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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말 못하는 교사, 당신은 상인이다

[서평]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

등록|2013.02.08 13:54 수정|2013.02.08 13:54

▲ 놈 촘스키·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의 비판적 지성을 대표하는 교육 운동가인 조너선 코졸이 쓴 책 <교사로 산다는 것>(2011, 양철북)의 표지. ⓒ 양철북

"학생과 교사가 학교를 개혁할 수 있다는 내적 자신감을 갖추려면, 일인칭 복수형('우리')으로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당당히 누려야 한다. 하지만 먼저 '나'를 당당히 말할 수 없다면 '우리'를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 25쪽 중)

대학에 있을 때, 나를 맡은 지도교수는 논문에 '나'를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굳이 '나'를 써야 한다면, '나'보다는 '우리'라는 단어로 쓰는 게 좋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혹시 설익었을지도 모르는 '나'의 생각을 불특정적인 '우리'로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나는, '나'보다는 '우리'가 객관성을 담보하는 데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학위논문과 소논문을 쓸 때 '우리'라는 말을 별 거리낌 없이 썼다. 하지만 '나'에 대한 의식과 성찰이 없이 문장이 '우리'로 확대되면서 '나'는 나의 진짜 생각과 의견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덜 익은 내 주장이 '우리'로 포장되자 없던 용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조너선 코졸이 '나'를 말하자고 한 것은 '우리'를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 '나'를 거세한 '우리'의 말하기는 내 얄팍한 수를 숨기기 위한 기만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놈 촘스키·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의 비판적 지성인을 대표하는 조너선 코졸의 교육 에세이다. 저자 소개를 보면, 조너선 코졸은 1965년 인종 분리가 심한 보스턴의 흑인 거주 구역인 록스베리에서 처음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이곳에서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의 시를 읽어줬다는 이유로 해고된 후, 사회 부조리를 알리면서 정의를 세우는 일에 45년의 교직 생활을 바친다.

선생님들, 근엄함을 버리세요

총 15개 장으로 나뉜 이 책의 본문 제목들, 가령 ▲ '아니오'라고 말하기 - 불복종 교육(4장) ▲ 학교교육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다 - 국기에 대한 맹세(11장) ▲ 진실과 거짓을 맞대결시켜라! - 맹목적 애국주의(14장) 등을 통해 그가 관심을 갖는 주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책은 '내가 한 말은 나의 의견이 아니다? - 1인칭으로 말하기'로 시작한다. 코졸은 교사의 '1인칭 말하기'가 교사에 대한 해묵은 이미지와 생각을 전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교사에게 강요되는 '전문 직업인다운 근엄함'(29쪽)은 없어져야 할 관행일 뿐이다.

실상 교사가 '나'로 말할 때라야 아이들은 교사를 살아있는 진정한 대화 상대로 여긴다. 그렇게 될 때 교사와 학생 간에 자유로운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 '나'가 없는 문장은 아이들의 귀에 생생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것을 교사의 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 간에 진정한 소통이 막히는 지점이다.

교사가 '나' 주어문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펼쳐 보이지 않는(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무엇보다 교사 자신의 책임이 크다. 흔히 교직은 전문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문직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에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교사가 자신이 진정 전문직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갖고 싶다면, 그 자신이 하는 말에 책임을 지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용기를 내어 '나'를 말하지 못하는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나 정보 중개상에 다름 아니다.

교사가 '나'를 주어로 해서 말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교사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국가의 통제가 바로 그것. 이때에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근거로 교사들의 입을 봉쇄하는 갖가지 법적 장치들이 그 구체적인 수단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 말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정치를 향한' 중립성을 강제하는 의무 조항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정치로부터의' 중립성, 곧 정치적인 외압으로부터 교육이(교사가)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조항을 의미한다.

헌법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31조 ④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제7조 ②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대전제인 법 앞의 국민 평등권(헌법 제31조의 ④)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의무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로 규정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장된다'라는 서술어 표현이 쓰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의무와 권리가 서로 자리를 바꾸어 버렸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교사의 입을 봉쇄하는 전가의 보도가 돼버린 것이다. 2009년, 시국 선언에 참여한 전교조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대량 징계와 고소·고발은 그 극명한 사례다.

선생님은 틀릴 수 없다? 그건 허구입니다

코졸은 교사가 극단의 의견일지라도 신념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감한 사안,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 용기 있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불복종 교육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교육의 정치적인 중립성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들이다. 하지만 코졸은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갖고 '아니오'(또는 '예')라고 말하는 교사들을 보며 아이들은 '두 가지 유익한 선례'(49쪽)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선생님은 틀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서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선생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둘째, 격하게 논쟁하고도 서로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50쪽).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생각'(131쪽)의 문제가 제기된다. 코졸은 제13장에서 "'나쁜 주입교육'의 반대는 '좋은 주입교육'인가?"라고 묻는다. 우리는 과연 '주입 교육'을 이렇게 양분할 수 있을까. 코졸은 이 문제에 대해 "유일한 대응책은 주입을 하지 않는 것"(132쪽)이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교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입장을 모두 다 소개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모든 생각이 다 똑같이 옳거나 똑같이 가치 있는 것처럼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생각은 이와 정반대다. 그보다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경쟁의 장을 마련해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견해의 우수성을 논증해야 한다(138쪽).

교육에는 중립이 없다. 도대체 세상 모든 일에 중립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중립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눈길을 돌리지 말라는 것, 그래서 '닥치고 복종'을 강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방편일 뿐이다. 중립을 가장한 교육(교사)은 비겁하다. 교사를 포함한 모든 시민은 그 비겁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조너선 코졸이 쓴 이 책은, 우리가 진정한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명쾌하게 알려준다.

코졸은 "선생님 말씀은 언제나 옳다"는 생각을 주입받은 아이들에게 그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중대한 사안에 대해 교사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동료 교사를 학급에 초대해 그 교사와 열띤 논쟁을 벌이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교 현장에서 이 방법이 과연 현실성이 있겠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으나 원론적으로는 이런 토론식 수업이 아이들의 사고력이나 태도의 유연성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교사로 산다는 것> (조너선 코졸 씀 | 김명신 옮김 | 양철북 | 2011.08.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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