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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는 아웅산 수치, DJ가 살아있었다면...

버마에 지속적인 관심 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수치 여사의 인연

등록|2013.01.25 15:27 수정|2013.01.25 15:27

▲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웅산 수치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투쟁의 동지였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91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 김대중도서관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서로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위해 서로 돕고 함께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힘들다. 특히 앞날의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서로 믿는 가치를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설혹 한 번도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아도, 나이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에 이런 분들이 여럿 있다. 특히 멀리 있는 해외 인사들을 뜻과 마음으로 교유하는 모습을 살펴보다 보면 절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28일 한국을 방문하는 버마(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도 그런 분이었다.

2006년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성노벨평화상수상자이니셔티브'(Nobel Women's Initiative, NWI)라는 단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버마에서 장기간 연금상태에 있는 아웅산 수치 여사의 연금해제와 버마 민주화를 위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직접 버마로 들어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러기 위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같은 날 자기가 거주하는 버마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자는 것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날짜는 2007년 1월 5일로 정해졌다. 이 캠페인에는 레흐 바웬사 대통령 등 10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2개 수상단체 대표들이 참여해 8개국 주재 미얀마 대사관에 일제히 비자를 신청했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계속되는 규탄에도 꿈쩍 하지 않는 버마 군사정부를 압박해 보려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직접 행동이었다.

버마 비자 신청 거부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 방문 뜻을 접한 서울에 있는 주한 미얀마 대사관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더니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비자 신청을 접수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주한 미얀마 대사관은 주재국의 전직 대통령의 비자 신청을 접수도 받지 않는 무례를 범한 것이다.

본국 미얀마 군사정부는 각국 대사관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비자 신청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훈령을 내렸을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해 방문하려는 해외 인사들이 이런 수모를 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 방문 계획은 이렇게 무산됐다.

2007년 연초 버마 비자 신청을 거부당한 김대중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자신의 노벨평화상 수상 7주년 행사를 '버마 민주화의 밤' 행사로 열었다. 주제는 "FREE BURMA! FREE SUU KYI!(버마에 자유를! 수치에게 자유를!)"였다. 미국, 영국, 스웨덴 등 서울에 주재하는 주요국 대사 등 1000여 명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에 망명해 있는 100여 명의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인사들은 버마 전통옷을 차려입고 버마의 노래와 민속춤을 선보였다. 버마민족민주동맹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버마의 야당이다. 이날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독재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돕는 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들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는 국민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 투쟁의 결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민주세력의 성원의 덕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도울 차례인 것입니다."

그리고 김 대통령은 4만 달러의 성금을 모아 아웅산 수치 여사, 유럽과 태국의 망명단체, NLD 한국지부에 각 1만 달러씩 나누어 전달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7년 12월 서울에서 '버마 민주화의 밤' 행사를 열었다. 4만 달러의 성금을 모아 아웅산 수치 여사와 버마 민주화를 위한 지원금으로 전달했다. ⓒ 김대중평화센터


동병상련(同病相憐), 김대중과 아웅산 수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 민주화, 아웅산 수치 지원활동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납치와 사형선고, 감옥생활, 연금, 망명 등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모진 고초를 당해야 했다. 자신이 받은 이런 고통의 체험은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졌다. 동병상련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 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50년간의 독재, 1988년 이른바 '88항쟁'에서 3000여 명의 국민들이 살해되는 등 버마 군사독재는 아시아의 수치였다. 아웅산 수치는 반군정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다.

1990년 5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야당인 버마 민족민주동맹(NLD)는 총선에서 80%가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군사정권은 국회개원과 민정이양을 거부했다. 이를 전후로 아웅산 수치 여사는 3차례에 걸쳐 20년 가깝게 이른바 '가택연금'에 놓이게 된다. 수천의 양심수들이 감옥에 갇혔고,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태국, 유럽, 미국, 일본, 한국 등지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다. 야당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버마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199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산체스 대통령과 함께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를 창설하는데, 이 단체는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지원이 목표였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는 지금의 '김대중평화센터'의 전신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단체를 통해 서울과 마닐라에서 '버마 세미나', '버마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제적인 버마 민주화 캠페인의 선봉에 섰다.

국제사회에서 김대중은 '미스터 버마'

1998년 대통령 취임 후에도 버마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관심은 계속된다. 국제적인 민주화 지원 활동에 참여하던 활동가들도 정부 일을 맡게 되면 정부 간 관계를 의식해 활동을 소홀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정부인사'를 지원한다는 버마의 '내정간섭' 비난을 무릅쓰고 아웅산 수치 여사를 도왔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이 여럿 버마에 진출해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

1999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렸다. 김 대통령은 일정에도 없던 버마와 정상회담을 요청해 버마의 군정 지도자 탄 쉐(Than Shwe) 총리를 만나 말했다.

