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산불 속에 든 '토끼'가 되다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⑦] <토끼>
1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그는 어미의 입에서 탄생과 동시에 타락을 선고받는 것이다
토끼는 앞발이 길고
귀가 크고
눈이 붉고
또는 "이태백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
모두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그가 입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또한번 토끼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나와 몇 사람의 독특한 벗들과 함께
토끼의 탄생의 방식에 대하여
하나의 이덕(異德)을 주고 갔다
우리집 뜰앞 토끼는 지금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다
토끼야
봄 달 속에서 나에게만 너의 재조(才操)를 보여라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2
생후의 토끼가 살기 위하여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 모양으로 서서 있어야 하였다
누가 서 있는 게 아니라
토끼가 서서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캉가루의 일족(一族)은 아니다
수우(水牛)나 생어(生魚)같이
음정(音程)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 있어야 하였다
몽매(蒙昧)와 연령(年齡)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잠시 그는 별과 또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曲線)같은 것일까
초부(樵夫)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소리
갈대소리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
"불이다 산화(山火)다"
(1949)
1949년은 수영이 나이 29세가 되는 해입니다. 이 해 벽두부터 수영의 집안에는 슬픈 일이 들이닥칩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수영의 부친이 49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버리게 된 일이 그것입니다. 수영의 아버지는 이미 2, 3년 전부터 병세가 악화하여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지요. 그 사이 그는 아들(수영)로부터도 제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앞의 <이[虱]> 참조)
수영의 아버지에게 잘 나가던 한때가 없진 않았습니다. 과거 종로 6가에 살면서 열었던 지전(紙廛)은 그에게 제법 커다란 재미를 안겨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원래 이재에 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게 일도 계속 그에게 재미를 안겨주지는 않았지요. 그는 그렇게 쇠락의 길을 걷던 중에 안타깝게도 병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상 생활의 방편은 온통 수영 모친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수영의 어머니가 '유명옥'이라는 이름으로 빈대떡을 구워내며 생계를 꾸려가던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 시기 수영 또한 무기력한 백수 건달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명동 일대를 헤매고 다니거나 지인들과 밤새 술판을 벌이는 일이 그의 하루 일과였지요. 이 해 11월에는 수영의 어머니가 아들의 생일(음력 10월 28일)을 맞아 백수 건달 같은 친구들을 초청해 거하게 대접을 해 주기도 합니다. 성탄절 전야에는 소설가 이봉구, 최정희 등과 함께 유명옥 인근에 있던 수영의 방-수영이 유명옥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다며 모친에게 생떼를 부려 얻은 방-에서 밤새 곤죽이 되도록 소주를 마십니다.
저는 수영이 그런 상황과 시간을 거쳐 나오면서 느꼈을 무력감을 떠올려 봅니다. 수영은 그때 스물아홉의 열혈 같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자신의 육체를 만들어 준 산 증인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영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아득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을런지요.
이 시에는 '토끼'가 등장합니다. 이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1'의 2연 1, 2행)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이 비참합니다. '토끼'가 '뛰는 훈련을 받는 것이 '타락을 선고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끼'가 뛰는 일은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봐야 하지 않을런지요. 그런데 화자는 그것을 '타락'으로 규정합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타락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서글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토끼'가 생존하는 모습은 그래서 피폐합니다. 그는 늘 '서서 있어야'('2'의 2연 2행) 합니다. '고개를 들고 서서 있'('2'의 2연 9행)어야 합니다. 서 있는다는 것은 '전쟁'이나 '나의 진실성'과 같은 것입니다.('2'의 1연 2행 참조) 그것은 극한의 생존 현장이나 삶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뜨거움과 지극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서 있으면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애초에 '음정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2'의 2연 7, 8행)기 때문입니다. 소리가 없으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토끼'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왜 몸과 마음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그 일을 해야 할까요. '2'의 2연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몽매와 연령이 언제 그에게 /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1, 2행)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개를 들고 끊임없이 '별'('2'의 2연 3행)을 바라보고,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곡선같은'(('2'의 2연 4행) '또하나의 것'('2'의 2연 3행)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몽매'와 '연령'(?)이 그를 비껴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지금 그 '토끼'가 처한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떤 소리들이 그에게 들려옵니다. 이를테면,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2'의 4연),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 / "불이다 산화다"('2'의 5연)와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과 맹수의 예리한 이빨이 그를 쉬이 노리겠지요. 여기에다 산불까지 타오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인 '토끼'를 수영의 분신으로 보고 싶습니다. 부친을 잃은 수영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었을까요. 아마 그는 장남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좀더 현명하고 지혜로워져야 했겠지요. 꼿꼿이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맞서 안아야 했겠지요. 이런저런 생의 어리석음에도 휘둘려서는 안 되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생의 강한 의지가 있었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안고 있어야 할, 또는 정면으로 응시해야 할 현실이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그 무엇보다 앞서 말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 결정적인 사건이었겠지요. 이 해 6월 26일 경교장에서 일어난 백범 김구 선생의 시해 사건과 연결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무기력과 절망이 그의 주변을 휩싸고 돌았을 겁니다. 바닥 모를 좌절이 그를 찾아와 뒷덜미를 잡아챘겠지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는 '토끼'의 타락한 운명, 곧 계속 뛰는 훈련을 받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한시도 쉬지 않고 선 채로 '별'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쫓아내야 하니까 말이지요. 수영의 20대 끝자락은, 그렇게 좌절과 의지가 번갈아오는 모순의 수레바퀴 속에서 끝없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그는 어미의 입에서 탄생과 동시에 타락을 선고받는 것이다
