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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 잃은 새만금 대장군, 빛바랜 사진처럼 퇴색

[새만금, 잊혀지면 안 되는 이야기] 부러진 장승과 조우 "아프다"

등록|2013.01.30 11:26 수정|2013.01.30 11:27

새만금 해창갯벌 장승의 퇴색2002년 영화 ‘해안선’에서 비춰진 해창갯벌 장승(맨위 사진. 영화 '해안선' 화면 갈무리)과 지난 1월 19일 촬영한 현재 모습 (중간, 아래) ⓒ 이철재


지난 19일 동서울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부안터미널에 도착했다. 2001년 환경운동연합 회원대회때 온 이후 부안 터미널 부근은 10여 년 만에 처음이다. 한파가 몰아치는 시기인지라 모자, 귀마개, 목도리와 방한복까지,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 중무장을 하고 도보를 시작했다. 목표는 부안군 변산면 해창갯벌까지 약 20여 km.

작년 말, 15년 동안 활동한 환경단체를 그만둔 이후 백수가 된 내게 두 가지 일이 생겼다. 하나는 '가족의 재발견'이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의 일은 등한시 해 왔었다. 그런 나를 반성하면서 소중한 것부터 먼저 챙겨야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올해 일흔 셋 되신 어머니의 지난 삶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 아이와 조카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고, 또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백수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이번 부안 행처럼 예전의 활동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대 중반까지 새만금 갯벌보전 활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 이슈였다. 환경단체에서 상근으로 일할 때 청계천과 4대강 사업 등 주로 물·하천 분야를 담당했었지만, 새만금 사업의 문제점은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새만금 사업은 4대강 사업과 마찬가지로 토건복합체(정치인, 전문가, 언론, 관계 공무원, 지역 토호)에 의해 만들어진 실패한 국책사업이기 때문이다.

해창갯벌에는 장승과 솟대가 50~60여 개 세워져 있다. 민중미술가 최병수 작가로부터 시작한 장승과 솟대는 전국에 있는 환경단체들이 새만금 갯벌을 지켜달라는 의미로 만든 것이다. 2001년 7월, 최병수 작가의 장승 만들기를 도와준 적이 있다. 다음날 장승 세우기 행사였기에, 작업은 꼬박 밤을 새워가며 이어졌다. 능숙한 솜씨로 장승을 다듬는 최병수 선배와 달리 나를 비롯한 대여섯 명은 낫으로 나무껍질을 벗기는 수준이었다.

2001년 해창갯벌에 장승과 솟대 50~60개 세워

새만금 장승을 세우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새만금 장승은 전국의 환경단체 회원과 활동가들이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한 기원을 담아 만들어졌다 ⓒ 환경운동연합


장마철 엷게 내린 비 덕분에 날씨가 후덥지근해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새벽녘 졸음까지 쏟아졌지만, 정작 심한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었다. 모기향을 여럿 피우고, 심지어 모기약을 몸에 뿌려도 잠시뿐. 허리를 숙이고 낫질을 하고 있으면 등과 다리는 바닷가 모기들의 피의 잔치판이 됐다. 하도 간지러워 낫으로 등을 긁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모기들에게 시달리며 밤새 작업한 장승과 솟대를 다음날 아침 트럭에 실려 해창갯벌로 갔다.

물이 빠진 갯벌은 질퍽했다. 굴착기로 장승과 대형 솟대가 세워질 곳에 깊숙한 구멍을 팠다. 가장 먼저 배 모양의 솟대가 세워지고 꽃게 솟대가 뒤를 이었다. 솟대 주변에는 커다란 장승이 심어졌다. 마지막 퍼즐을 맞추듯 이들이 세워지니, 먼저 세운 장승들과 어울려 빛을 발했다. 거대한 장승과 솟대 촌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의 힘으로 새만금 갯벌이 지켜지리라 믿었다.

내가 해창갯벌을 떠올리면 드는 기억이다. 해창갯벌로 가는 동안 그때의 생각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에서 여주인공 미영이 물이 찬 해창갯벌 장승 촌에서 노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장면에서 나오는 미영의 테마 곡도 나지막이 읊조리며 걸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장승님과 솟대님은 안녕할까?'

