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자녀의 학교는 안녕하십니까?
[서평]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선생님의 <왜 학교는 불행한가>
'학교'라는 공간만큼 극과 극의 애증을 불러오는 곳이 또 있을까? 학교는 유년과 청춘 시절의 추억이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아름답게 채색되는 공간이다. 이때 학교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통제와 억압, 경쟁과 배제가 일상화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때 학교는 추하고 저주스러운 곳이 된다.
우리는 왜 학교에 가는가. 근대 학교 교육의 출발점은 19세기 초의 프로이센(독일)이었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1762~1814, Johann Gottlieb Fichte)는 근대 학교 교육을 통해 길러내는 인간상 몇 가지를 제시했다. 말 잘 듣는 군인, 고분고분한 노동자,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공무원 등이 그것이다. 기업의 지시에 순종하는 회사원도 있었다.
당연히 이 인간상에서는 자기 생각을 주체적으로 하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생각해 보라.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복종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피히테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인간 유형을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비슷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규정한 것은 참으로 '탁월했다'.
근대 학교 제도는 이렇게 철저하게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탄생하였다. 학교 교육은 개인성의 구현과 같은 인문학적 목적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구조의 유지, 관리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구성되었다. 그러한 근대 학교 교육 제도는 북미와 아시아 등으로 널리 퍼져 나간다.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에 근대적인 학교 시스템이 이식된다. 당연히 일제가 이 땅 곳곳에 보통학교(초등학교), 중학교(5년제.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해당함)를 세운 이유는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를 위한 것이었다. 저들이 교육령에 자신들의 교육 목적을 "충량한 황국민을 양성한다"라고 명문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충량한 황국민'은 '천황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국민'이라는 말이다.
1면 1소학교 정책을 펼친 것 또한 조선 아이들을 일본 사람으로 키워서 부려먹기 좋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정책을 펼치는 데에는 많은 교사가 필요했다. 사범학교(지금의 교육 대학 전신)를 통해 조선인 교사를 대대적으로 양성한 배경이다.
지금도 교육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이는 일제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천황을 위한 충성 서약과 철저한 사상 검증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보통학교 교장의 비밀 추천서인 '내신(內申, secret letter)'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내신'이라는 말에는 '이 학생은 절대로 독립 사상을 가르칠 염려가 없는 학생'이라는 일본을 위한 충성 보증의 추천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일왕에 대한 충성심이 보증된 교사들 아래서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은 군국주의적인 시스템에 따라 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는다. 사범학교 출신의, 일본인 같은 조선인 교사는 아이들에게 일장기를 우러르면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와 같은 충성 서약문을 외우도록 했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훗날 박정희 정권에서 만들어진 '국기에 대한 맹세'의 근원이 된 것이다.
(가) 황국신민의 서사(아동용)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나)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오늘날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내용이 조금 수정되긴 했다.('조국과 민족'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었고, 그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이라는 문구가 추가됨) 하지만 아이들에게 나라에 '충성'을 다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이들은 국가를 위해 언제든지 달녀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수업이 획일적인 통제와 관리 속에 붕어빵처럼 진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서 국가교육과정과 각 교과별 교육과정이 목표와 방법, 내용,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다. 교사들과 아이들은 그 교육과정을 따라 만들어진 '붕어빵 교과서'*를 놓고 똑같은 속도와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 수업에서는 당연히 '개인'이 없다. 우리나라의 국가교육과정은 그 총론에 민주 시민의 양성을 중요한 목표로 명시해놓고 있다. 민주 시민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이 아니면 안 된다. 타인과 공존하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잘 아는 '개인'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학교에는 그 '개인'이 없다. 지금 학교에 있는 '개인'은 자신의 욕망으로 똘똘 뭉친 배타적인 개인이다. 그들은 극심한 경쟁 구조 속에서 사람을 우등과 열등으로 구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 불평등덩어리들이다. 관계가 없는 개인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교사와 학생 모두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 전성은 선생님은 전 거창고 교장이다. 거창고는 경남 거창에 있는 진보적인 기독사립학교로, '상식적 발상'으로부터 벗어난 '직업선택의 십계'**로 유명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교육에 반대한다. 이러한 전 선생님의 의견과 구상을 따라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에게 학교나 국가는 학생이라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는 모든 학생들을 평등한 존재로 대하고 그 각각의 존엄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학교는 학생들 모두가 공존하는 공동체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교의 구성원에게 민주적인 자율성과 권한에 따른 책임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너무나도 팍팍하다. 학교 현장에서 관리자와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과연 학생들을 평등한 존재로 볼 수 있을지('지금 보고 있는지'가 아니다!) 의심이 갈 때가 많다. 성적이 나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말을 안 듣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향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은 가히 '범죄적'인 수준이다. 지극히 노골적이다. 존엄성과 공존은 사전에나 들어 있는 말들이다. 이들의 사전에는 멸시와 조롱, 냉소 등이 넘쳐 난다.
