있다. 마루쿠제가 소비사회에 의해서 파괴된 언어의 죽음을 선언하였다면 무라카미 다카시는 웃음의 관념 자체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제한된 언어 속에서 다카시의 웃음의 미학은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하는 장치가 된다. 함박웃음을 짓는 다카시의 만화 캐릭터들이 단순한 소비 상품으로 치환되지 않는 이유이다.

과연 무라카미 다카시는 일차원적 사고를 벗어나기 위한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또 다른 자본소비사회의 특성으로 역이용한 희대의 사기꾼인가 아니면 세기의 천재 예술가일까. 또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 앞에 선 관람객들은 단순히 일차원적인 사고의 감상자인가 혹은 또 다른 욕망의 파수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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