영화 <해안선> 여주인공이 해창갯벌 장승 촌에서 노는 모습 떠올라 

부안읍에서 만난 돌 솟대와 석장승각각 할머니, 할아버지 솟대와 석장승을 의미한다. 할머니 돌솟대에 앉은 오리는 물을 상징하는데, 물의 기운으로 부안읍의 화재 방지를 염원했다. 또한 할머니 돌솟대는 풍수상 배가 가는 지형의 돛대를 형상화 했다고 한다. ⓒ 이철재


거대한 유리 건물로 만들어진 부안군청을 지나자 두 쌍인 돌 솟대와 석장승을 만났다. 중요민속자료 제 18호라 한다. 이들에 대한 스테인리스로 된 안내문은 '부안 서문 안 당산 (扶安 西門 안 堂山)'이라 설명을 붙여놨다. 이 솟대와 석장승은 부안읍성 서문을 수호하던 것으로 1980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머리에 오리가 앉은 것이 할머니 솟대인데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하는 의미란다. 옆에 있는 것이 할아버지 솟대이고, 석장승도 할아버지, 할머니로 나뉜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의 저자 주강현 교수는 책에서 부안읍 할머니 솟대를 두고 "배가 떠나가는 행주형(行舟形) 지세에 돛대를 나타내기 위하여 풍수상 목적으로 세웠다"고 말한다. '풍수상 배의 기둥인 돛대를 옮겨놨으니, 배가 잘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이내 길을 재촉한다.

보통 솟대는 부안읍 할머니 솟대의 경우처럼 새를 형상화한다. 이를 두고 주강현 교수는 "새는 선사 및 고대사회에서 마을 풍요의 상징물"이라면서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비를 몰아주는 농경의 수호신"이라며 솟대의 새를 풀이한다. 특히 오리는 물을 상징하는데(오리가 앉은 부안 할머니 솟대가 화재 방지를 뜻 하듯이), 우리나라의 쌀농사 지대인 남부지방에 (오리) 솟대가 밀집된 것이 바로 그런 이유라 한다.

걸으면서 해창갯벌에 세워진 솟대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오리 솟대도 있었지만 물고기, 꽃게, 짱뚱어를 비롯해 고기잡이배를 솟대화 한 것도 있었다. 이들의 의미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국민대 시각디작인학과 윤호섭 교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2004년 윤호섭 교수에게 개구리, 도롱뇽, 맹꽁이 보호 활동을 위한 디자인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개도맹 서포터즈'였다.

참고로 개구리, 도롱뇽, 맹꽁이 서포터즈 이름을 만들 당시, 나를 비롯해 몇 명의 활동가들은 사무실에서 거의 노숙하다시피 해 약칭 '사노맹', 즉 '사무실노숙자동맹'이라 불렸다. '개도맹' 이름은 '사노맹'에서 기인했다. 윤호섭 교수는 개도맹 서포터즈 디자인으로 웃는 얼굴을 가운데 두고 사람과 개구리, 도롱뇽, 맹꽁이들이 원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만들어 줬다. 새만금 때도 비슷한 콘셉트여서 눈에 익숙하다.

이를 두고 윤 교수는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라 설명한다. 갯벌에 사는 물고기와 꽃게와 짱뚱어는 새만금을 찾는 새들의 먹이가 된다. 새와 하나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사람도 갯벌을 터전으로 살고 있기에 새와 물고기와 같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배 솟대를 만든 최병수 작가는 윤호섭 교수가 말하듯이 이러한 의미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한다.

말괄량이 삐빠가 커다란 자전거 위에 앉아 있는 대교를 지나 부안시민발전소 앞 도로를 따라가면서 바람은 이내 거세지고 차가워졌다. 바다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30번 국도변의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를 지나자 드넓은 땅이 보인다. 군데군데 고인물이 얼어있었고, 갈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갯벌을 아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점심도 거르며 걸음을 재촉하니 해창쉼터가 나왔다. 예전 이곳 마을 어귀에 바다 창고, 측 해창(海倉)이 있어, 이 일대가 해창갯벌로 불렸다. 저 멀리 짚은 안갯속에서 바다를 가로지르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새만금 방조제였다. 그리고 너른 땅 한가운데 '새만금 방문을 환영합니다. 새만금 관광단지 개발사업'이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이곳부터는 도로에 인접해 누런 갈대가 땅을 점령하고 있고, 멀리 붉은 염초들이 보였다.