여기에는 대학 입시와 같은 상급 학교 진학에 다걸기(올인)하는 학교 문화(?)가 큰 몫을 차지한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 인문계고교의 모든 학사 일정이나 계획은 대학 입시와 시험을 중심으로 짜인다고 과언이 아니다. 교사들 연구 모임이나 교내 회의에서도 입시와 시험에 대한 얘기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제도를 정비하고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도 제도는 지긋지긋하게 고쳐지고, 과도하게 자주 바뀌고 있지 않는가. 맞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제도 정비이고 변화인가 하는 점이다.
전성은 선생님은, 현재 학교 교육의 구조를 수직 하향식 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곧 교육부→도교육청→시군교육청→학교로 되어 있는 네 단계를, 시군교육청→학교, 도교육청→학교, 교육부→학교 등의 두 단계로 줄여 이들 세 유형 중에서 각 도별로 자율적으로 선택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두 기관은 서로를 평가함으로써 책무성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국가가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통제하는 방법(이명박 정권의 교과부가 즐겨 쓴 고소, 고발이 좋은 예다), 이념 운동이나 사상, 종교 등을 통한 방법도 있다. 경향신문이 지난 해 5월부터 시작한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www.promise.com)***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의식을 개혁할 수도 있다.
전 선생님의 제안은 그 모든 방법들보다 (위에서 소개한) 제도를 통한 해결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를 통한 해결이 시간과 공력이 많이 걸린다는 데 있다. 권력을 잡고 통제하는 행정가나 정치가들이 교육 문제를 법을 통해 빠르고 쉽게 해결하려 하는 것, 권력이 없는 시민운동 단체에서마저도 이를 뒤따르고 있는 것 등****은 제도 정비나 변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제도를 통한 해결책이든 법을 통한 문제 해결이든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효과도 있다. 하지만 현장 교사인 나로서는 학교 현장에서의 참여와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 관리자와 교사들의 의식 개혁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학교 민주화 등은, 그것이 선행적으로 구비되지 않으면 그 어떤 개혁 정책도 무위로 끝나버릴 정도로 필수적이고 중요한 사항이다.
혁신 학교 지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교 현장의 해프닝을 보면 현장의 개혁이 얼마나 중요하지 금방 알 수 있다. 혁신 학교는 경기도교육청에서 김상곤 교육감이 재미(?)를 본 이후 전라북도와 서울시 등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는 학교 혁신 정책의 하나다. 최근 몇 년 간 노력을 기울인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혁신 학교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도 크게 놓아졌다.
여기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혁신 학교에 다니더니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성적이 올라가더라, 학교 소문이 좋게 나더라 하는 말들이 오가면서 '혁신 학교'로 재미를 보려는 일부 교장들이 생겨난 것이다. 교사들과의 협의는 형식적으로 거치고 일방적으로 혁신 학교 공모에 신청하여 지정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학교와 수업의 혁신은 물건너간다. 혁신학교가 혁신의 대상이 되는 반어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와 법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학교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 또한 필수적이다. 특히 교장과 교감, 교사 등 학교 교원들의 자세와 태도는 그러한 변화의 핵심을 차지한다. 담임 교사의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 이를 뒷받침해주는 학교 관리자들의 지원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 학교는 불행한가. 국가의 탓이 크다. 제도와 구조를 허술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나 지역 탓도 있다. 교사와 아이들은 황금 만능과 경쟁 구도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를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가족의 책임 또한 그 못지 않다. 특히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나몰라라 하는 부모는(현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는 차치하고라도) 정말 문제가 많다.
학교 구성원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교사나 교감, 교장 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교육 문제의 최일선에서 제도와 법과 사회 분위기를 현장에서 고스란히 구현하는 주체들이다. 교육자적인 양심을 가지고, 그러한 양심적인 주체를 길러내야 하는 숭고한 교육 활동의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이러한 일을 잘 해내고 있는가. 혹시 그들은 생존이라는 핑계로 국가와 사회의 냉혹한 논리를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주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병들어 정작 사회에서 쉽게 상처 받고 쓰러지는 책임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져야 하지 않는가. 학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들은 과연 얼마나 노력을 했나.
아이들의 삶은 경제적 이익으로만 영위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의 온전한 생존은 결코 의식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숭고한 인간 의지, 열정으로 난관에 부딪칠 줄 아는 용기, 나와 다른 타인과 공존하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할 줄 아는 내면 등은 결코 돈 몇 푼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열성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 MB 정권에서 교과서 발행은 교과서 다양화과 교과서 선택의 자율성을 명분으로 검인정 체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종의 '상위법'인 교육과정이 교과서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경남 거창고 직업 선택의 십계: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1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2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성공입니다, 4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5 교육은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합니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입니다
**** 사교육 걱정이 없는 세상(사걱세)와 같은 시민 모임에서 추진하고 있는 선행학습금지법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 취지과 명분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법적 해결의 한계와 취약점(풍선 효과, 사교육의 음지화 등)을 생각하면 선뜻 납득할 수가 없다.
