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동굴에서 태어나 동굴에서 살고 있다"

[광주천 따라 걷기⑧] 동굴의 추억, 도시의 기억

등록|2013.02.12 09:31 수정|2013.02.12 09:31

▲ 원래 일제가 만든 방공호였던 뒹굴 동굴. ⓒ 이주빈


도시는 기억과 역사를 함께 품는다. 도회지 사람들은 '도시의 낭만'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어쩌면 그 낭만은 기억과 역사의 혼재가 만든 추억일 수 있다. 소소한 일상과 거대한 흐름이 함께 엉켜 흘러가듯이.

광주천 양림교를 왼쪽으로 건너면 '뒹굴 동굴'이 있다. 장난기 넘치는 동굴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일제가 만든 방공호. 일제는 광주 사직공원 일대 네 곳에 방공호를 팠다. 하지만 한 곳은 규모가 매우 작아 지금은 흔적 찾기가 힘들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제가 판 방공호 세 곳의 규모는 폭 약 2m에 길이가 약 30m에 이른다. 일제는 대피시설인 이 방공호를 무기고와 화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 이 세 곳의 방공호는 각기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한 곳은 광주광역시 양림동 문화재지킴이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또 한 곳은 광주시가 '뒹굴 동굴'이라는 이름을 붙여 근대역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마지막 한 곳은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뒹굴 동굴'이란 이름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뒹굴거리며 놀던 동굴'이란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양림동 문화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조민주씨. 그는 1959년 뒹굴 동굴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굴이 딸린 집에서 살고 있다.

"뒹굴 동굴이 제 탯자리입니다. 안채와 뒤안, 동굴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는데 우리 가족들은 동굴을 방처럼 꾸며 살았죠. 보일러도 놓고 여느 집 구조와 비슷했어요. 저는 동굴에 만든 방에서 태어나 어릴 때까진 그곳에서 살았어요. 지금도 부모님으로부터 동굴이 있는 집을 물려받아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동굴에서 태어나 동굴에서 살고 있는 셈이죠, 하하하."

빈곤층의 천국에서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일제 패망 이후 뒹굴 동굴은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한 명 두 명씩 이른바 '부랑인'으로 불리는 떠돌이 빈곤층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동굴 특성상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이 때문에 특별한 벌이가 없었던 떠돌이 빈곤층에겐 뒹굴 동굴은 그나마 냉난방 걱정 없이 여름과 겨울을 날 수 있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 훈령 410호'까지 발동해 떠돌이·앵벌이·거지·행려병자 등 이른바 '부랑인'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수용하기 시작했다. "올림픽 등 국가적 행사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도시 빈곤층이 졸지에 정화 대상이 되어 범죄자 취급받으며 강제 수용되었던 것이다.

떠돌이 빈곤층이 강제로 끌려간 이후 뒹굴 동굴은 여름엔 마을 어른들의 피서가 되었다. 겨울엔 동네 청년들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정담을 나누는 사랑방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어느 재기 넘치는 이는 뒹굴 동굴에 생맥주집을 열어 명소로 만들기도 했다. 그곳이 지금 광주시가 뒹굴 동굴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 곳이다.

▲ 광주 통기타 거리에 있는 가게 앞에 장작더미가 수북하다. ⓒ 이주빈


▲ 15년째 운영되고 있는 한 통기타 주점. 광주 통기타 거리에 있는 어느 가게에 들어가도 노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 이주빈


뒹굴 동굴에서 사직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 유명한 '통기타 거리'가 있다. 말 그대로 집주인과 손님이 어울려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술 마시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다.

다른 도시의 소위 '7080 카페'들에서 손님들은 말 그대로 객이고 노래 듣는 대상이다. 하지만 광주 통기타 거리에 있는 가게에선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구분이 잘 가질 않는다. 원하면 누구나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할 수 있고, 옆 테이블에서 노랠 시작하면 다른 테이블 손님까지 함께 노래를 한다. 여느 다른 도시와는 확연하게 다른 통기타 문화다. 격 없이 흥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 광주 사람들이다.

주체 못할 흥을 품은 이들은 부당한 것에 거침없이 분노한다. 비록 그 상대가 총검으로 무장한 특수부대라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광주 사람들 기질이다.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기억의 시간'은 잴 수 없다 

통기타 거리를 지나 사직공원 산책로를 타고 팔각정에 오른다.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광주 시내 풍경은 따뜻하고 편하다. 사직공원은 조선시대 때 고을 수령이 고을의 평안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제를 지낸 사직단(社稷壇)이 있던 자리다.

사직단의 상징성을 익히 파악하고 있던 일제는 광주에 들어오자마자 군대의 진영을 사직단 터에 틀었다. 그리고 1924년 일제는 훗날 국왕에 오르는 당시 왕세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한다며 이곳을 '기념공원'으로 명명했다.

일제는 기념공원 명명 기념으로 전망대를 세웠는데, 그곳이 지금의 팔각정 자리다. 그 전망대는 상징을 훼손하면서 정복에 도취하던 일제의 상징 체계에선 조선 광주를 요찰하는 '감시의 탑'이었을 것이다.

왕세자의 결혼기념공원 이름 붙이기 외엔 이렇다할 공원화 작업을 하지 않던 일제가 1938년께 느닷없이 벚나무를 심어대기 시작했다. "6만 광주시민의 환락경(歡樂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요란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일제는 광주공원을 식민지 공원의 상징으로 가꿀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신사(神社)가 들어서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일제는 기념공원을 사직공원이라 칭하며 공원조성 사업을 벌였다. 일제는 시내와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광주천에 다리까지 놓았는데 그 다리가 바로 금교(錦橋)다.

▲ 일제는 왕세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해 사직단이 있던 곳을 '기념공원'으로 명명하고 지금의 팔각정이 있는 자리에 전망대를 세웠다. ⓒ 이주빈


양림교에서 뒹굴 동굴, 통기타거리, 사직공원 팔각정을 거쳐 금교까지는 채 2km가 되지 않는다. 성인이 보통 속도로 걸으면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다. 그러나 기억의 시간은 잴 수 없고, 추억의 길이는 가늠할 수 없다.

기억과 기억이 이어져 역사가 되고, 추억과 추억이 이어져 정서가 된다. 광주천을 따라 걸으면 광주의 역사가 보인다. 광주천을 따라 걸으면 광주사람들의 마음결을 느낄 수 있다. 광주천 금교에 노을이 진다.

▲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바라본 일출. ⓒ 이주빈


덧붙이는 글 광주천 따라걷기 3-5코스는 '양림교-뒹굴 동굴'-양림파출소-통기타 거리-사직공원 팔각정-금교'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