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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멜산 자락의 세계유산 '바하이 영묘와 정원'

[유럽문명의 원류 이스라엘 이집트 여행기 ⑤] 카르멜산과 하이파

등록|2013.02.01 10:13 수정|2013.02.01 11:12
하이파 가는 길에 만난 카르멜산

▲ 카르멜산의 월계수 ⓒ 이상기


나사렛을 떠난 우리는 비교적 굴곡이 심한 길을 따라 하이파로 간다. 이처럼 길이 평탄하지 않은 것은 나사렛과 하이파 사이가 구릉과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면적이 넓지는 않지만 산악, 초록의 평야, 삭막한 광야, 사막 등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가 탄 75번 도로 왼쪽으로는 이스라엘 평원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갈릴리 산지가 펼쳐진다. 이스라엘 평원을 흐르는 강 옆으로는 원자력발전소와 공업단지도 보인다.

이 강 건너 북서방향으로 길게 산지가 펼쳐지는데, 그것이 카르멜산(Mt. Carmel)이다. 카르멜산은 폭이 8㎞, 길이가 39㎞이며, 가장 높은 곳의 해발이 525.4m이다. 카르멜은 신의 장원(God's vineyard)이라는 뜻이다. 그래선지 이곳의 지하에서는 고대 포도주와 오일 제조시설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그리고 카르멜산은 이스라엘에서 삼림이 가장 잘 가꿔진 지역이다. 참나무, 소나무, 올리브, 월계수가 많다.

카르멜산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땅이고 전략적으로 선점해야 할 땅이다.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에 의해 이 지역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성경 '열왕기'에는 카르멜산에 신을 위한 제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예언자 엘리야(Elijah) 이야기가 유명하다. 열왕기 '카르멜산 위에서의 대결'(열왕기상 18장 20-40절) 부분을 보면, 엘리야가 이곳 제단에서 바알(Baal)신을 믿는 사람들과 겨뤄 그들을 이겼다고 되어있다.

▲ 카르멜산의 엘리야 동굴 ⓒ Deror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나는 내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겠소. 어느 쪽이든지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이 참 하느님입니다."

결국 야훼의 불길이 내려와 모든 제물을 태우고, 흙과 물 한 방울까지도 말려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은 야훼를 하느님으로 모셨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도 성스러운 이 산을 방문했다고 하며,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도 신탁을 받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략적인 면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을 이끌던 알렌비 장군이 므깃도 전투(Battle of Megiddo)에서 오스만 터키군을 물리쳤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 이집트는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다시 세워질 가능성이 생겨났다. 므깃도는 카르멜산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전략적 거점이다. 

이스라엘 제3의 도시 하이파

▲ 바하이 정원과 하이파 ⓒ 이상기


카르멜산 자락을 돌아 우리는 하이파에 도착했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카르멜산 정상부 가까이 있는 바하이 영묘를 찾아갈 예정이다. 산의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길이 산자락을 빙글빙글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철도 안쪽으로 난 순환도로를 따라 하가나 교차로와 암파 교차로를 지나간다. 이곳에서 바하이 정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카르멜산 중턱에서 정상부까지 이어진 바하이 정원의 정상부 쪽으로 가 하이파와 바하이 정원 전체를 조망하고, 내려오면서 바하이 영묘와 정원을 살펴보려고 한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굴곡이 심하고 가파르다. 그렇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하이파 항구와 지중해 조망이 좋다. 정상부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바하이 정원과 하이파를 내려다보니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후 3시 30분쯤 되었고, 바하이 정원이 동향을 하고 있어 정원의 일부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래서인지 초록색 정원이 덜 산뜻해 보인다. 바하이 정원 너머 하이파 항구에는 유럽으로 떠나는 화물선들이 점점이 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하이파 정부청사 건물 ⓒ 이상기


도시 곳곳에 고층빌딩도 보이고, 유대교당도 보이고 모스크도 보인다. 그 중 정부청사 건물이 특이한데 날개를 접은 새 모습이다. 그리고 바하이 정원 안에는 영묘, 행정청, 문서보관소 세 개의 건물이 있는데, 그 중 황금빛 돔이 번쩍이는 영묘가 눈에 띈다. 하얀 기둥과 벽에 황금색 돔을 얹은 로코크 양식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1년 압둘 바하(`Abdu'l-Bahá)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해 그의 손자 쇼기 에펜디(Shoghi Effendi)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서 2011년까지 내외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마쳐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같은 관광객들은 이 정원의 일부만 볼 수 있다. 정상부에서 아래로 계단을 4~5층 내려가는 정도만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바하이 정원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노력한다. 정원이 대칭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들어갈 수 없으니 그림의 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하이 정원을 찾는 것은 이곳이 최고의 전망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 바하이 정원과 영묘 ⓒ 이상기


우리는 다시 바하이 정원을 내려와 산중턱에 있는 아래쪽 정문으로 가 보았다. 역시 문을 개방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계단을 통해 바하이 영묘를 올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서 보니 바하이 정원이 숲, 계단과 건물, 물의 삼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대칭이 더욱 뚜렷하고 물에 의한 반영도 좋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하이파 시가지도 아주 단정해 보인다. 그러나 이곳도 역시 4~5층 계단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 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직원이 있어 들어갈 수 있을까 했는데, 나오자마자 문을 걸어버린다. 아쉬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나를 봤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한다.
   