우리는 왜 학교에 가는가. 근대 학교 교육의 출발점은 19세기 초의 프로이센(독일)이었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1762~1814, Johann Gottlieb Fichte)는 근대 학교 교육을 통해 길러내는 인간상 몇 가지를 제시했다. 말 잘 듣는 군인, 고분고분한 노동자,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공무원 등이 그것이다. 기업의 지시에 순종하는 회사원도 있었다.
당연히 이 인간상에서는 자기 생각을 주체적으로 하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생각해 보라.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복종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피히테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인간 유형을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비슷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규정한 것은 참으로 '탁월했다'.
근대 학교 제도는 이렇게 철저하게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탄생하였다. 학교 교육은 개인성의 구현과 같은 인문학적 목적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구조의 유지, 관리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구성되었다. 그러한 근대 학교 교육 제도는 북미와 아시아 등으로 널리 퍼져 나간다.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에 근대적인 학교 시스템이 이식된다. 당연히 일제가 이 땅 곳곳에 보통학교(초등학교), 중학교(5년제.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해당함)를 세운 이유는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를 위한 것이었다. 저들이 교육령에 자신들의 교육 목적을 "충량한 황국민을 양성한다"라고 명문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충량한 황국민'은 '천황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국민'이라는 말이다.
1면 1소학교 정책을 펼친 것 또한 조선 아이들을 일본 사람으로 키워서 부려먹기 좋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정책을 펼치는 데에는 많은 교사가 필요했다. 사범학교(지금의 교육 대학 전신)를 통해 조선인 교사를 대대적으로 양성한 배경이다.
지금도 교육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이는 일제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천황을 위한 충성 서약과 철저한 사상 검증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보통학교 교장의 비밀 추천서인 '내신(內申, secret letter)'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우리가 무심결에 쓰는 '내신'이라는 말에는 '이 학생은 절대로 독립 사상을 가르칠 염려가 없는 학생'이라는 일본을 위한 충성 보증의 추천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일왕에 대한 충성심이 보증된 교사들 아래서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은 군국주의적인 시스템에 따라 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는다. 사범학교 출신의, 일본인 같은 조선인 교사는 아이들에게 일장기를 우러르면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와 같은 충성 서약문을 외우도록 했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훗날 박정희 정권에서 만들어진 '국기에 대한 맹세'의 근원이 된 것이다.
(가) 황국신민의 서사(아동용)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나)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오늘날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내용이 조금 수정되긴 했다.('조국과 민족'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었고, 그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이라는 문구가 추가됨) 하지만 아이들에게 나라에 '충성'을 다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이들은 국가를 위해 언제든지 달녀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수업이 획일적인 통제와 관리 속에 붕어빵처럼 진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서 국가교육과정과 각 교과별 교육과정이 목표와 방법, 내용,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다. 교사들과 아이들은 그 교육과정을 따라 만들어진 '붕어빵 교과서'*를 놓고 똑같은 속도와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 수업에서는 당연히 '개인'이 없다. 우리나라의 국가교육과정은 그 총론에 민주 시민의 양성을 중요한 목표로 명시해놓고 있다. 민주 시민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이 아니면 안 된다. 타인과 공존하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잘 아는 '개인'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학교에는 그 '개인'이 없다. 지금 학교에 있는 '개인'은 자신의 욕망으로 똘똘 뭉친 배타적인 개인이다. 그들은 극심한 경쟁 구조 속에서 사람을 우등과 열등으로 구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 불평등덩어리들이다. 관계가 없는 개인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교사와 학생 모두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 전성은 선생님은 전 거창고 교장이다. 거창고는 경남 거창에 있는 진보적인 기독사립학교로, '상식적 발상'으로부터 벗어난 '직업선택의 십계'**로 유명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교육에 반대한다. 이러한 전 선생님의 의견과 구상을 따라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에게 학교나 국가는 학생이라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는 모든 학생들을 평등한 존재로 대하고 그 각각의 존엄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학교는 학생들 모두가 공존하는 공동체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교의 구성원에게 민주적인 자율성과 권한에 따른 책임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너무나도 팍팍하다. 학교 현장에서 관리자와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과연 학생들을 평등한 존재로 볼 수 있을지('지금 보고 있는지'가 아니다!) 의심이 갈 때가 많다. 성적이 나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말을 안 듣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향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은 가히 '범죄적'인 수준이다. 지극히 노골적이다. 존엄성과 공존은 사전에나 들어 있는 말들이다. 이들의 사전에는 멸시와 조롱, 냉소 등이 넘쳐 난다.
