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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독감으로 산골짝 절에 가두는구나"

[머묾이 있는 여행③] 순천 선암사

등록|2013.02.09 15:28 수정|2013.02.09 16:53

선암사 매화3월 말경부터 4월 중순까지 선암사는 그윽한 매화향으로 가득하다. ⓒ 박선미


사계절 꽃절로 불리는 절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봄이면 깊고 그윽한 매화향에 취하고 절 전체가 마치 커다란 정원과도 같은 전라남도 순천의 선암사. 이듬해 봄비가 내리던 날 선암사를 찾은 후로 매년 봄이면 매화의 개화시기에 맞춰 절을 찾았다. 지금은 비단 봄뿐만이 아니라 사계절 매월 찾는 곳이 되었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며칠 머물 생각으로 절에 4박 5일 예약을 하고 기차표도 예약했다. 사진도 접어두고 푹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번 겨울은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넘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출발일 아침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일정을 취소할 수 없어 집을 나섰다. 순천행 기차는 용산역을 출발했고 기침이 날 때 마다 마치 기관지를 통째로 뜯어내는 듯 아프기 시작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순천역에 도착해 바로 병원으로 갔다. 입이 방정이었다. 독감이다.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서 선암사행 버스를 탔지만 괜찮을지 내심 걱정이었다. 종무소에 등록을 마치고 방사에 배낭을 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도미노가 넘어가듯 아프기 시작했다.

둘째 날 오후가 돼서야 겨우 대웅전으로 가서 절을 하는데 어딘지 이상했다. 곰곰이 살펴보니 합장을 하고 삼배를 해야 맞는데 장례식장 문상을 하듯 절을 하고 있었다. 얼굴의 화끈거림이 단지 감기로 인한 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셋째 날까지 절에서 머문 동안 아침 점심 저녁식사 말고는 양치하고 화장실 다녀온 기억밖에 없다. 빠짐없이 감기약을 챙겨 먹었지만 겨우 거동이 가능할 뿐 호전이 없다. 문득 보리암 생각이 났다.

'비바람으로 돌 속에 나를 가두더니 이제 독감으로 산골짝 절에 가두는구나.'

연등만들기템플스테이 체험형의 일정으로 연등을 만들고 있다. ⓒ 박선미


땀으로 범벅이 된 옷가지들을 세탁하고 돌아오는 길에 템플스테이지도스님(등명스님)을 만났다. 월요일에 내려오겠다고 한 사람이 삼일을 방사에만 박혀 지냈으니 절에 있는 줄도 모르셨던 모양이다. 연등이나 접자고 오라신다. 초파일은 한참 멀었는데 무슨 연등인가 했더니 템플스테이 체험형의 일정으로 연등 만들기를 하는 중이다.

생각해보니 몇 년째 선암사에 머물며 지내다 갔지만 단 한 번도 체험형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휴식형은 사전에 예약만 한다면 자유롭게 언제든지 머물 수 있으며 사찰 법도에 어긋남 없이 자유롭게 지내면 된다. 그와 달리 체험형은 3박 4일의 일정으로 매월 두 번 진행된다(일정은 선암사 누리집 일정표 참고). 연령대는 20·30·40대까지 직업도 학생부터 일반 회사원 자영업자 교사에 판사까지 각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간다. 일정표를 봐서 전반적인 내용이야 알지만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했다.

이번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방학을 이용해 참가한 학생들이 많았다. 낮 일정으로 반야심경 공부와 연등 만들기를 하는 모양이다. 색색의 얇은 종이로 각자 자신의 연등을 만드는데 재밌을까 궁금했다. 종이가 얇다보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표정들은 모두 진지하기만 하다.

대웅전보물로 지정된 선암사의 대웅전 ⓒ 박선미


넷째 날이 되고 새벽예불을 참석하기 위해 대웅전으로 갔다. 늘 그렇듯이 선암사의 가장 웃어른스님과 등명스님이 가장 먼저 자리하고 계셨다. 그 뒤로 주지스님을 비롯해 강원의 스님들이 각각 자리를 하고 템플스테이 체험형 참가자들도 자리 했지만 반수가 체되지 않는 듯했다. 보물로 지정된 선암사의 대웅전은 대부분의 절이 그러하듯 열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난방 장치만을 가동한다. 아무리 남녘이라지만 산속에 자리한 산사의 새벽공기는 여간 차갑고 서늘한 게 아니다.