하이파는 바하이 영묘가 있어 보수적일 것 같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진보적인 상공업도시이다. 인구도 시내만 26만 8000명이고, 주변지역까지 포함하면 60만 명쯤 된다. 이곳은 또한 유대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90%나 된다. 그 중 1/4이 과거 소련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이다. 이스라엘에는 구소련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이 많아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러시아어 방송까지 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수도고, 텔아비브가 정치와 행정의 수도라면, 하이파는 경제와 무역의 수도이다.

바하이교 이야기

▲ 바하이 영묘 ⓒ 이상기


바하이교는 1844년 이란의 쉬라즈에서 출발한 종교운동이다. 1852년까지 이란 전역으로 펴졌고, 찬디예(Zandijeh) 왕조시대 카림 칸(Karim Khan)으로부터 탄압을 받자 지하에서 그리고 키프로스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바하이교의 창시자는 시이드 알리 무하마드(Siyyid `Alí Muhammad Shirazi)이다. 그는 이슬람 시아파 출신으로, 시라즈의 상인이었다. 그는 이슬람의 메시아 사상을 거부하고 신의 새로운 사자, 무하마드의 숨겨진 이맘(the Hidden Imám of Muhammad)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진리와 예언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종교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을 시아파 무슬림의 메시아 같은 존재인 마디(Mahdi: 예언된 구세주)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선언에 따라 그는 자신을 밥(Báb: 진리에 이르는 문)이라고 불렀다. 1848년부터 1850년까지 밥을 따르는 바하이교 신자들이 10만 명 정도 생겨났고, 시아 무슬림과의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밥은 이슬람교를 배반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1850년 7월 9일 타브리즈에서 총살되었다. 

▲ 바하이 정원에서 바라 본 하이파 시내와 지중해 ⓒ 이상기


며칠 동안 방치되었던 그의 시신은 바하이교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테헤란 근교에 묻히게 되었다. 그 후 3년 동안 수비 아잘(Subh-i-Azal)이 바하이교의 수장이 된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이 의심을 받아 1853년 바하울라(Bahá'u'lláh: 1817-1892)가 신의 사자(Messenger of God)라는 이름으로 바하이교를 이끌게 된다. 바하이교에 대한 탄압은 1850년대 중반 아미르 카비르(Amir Kabir) 수상 때 절정에 달했다. 1840년대 이후 20여 년간 2만 명 정도의 바하이교 신자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하울라는 1891년 자신의 큰 아들 압둘 바하에게 자신의 영묘를 카르멜산에 세우도록 명했고, 그것이 손자 대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그 후 하이파의 바하울라 영묘는 바하이교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1900년대 들어 바하이교 신자는 100만 명 정도로 늘어났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500~600만 명 정도의 바하이교 신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텔 레오나르도와 지중해변 물고기

▲ 호텔 밖으로 내리는 여명과 불빛 ⓒ 이상기


바하이 영묘를 보고 나서 우리는 숙소인 지중해변 레오나르도 호텔로 간다. 해안을 따라 가면서 카르멜산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집들이 올려다 보인다. 석양을 받아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호텔에 들어서니 로비부터 좀 색다르다. 지배인이 우리를 환영하는 뜻에서 포도주를 한 잔씩 주고, 로비에 앉아 잠시 지중해를 감상하라고 한다. 서쪽 지중해를 바라보니 바다 위로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해안에 하나둘 불이 켜진다.

눈을 돌려 실내 인테리어를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 작품들이 걸려 있다. 천사의 머리를 연필로 그린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곳에 '정교함은 단순함으로부터', '최고의 쾌락은 이해의 즐거움'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이게 요즘 말하는 디자인 호텔이다.

▲ 지중해의 물고기 ⓒ 이상기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호텔 주변 지중해를 산책했다.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낚시질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슨 고기라도 잡았나 하고 살펴보니 한두 마리씩은 잡았다. 조기 비슷한 것도 보이고, 돔도 보이고, 청어 비슷한 것도 보인다. 이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다. 해변을 따라 더 걷다 보니 로마시대 건물 잔해들이 보인다. 주춧돌과 기둥, 주두 등이 길 옆으로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발굴을 한 것은 아니고 해변 산책로를 내면서 유물을 한군데로 모아놓은 것 같다.

이들을 보고 나는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는 시간 여유가 있어 호텔방 테라스에 앉아 잠시 지중해를 감상한다. 방이 서쪽 지중해를 향하고 있어서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이 비수기여서 그런지 우리는 레오나르도 호텔의 높은 층 스위트룸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3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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