"미얀마(버마) 정부가 아웅산 수치 여사와 대화하고 모든 정치세력을 정치에 참여시켜 안정된 정국을 이루어 세계의 지지를 얻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탄 쉐 장군은 완고했다. 그들의 생각은 우리 군사독재 시절 사람들과 똑같았다.

"우리 국민들은 버마 군사정부를 확실히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수치 여사는 우리 정부가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정부는 우리가 마지막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밖에도 김 전 대통령은 UN 총회를 비롯해 국제회의, 다자간 정상회의에서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 버마 문제를 언급했다. 수치 여사가 감금되고 군정의 압박이 심해지면 성명을 발표하고 버마 정부를 규탄했다.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스터 버마'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에 대한 관심은 2009년 돌아가시던 해도 계속되었다. 2009년 5월 태국에서 망명 중인 버마 인사들이 서울 동교동 자택을 찾아왔다. 이때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는 문제로 국제사회가 버마를 규탄하고 있을 때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3차례의 독재를 극복한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설명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정의와 자유의 편에 있으며 옳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성공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만남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나 돌아가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나지 못했다. 이희호 여사는 수치 여사가 2010년 연말 가택 연금에서 해제되자 편지를 보냈다.

제 남편(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수치 여사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두 분이 만날 수 있었다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수치 여사가 답장을 보내왔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큰 사랑과 존경을 받은 분입니다. 이곳 미얀마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는 김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최고 직위에 오른 뒤에도 야당 시절과 똑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준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김 대통령의 고귀한 지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왼쪽은 버마 민족민주운동(NLD) 한국지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선물한 대나무로 만든 아웅산 수치 여사 초상. 오른쪽은 2010년 12월에 이희호 여사에게 보내온 아웅산 수치 여사의 자필 편지. 김대중도서관 1층에 전시돼 있다. ⓒ 김대중도서관


수치 여사와 버마 민주인사들의 앞날에 축복을

아웅산 수치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화 동지이자 친구이며, 동료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이런 아웅산 수치 여사가 28일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의 여러 대학과 언론사에서는 특별강연과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선인을 면담하는 약속도 잡혀 있고, 다른 국내의 정치인들도 그녀를 앞다퉈 만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반가워 할 분은 이제는 현충원에 묻혀 계신 김대중 전 대통령일 것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4박 5일 일정을 끝내고 버마로 돌아가는 날인 2월 1일 김대중도서관으로 이희호 여사를 찾아와 환담을 나눈다. 생사를 넘나든 두 분 여사님의 만남은 비록 23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민주주의 가치의 위대함, 이를 위해 투쟁해온 인간승리를 확인하는 자리다.

이날 아웅산 수치 여사는 서울에 있는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회원들과 버마인 200여 명들과 만난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웅산 수치 여사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 만나는 장소를 김대중도서관으로 정했다고 한다.

NLD 한국지부의 네튠나잉 회장은 수치 여사를 만날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수치 여사는 '조국의 어머니', '민주주의를 가르쳐주신 스승'이다. 이들 망명인사들은 순결한 조국애를 가진, 버마의 민주주의와 수치 여사를 위해 살아온 분들이다. 10년, 20년 힘든 망명, 난민생활을 해온 분들이다.

수치 여사와 이들 망명인사들에게 아직 조국 버마(미얀마)의 갈 길은 멀다. 비록 작년 4월 보궐선거에서 NLD가 압승하고 수치 여사도 의원에 당선돼 정치일선에 복귀했지만, 정부는 군사정부 시절의 인사가 주축이 돼 운영되고 있다. 지금의 탄 세인(Thein Sein) 버마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난 탄 쉐(Than Shwe)의 부하다. 1인당 GDP 832달러(2011년)의 빈곤문제 해결,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카친, 카렌족 등 소수민족 문제 등 과제가 쌓여 있다. 정치범의 석방 등 민주화와 과거사 정리의 과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버마를 생각하면 우리는 1983년의 '아웅산 사태'를 생각한다. 한국의 각료들이 무참하게 돌아가신 비극적 역사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아울러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와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의 아름다운 인연도 함께 양국 국민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런 역사와 인연이 버마와 대한민국의 우호와 친선관계의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며, 수치 여사가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지로서 동아시아의 양심을 지키는 길에 더욱 우뚝 서길 기대한다. 수치 여사의 한국 방문이 수치 여사와 버마 민주인사들에게 축복의 시간, 승리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최경환은 김대중 대통령을 마지막까지 보좌한 비서관이었다. 지금은 (사)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사)행동하는 양심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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