새만금 방조제... 누런 갈대와 붉은 염초들이 보인다

각시 잃은 새만금 대장군갯벌여장군의 머리 부분이 사라지고 그 옆에 새만금대장군이 빛바랜 사진처럼 퇴색되어 서있다. 뒤로 ‘새만금 방문을 환영합니다. 새만금 관광단지 개발사업’ 간판이 보인다. ⓒ 이철재


옛 기억에 이쯤 장승과 솟대가 있을 것 같아 연실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시멘트 포장도로 따라갔다. 곧이어 저 멀리 곳곳에 눈이 쌓인 땅 위로 여기저기 마른 가지 꼽아 논 듯 한 곳이 보인다. 눈에 힘을 주고 자세히 보니 장승이었다. 날씨에 따라 이리저리 느낌을 다르게 했던, 예전의 늠름했던 장승과 솟대가 아니라 허름하고 퇴색한 장승이다.

2001년에 해창갯벌로 들어오는 조그만 개천(대광계천) 옆에 배 솟대와 꽃게 그리고 장승이 세워졌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래로 내려갔다. 물기 하나 찾을 수 없는 땅은 그저 딱딱하기만 하다. 배 솟대가 세워진 자리에는 기둥만 남았다. 그 밑으로 부서진 배의 잔해가 패잔병처럼 쌓여 있다. 다른 장승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사라진 솟대2001년 배를 형상화한 솟대가 세워진 자리에는 기둥만 남아 있고, 배는 부서진 채 쌓여 있다. (이철재) ⓒ 이철재


더러는 목이 잘려서 나뒹굴고 있었다. 밑동이 썩어 쓰러진 것도 있고, 여기저기 퇴락해 본래 색을 잃고 있었다. 목이 부러진 갯벌 여장군 옆에 외로이 새만금 대장군이 서 있다. 아랫부분에 말라버린 따개비가 없었다면 이곳이 원래부터 육지였을 것이란 착각마저 들게 한다. 다른 편 꽃게대장군 밑에는 뾰족한 잎들이 날카로운 침엽수가 족히 1미터는 자라 있다. 밀물과 썰물의 흐름이 끊긴 지 제법 오래됐음을 말해준다.

2006년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몇 차례 이 지역을 다녀갔었다. 마지막으로 해창갯벌 장승과 솟대를 본 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몇 년 전 케이블 TV에서 방영된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이었다. 이제 물이 드나들던 해창갯벌의 모습은 내 기억과 영화에서만 남게 된 것이다.

새만금 갯벌을 살려주세요영화 ‘해안선’에서 미영이 물이 차고 있는 해창갯벌 장승들 사이에 있다. 그녀의 머리위에 있는 ‘새만금 갯벌을 살려주세요’라는 말은 지금도 필요한 말이다. ⓒ 영화 '해안선' 화면 갈무리


MB정권의 4대강 사업은 실패한 국책사업이다. 1997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촉발된 새만금 사업 역시 실패한 국책사업이다. 우리나라가 고도 압축 성장시기에는 대규모 개발과 사회간접자본 건설이 불가피한 선택이라 말하는 전문가들도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에 접어든 상황에서는 오히려 대규모 국책사업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인들에게 대형 국책사업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울 욕망의 그릇이다. 개발부서와 이에 동조하는 전문가들 역시 대형 국책사업은 자신의 부서를 존속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새만금 사업 역시도 잘못된 욕망의 역사다. 불행히도 농지조성이 주목적이었던 새만금 사업은 이제 도시와 산업단지 조성으로 목적이 변경됐다. 정확히 말하면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새만금 사업 논란의 핵심이었던 수질 개선도 난망하다. 많은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들은 처음부터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없었음을 지적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목적이 상실되고, 목표도 달성될 수 없음에도 새만금 사업은 여전히 살아있다. 지난 대선 기간 박근혜 당선인 등이 방문해 새만금 특별법 개정 약속했다. 곧바로 특별법은 여야 합의로 개정돼 새만금은 여전히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야 할 형국이다.

새만금 방조제까지 보고 다시 해창갯벌로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해창갯벌 앞에 세워진 컨테이너에 쓰인 '아 새만금. 백합아 다시 만나자'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살아남은 해창갯벌의 장승들은 하나 같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들은 '아프다. 살려 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새만금 사업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업보이자 숙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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