여기에는 대학 입시와 같은 상급 학교 진학에 다걸기(올인)하는 학교 문화(?)가 큰 몫을 차지한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 인문계고교의 모든 학사 일정이나 계획은 대학 입시와 시험을 중심으로 짜인다고 과언이 아니다. 교사들 연구 모임이나 교내 회의에서도 입시와 시험에 대한 얘기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제도를 정비하고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도 제도는 지긋지긋하게 고쳐지고, 과도하게 자주 바뀌고 있지 않는가. 맞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제도 정비이고 변화인가 하는 점이다.
▲ 전성은 선생님의 책 <왜 학교는 불행한가>의 표지 사진. ⓒ 메디치
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국가가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통제하는 방법(이명박 정권의 교과부가 즐겨 쓴 고소, 고발이 좋은 예다), 이념 운동이나 사상, 종교 등을 통한 방법도 있다. 경향신문이 지난 해 5월부터 시작한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www.promise.com)***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의식을 개혁할 수도 있다.
전 선생님의 제안은 그 모든 방법들보다 (위에서 소개한) 제도를 통한 해결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를 통한 해결이 시간과 공력이 많이 걸린다는 데 있다. 권력을 잡고 통제하는 행정가나 정치가들이 교육 문제를 법을 통해 빠르고 쉽게 해결하려 하는 것, 권력이 없는 시민운동 단체에서마저도 이를 뒤따르고 있는 것 등****은 제도 정비나 변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제도를 통한 해결책이든 법을 통한 문제 해결이든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효과도 있다. 하지만 현장 교사인 나로서는 학교 현장에서의 참여와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 관리자와 교사들의 의식 개혁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학교 민주화 등은, 그것이 선행적으로 구비되지 않으면 그 어떤 개혁 정책도 무위로 끝나버릴 정도로 필수적이고 중요한 사항이다.
혁신 학교 지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교 현장의 해프닝을 보면 현장의 개혁이 얼마나 중요하지 금방 알 수 있다. 혁신 학교는 경기도교육청에서 김상곤 교육감이 재미(?)를 본 이후 전라북도와 서울시 등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는 학교 혁신 정책의 하나다. 최근 몇 년 간 노력을 기울인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혁신 학교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도 크게 놓아졌다.
여기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혁신 학교에 다니더니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성적이 올라가더라, 학교 소문이 좋게 나더라 하는 말들이 오가면서 '혁신 학교'로 재미를 보려는 일부 교장들이 생겨난 것이다. 교사들과의 협의는 형식적으로 거치고 일방적으로 혁신 학교 공모에 신청하여 지정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학교와 수업의 혁신은 물건너간다. 혁신학교가 혁신의 대상이 되는 반어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와 법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학교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 또한 필수적이다. 특히 교장과 교감, 교사 등 학교 교원들의 자세와 태도는 그러한 변화의 핵심을 차지한다. 담임 교사의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 이를 뒷받침해주는 학교 관리자들의 지원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 학교는 불행한가. 국가의 탓이 크다. 제도와 구조를 허술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나 지역 탓도 있다. 교사와 아이들은 황금 만능과 경쟁 구도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를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가족의 책임 또한 그 못지 않다. 특히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나몰라라 하는 부모는(현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는 차치하고라도) 정말 문제가 많다.
학교 구성원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교사나 교감, 교장 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교육 문제의 최일선에서 제도와 법과 사회 분위기를 현장에서 고스란히 구현하는 주체들이다. 교육자적인 양심을 가지고, 그러한 양심적인 주체를 길러내야 하는 숭고한 교육 활동의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이러한 일을 잘 해내고 있는가. 혹시 그들은 생존이라는 핑계로 국가와 사회의 냉혹한 논리를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주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병들어 정작 사회에서 쉽게 상처 받고 쓰러지는 책임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져야 하지 않는가. 학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들은 과연 얼마나 노력을 했나.
아이들의 삶은 경제적 이익으로만 영위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의 온전한 생존은 결코 의식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숭고한 인간 의지, 열정으로 난관에 부딪칠 줄 아는 용기, 나와 다른 타인과 공존하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할 줄 아는 내면 등은 결코 돈 몇 푼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열성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 MB 정권에서 교과서 발행은 교과서 다양화과 교과서 선택의 자율성을 명분으로 검인정 체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종의 '상위법'인 교육과정이 교과서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경남 거창고 직업 선택의 십계: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1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2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성공입니다, 4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5 교육은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합니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입니다
**** 사교육 걱정이 없는 세상(사걱세)와 같은 시민 모임에서 추진하고 있는 선행학습금지법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 취지과 명분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법적 해결의 한계와 취약점(풍선 효과, 사교육의 음지화 등)을 생각하면 선뜻 납득할 수가 없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