토끼는 앞발이 길고
귀가 크고
눈이 붉고
또는 "이태백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
모두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그가 입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또한번 토끼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나와 몇 사람의 독특한 벗들과 함께
토끼의 탄생의 방식에 대하여
하나의 이덕(異德)을 주고 갔다
우리집 뜰앞 토끼는 지금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다
토끼야
봄 달 속에서 나에게만 너의 재조(才操)를 보여라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2
생후의 토끼가 살기 위하여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 모양으로 서서 있어야 하였다
누가 서 있는 게 아니라
토끼가 서서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캉가루의 일족(一族)은 아니다
수우(水牛)나 생어(生魚)같이
음정(音程)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 있어야 하였다
몽매(蒙昧)와 연령(年齡)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잠시 그는 별과 또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曲線)같은 것일까
초부(樵夫)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소리
갈대소리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
"불이다 산화(山火)다"
(1949)
1949년은 수영이 나이 29세가 되는 해입니다. 이 해 벽두부터 수영의 집안에는 슬픈 일이 들이닥칩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수영의 부친이 49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버리게 된 일이 그것입니다. 수영의 아버지는 이미 2, 3년 전부터 병세가 악화하여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지요. 그 사이 그는 아들(수영)로부터도 제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앞의 <이[虱]> 참조)
수영의 아버지에게 잘 나가던 한때가 없진 않았습니다. 과거 종로 6가에 살면서 열었던 지전(紙廛)은 그에게 제법 커다란 재미를 안겨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원래 이재에 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게 일도 계속 그에게 재미를 안겨주지는 않았지요. 그는 그렇게 쇠락의 길을 걷던 중에 안타깝게도 병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상 생활의 방편은 온통 수영 모친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수영의 어머니가 '유명옥'이라는 이름으로 빈대떡을 구워내며 생계를 꾸려가던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 시기 수영 또한 무기력한 백수 건달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명동 일대를 헤매고 다니거나 지인들과 밤새 술판을 벌이는 일이 그의 하루 일과였지요. 이 해 11월에는 수영의 어머니가 아들의 생일(음력 10월 28일)을 맞아 백수 건달 같은 친구들을 초청해 거하게 대접을 해 주기도 합니다. 성탄절 전야에는 소설가 이봉구, 최정희 등과 함께 유명옥 인근에 있던 수영의 방-수영이 유명옥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다며 모친에게 생떼를 부려 얻은 방-에서 밤새 곤죽이 되도록 소주를 마십니다.
저는 수영이 그런 상황과 시간을 거쳐 나오면서 느꼈을 무력감을 떠올려 봅니다. 수영은 그때 스물아홉의 열혈 같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자신의 육체를 만들어 준 산 증인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영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아득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을런지요.
이 시에는 '토끼'가 등장합니다. 이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1'의 2연 1, 2행)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이 비참합니다. '토끼'가 '뛰는 훈련을 받는 것이 '타락을 선고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끼'가 뛰는 일은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봐야 하지 않을런지요. 그런데 화자는 그것을 '타락'으로 규정합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타락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서글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토끼'가 생존하는 모습은 그래서 피폐합니다. 그는 늘 '서서 있어야'('2'의 2연 2행) 합니다. '고개를 들고 서서 있'('2'의 2연 9행)어야 합니다. 서 있는다는 것은 '전쟁'이나 '나의 진실성'과 같은 것입니다.('2'의 1연 2행 참조) 그것은 극한의 생존 현장이나 삶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뜨거움과 지극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서 있으면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애초에 '음정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2'의 2연 7, 8행)기 때문입니다. 소리가 없으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토끼'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왜 몸과 마음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그 일을 해야 할까요. '2'의 2연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몽매와 연령이 언제 그에게 /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1, 2행)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개를 들고 끊임없이 '별'('2'의 2연 3행)을 바라보고,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곡선같은'(('2'의 2연 4행) '또하나의 것'('2'의 2연 3행)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몽매'와 '연령'(?)이 그를 비껴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지금 그 '토끼'가 처한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떤 소리들이 그에게 들려옵니다. 이를테면,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2'의 4연),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 / "불이다 산화다"('2'의 5연)와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과 맹수의 예리한 이빨이 그를 쉬이 노리겠지요. 여기에다 산불까지 타오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인 '토끼'를 수영의 분신으로 보고 싶습니다. 부친을 잃은 수영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었을까요. 아마 그는 장남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좀더 현명하고 지혜로워져야 했겠지요. 꼿꼿이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맞서 안아야 했겠지요. 이런저런 생의 어리석음에도 휘둘려서는 안 되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생의 강한 의지가 있었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안고 있어야 할, 또는 정면으로 응시해야 할 현실이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그 무엇보다 앞서 말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 결정적인 사건이었겠지요. 이 해 6월 26일 경교장에서 일어난 백범 김구 선생의 시해 사건과 연결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무기력과 절망이 그의 주변을 휩싸고 돌았을 겁니다. 바닥 모를 좌절이 그를 찾아와 뒷덜미를 잡아챘겠지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는 '토끼'의 타락한 운명, 곧 계속 뛰는 훈련을 받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한시도 쉬지 않고 선 채로 '별'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쫓아내야 하니까 말이지요. 수영의 20대 끝자락은, 그렇게 좌절과 의지가 번갈아오는 모순의 수레바퀴 속에서 끝없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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