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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배달하다 '꿩'하고 맞짱까지..."

안성 철가방 계의 살아있는 전설, 최복천씨

등록|2013.01.25 11:07 수정|2013.01.25 14:35
[기사 수정 : 25일 오후 2시]

"자장면 150원할 때 시작했는데, 지금은 4500원이니 30배가 올랐네요."

이 남자가 철가방 계에 몸담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다. 가난한 환경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국집에 취직했다.

키가 '너~무' 작아 처음부터 철가방 못 들어

최복천대표와 가족왼쪽부터 둘째 딸 최민지, 아내 박재임, 대표 최복천, 종업원 설종준 씨다. 일종의 가족 기업인 셈이다. ⓒ 송상호


"아버지가 8세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와 여동생 3명과 제가 남았죠. 집안의 유일한 남자인 제가 아버지 대신 일찌감치 가장이 된 겁니다. 뭐라도 해야 했어요."

키가 작아도 '너~무' 작아 처음부터 철가방이 허락되지 않았다. 플라스틱 장바구니로 배달했다. 랩도 씌워지지 않은 바구니를 들고 멀게는 왕복 4km까지 배달도 했다. 낑낑대고 가다가 쏟으면 그날은 큰일이었다. 엎은 배달바구니를 들고 돌아오면 주방 선배들에게 사정없이 맞았다. 꼬마 최복천에겐 엄청난 고통이었다. 키가 조금씩 자라나서야 겨우 철가방을 들고 다녔다.

철가방 도보생활 4년이 지나서 오토바이 배달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다른 가게로 옮기면서 진화했다. 이건 복천씨 배달 인생에서 대약진이었다.

오토바이 배달하다 '꿩'하고 맞짱 뜨기도 해

"한 번은 시골집에 배달을 갔는데, 사나운 개 4마리가 추격해 왔어요. 기어 변속도 못하고 1단으로 죽으라 달렸죠. 논두렁에 오토바이가 곤두박질쳤죠. 오토바이는 부서지고, 배달통은 엉망이 되고. 절뚝거리며 3km를 걸어 돌아갔으니까요."

이 사건보다 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오토바이로 시골 길을 신 나게 달렸다. 갑자기 이마에 뭔가가 큰 것이 부딪쳤다. 잠시 복천씨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토바이는 논두렁에 나뒹굴고, 배달통은 엉망이었다. 알고 보니 꿩이 갑자기 날아들었던 것. 부딪친 꿩은 상처를 입고 죽었다. 한마디로 꿩과 맞짱 떠서 꿩이 처참하게 깨졌다고나 할까. 우리는 복천씨의 이마가 '콘크리트'라며 웃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손님을 꼽으라면 이씨 성을 가진 중년 남성을 떠올린다. 한 날은 그가 2000원을 복천씨에게 주었다. "꼬마야. 이 돈으로 꼭 운동화 사서 신으라"며. 착한 장남 복천씨는 그 돈도 바로 어머니에게 드렸다. 안성 장날, 어머니와 함께 장에서 500원을 주고 운동화를 샀다. 생애 최초로 운동화를 신었다. 그는 그때까지 운동화를 못 신어본 게다. 그 후로 고무신시대에서 운동화시대로 바뀌었다. 업그레이드 자주 한다며 우리는 또 웃었다.

중국집 개업하고도 10년을 떠돌아 

짬뽕자장면 보다는 짬뽕이 맛있다는 이집. 복천씨가 만든 짬뽕이 먹음직스럽다. ⓒ 송상호


가게를 옮겨 다니며 배달하다가 또 한 번의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돈벌이도 낫고, 미래도 보장되는 중국집 주방장에 도전했다. 노하우를 바탕으로 드디어 91년도에 안성 삼죽면에 '복천반점'이란 이름으로 중국집을 개업했다. 눈치챘겠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낸 그의 가게였다. 30만 원을 자본금으로 해서 겁 없이 낸 가게였다.

시골에 중국집이 생기니 호기심에라도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장사는 한동안 잘 되었다. 물론 한동안인 게 문제였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이 돈을 벌게 되니 나태해지더라고요"라며 그때의 패인을 분석하는 복천씨. 24세의 나이로 중국집 사장이 되었으니 인생을 조절하기 어려웠을 터.

그 후로 그는 안성 시내로 나와 또 중국집을 차렸다. 문 닫고 또 다른 중국집. 수차례 중국집뿐만 아니라 유사업종으로 전업했다. 자그마치 7개의 가게를 말아먹었다. 그에게 중국집 배달 인생에서 중국집 사장 인생으로 업그레이드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를 개업하고도 10년을 떠돌아다녔다. 말 그대로 칠전팔기. 지금의 가게를 만난 건 2001년도. 다행히도 그의 성실성을 인정한 김종덕씨(현재 70세)로부터 가게를 인수했다.

'시라소니' 사장님, 알고 보니 평생 '절박한 가장'

이만하면 됐다 싶지만, 그는 말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못 먹고 살아요. 우리 거지 돼요."

앓는 소리 한다 싶을 수도 있다. 번듯한 가게에 동료가 4명(그의 아내와 딸, 종업원과 종업원보조)이다. 늦둥이 딸이 인큐베이터 생활을 생후 6년까지 했다. 일명 '소뇌증'이다. 그때 3억 원 이상을 날렸단다. 11세가 된 딸은 지금도 장애인으로서 보살핌과 치료가 필요하다. 평생 고생하신 노모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복천씨가 보살핀다. 거기에다가 아내와 딸을 거느리며 일을 한다.

그의 어깨가 사뭇 무겁다. 그가 쓰러지면 안 되는 이유다. 50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주방장은 물론 바쁠 때는 배달까지 해야 한다.

주방장 최복천옛날엔 주방장 생활을 하면서 미래를 꿈꿨다. '나도 중국집 하리라'고. 그 후로도 수차례 중국집을 바꿔가며 배달하고, 주방장하고, 중국집도 하며 지금의 중국집에 이르렀다. 요즘은 주방장은 주종목이고, 배달은 부종목이다. ⓒ 송상호


나는 그를 보며 박치기의 달인이자 전설의 주먹인 '시라소니'를 떠올렸다. 키는 작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격, 조직의 도움이 아닌 자수성가형, 주먹이 아닌 철가방으로 인생과 맞짱 뜬 점 등. 이 별명을 붙여주니 그가 웃는다. 그런 말도 들은 적이 있다며. 사실 '시라소니' 사장님은 지금도 배달을 뛰어야 사는, 한집안의 '절박한 가장'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지난 23일 안성 공도 대림동산에 있는 최복천씨의 중국집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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