새벽예불새벽예불 후 자신이 만든 연등을 들고 108배를 올리기 전 ⓒ 박선미


108배자신이 만든 연등을 앞에 놓고 108배 중 ⓒ 박선미


새벽예불을 마치고 숙소로 가려는데 템플스테이참가자들은 잠시 후에 별도로 108배를 진행한다고 했다. 방으로 돌아와 잠시 몸을 녹이고 다시 대웅전으로 가니 참가자들 모두가 본인들이 만든 연등을 손에 들고 법당에 모여 있다. 방금 잠에서 깬 참가자들은 눈을 뜨기도 힘들어하는 눈치다. 스님의 죽비소리에 맞춰 108배가 진행됐다. 반면 구석에서 사진을 찍으며 앉아 있으려니 마룻바닥에서 냉기는 올라오고 혼자만 살겠다고 나가지도 못하고 딱 죽을 맛이다.

20여 분 만에 108배가 끝나고 아침공양 후 선암사 뒤편에 위치한 조계산의 비로암을 오른다고 한다. 내게도 함께 산에 가자고 하시니 가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새벽예불이 무리였는지 독감이 다시 심해졌다. 가겠다고 했으니 하는 수없이 따라나섰다. 비로암까지 한 시간여를 오르며 비지땀인지 식은땀인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참가자가 한 명이 말을 건넨다.

"서울에서도 가까운 절이 많은데 왜 하필 이 먼 데까지 다니세요?"
"선암사가 이곳에 있어서요." 

누가 알까 다녀온 지 달포만 지나도 좌불안석 마음은 이미 선암사로 가 있는 것을...

비로암선암사 뒷편의 조계산 비로암 ⓒ 박선미


비로암난방은 장작으로 군불을 지핀다. ⓒ 박선미


지인스님홀로 산중암자를 지키고 있는 지인스님 ⓒ 박선미


선암사의 부속암자인 비로암엔 지인스님 홀로 머물고 있다. 전기는 들어오지만 보일러시설이 되질 않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난방을 한다.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식사는 하루 한 끼로 간소하게 먹는다. 열 명이 넘는 인원 모두에게 손수 차를 대접하면서도 떼로 몰려온 이방인들이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작설차에 뽕잎차 그리고 고로쇠물까지 푸짐하게 대접받고 산을 내려왔다.

아무리 산 공기가 건강에 좋다지만 역시나 무리였는지 오후부터 열이 오르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감기약이 더는 없으니 찻집(선각당)에 들러 보온병 가득 생강차를 사서 담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바가지에 물을 떠다가 머리맡에 놔두고 수건에 적셔 이마에 올려두길 반복했다. 자정 무렵 열이 내리고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빗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기차역에 가 있다. 아침도 거르고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늘 아쉬움을 뒤로하고 뒷걸음질 치며 걸어 나오던 길을 도망치듯 절을 빠져나왔다.

시인 정호승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라고 했다. 정작 뒤깐에 들어서면 코를 막고 뒷걸음질 치며 홍매화길로 달려가 묵은 똥내로 놀란 코를 매화향으로 후빈다.

겨우내 긴 숨 참아내고 낮은 호흡으로 후! 후! 매화는 피고 봄비에 젖은 응진전 앞마당의 지렁이는 땅을 뚫고 기어 나와 긴 숨을 내쉰다. 해천당 토방에 찾아든 늙은 고양이의 나른한 늘어짐과 함께 내 그리운 선암사의 봄은 그렇게 시작이 된다.

매화가 지고 대웅전 뒷마당 겹벚꽃이 바람에 날리면 산신각 담장 뒤편 여린 찻잎 따는 고단한 행자승의 눈물과 함께 내 그리운 선암사의 봄날은 그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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