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제자리 잡지 못한 어느 독립운동가의 묘지
이윤재 선생 묘지, 정부가 국립묘지 안장 추진해야
이윤재(李允宰, 1888-1943) 선생은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한글학자였다. 일제강점기에 그만큼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윤재 선생의 발자취를 추적하다 보면 가슴이 먹먹하여 안쓰러움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올해는 이윤재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숭덕학교 교원시절에 3·1운동을 주도하였기에,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기에,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감옥살이를 다시 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일제시기에 이윤재 선생은 여러 중등학교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특히 경신학교 교원 시절인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주저 없이 하였다.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민재호, 「이윤재 선생님의 조국애」, <경신>42, 1985)
그러면서 그는 조선어 교과목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사며 태극기며 독립운동사를 틈틈이 가르쳤다. 이처럼 그는 투철한 항일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윤재 선생은 1930년대에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동지들과 함께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제로부터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그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중진이었던 이윤재 선생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10월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일제 형사들로부터 매일 난타를 당한 것도 모자라 6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살아서 감옥에서 풀려나기 어려울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다.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12월 8일 옥사하였다. 이윤재 선생은 이렇게 일생 동안 우리 말글을 연구하며 민족혼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침략자들에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의 영혼을 담는 그릇인 우리말을 유지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보존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침략자에게 희생을 당한 그를 대한민국과 우리국민이 잘 선양을 하였는가? 답은 그렇지를 못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장 크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묘소이다. 현재 그의 묘소는 불행하게도 남의 땅에 있다. 남의 땅에 이윤재 선생을 계시게 함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과정을 알리고자 한다.
이윤재 선생의 아들 이원갑이 1943년 12월 초에 아버지를 뵈러 함흥감옥에 면회를 갔다. 간수가 머뭇거리다가 이윤재 선생의 사망을 알려 주었다. 이원갑은 아버지를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담아가지고 경기도 광주군 방이리에 있는 집으로 모셔왔다. 이윤재 선생이 생전에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 근처의 야산(방이리 산 28번지)에 봉분도 없이 가매장하였다.
해방 뒤 함흥감옥에서 나온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동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봉분도 없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제대로 이윤재 선생을 안장하려고 앞장섰다.
1946년 4월 6일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사회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지금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유족 주택 부근 산상에서 고 이윤재 선생 이장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봉분 옆에 묘비도 세웠다. 묘비의 3면에는 순 한글로 이윤재 선생의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장식 이후에야 이윤재 묘소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업을 하던 셋째 사위가 그만 사업의 실패로 장인 이윤재 선생 묘소와 집터를 남에게 매도하고 말았다. 6·25전쟁 때 대구에 거처를 정한 셋째 사위는 장인이 남긴 산과 집터를 매도하여, 거기서 남은 돈을 바탕으로 장인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1973년 봄에 셋째 사위는 장인의 묘소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산 48번지(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동)로 다시 이장하였다. 현재 마천산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다사읍은 대구에서 변두리에 있어 이윤재 선생의 묘소로 부적당한 장소였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위가 또 사업에 실패하여 장인의 묘소까지 다시 남에게 매도한 데서 발생하였다. 묘소라도 분할 측량을 하여 온전히 남겨두었어야 했는데 그렇게도 못하였다. 그 뒤 사위는 장인의 묘소도 지키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현재는 외손자가 묘소를 돌보고 있으나, 임야 주인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이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가 알아보니 외손자도 건강이 좋지 못해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2월 필자가 선생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 무덤 주변을 멧돼지가 파헤쳐 놓아 보기에도 민망하였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이윤재 선생의 경우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안장함이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나라의 독립에 헌신한 분인데, 그의 묘소를 이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국가보훈처 등 정부기관이 나서서 이윤재의 묘소를 조속히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데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다.
올해는 이윤재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숭덕학교 교원시절에 3·1운동을 주도하였기에,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기에,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감옥살이를 다시 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시기의 이윤재독립운동가 이윤재 모습 ⓒ 이윤재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민재호, 「이윤재 선생님의 조국애」, <경신>42, 1985)
그러면서 그는 조선어 교과목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사며 태극기며 독립운동사를 틈틈이 가르쳤다. 이처럼 그는 투철한 항일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윤재 선생은 1930년대에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동지들과 함께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제로부터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그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중진이었던 이윤재 선생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10월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일제 형사들로부터 매일 난타를 당한 것도 모자라 6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살아서 감옥에서 풀려나기 어려울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다.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12월 8일 옥사하였다. 이윤재 선생은 이렇게 일생 동안 우리 말글을 연구하며 민족혼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침략자들에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 <한글>지 표지 모습.이윤재 선생이 편집하여 발행함 ⓒ 조선어학회
가장 크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묘소이다. 현재 그의 묘소는 불행하게도 남의 땅에 있다. 남의 땅에 이윤재 선생을 계시게 함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과정을 알리고자 한다.
이윤재 선생의 아들 이원갑이 1943년 12월 초에 아버지를 뵈러 함흥감옥에 면회를 갔다. 간수가 머뭇거리다가 이윤재 선생의 사망을 알려 주었다. 이원갑은 아버지를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담아가지고 경기도 광주군 방이리에 있는 집으로 모셔왔다. 이윤재 선생이 생전에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 근처의 야산(방이리 산 28번지)에 봉분도 없이 가매장하였다.
해방 뒤 함흥감옥에서 나온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동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봉분도 없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제대로 이윤재 선생을 안장하려고 앞장섰다.
1946년 4월 6일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사회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지금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유족 주택 부근 산상에서 고 이윤재 선생 이장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봉분 옆에 묘비도 세웠다. 묘비의 3면에는 순 한글로 이윤재 선생의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장식 이후에야 이윤재 묘소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업을 하던 셋째 사위가 그만 사업의 실패로 장인 이윤재 선생 묘소와 집터를 남에게 매도하고 말았다. 6·25전쟁 때 대구에 거처를 정한 셋째 사위는 장인이 남긴 산과 집터를 매도하여, 거기서 남은 돈을 바탕으로 장인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1973년 봄에 셋째 사위는 장인의 묘소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산 48번지(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동)로 다시 이장하였다. 현재 마천산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다사읍은 대구에서 변두리에 있어 이윤재 선생의 묘소로 부적당한 장소였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위가 또 사업에 실패하여 장인의 묘소까지 다시 남에게 매도한 데서 발생하였다. 묘소라도 분할 측량을 하여 온전히 남겨두었어야 했는데 그렇게도 못하였다. 그 뒤 사위는 장인의 묘소도 지키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현재는 외손자가 묘소를 돌보고 있으나, 임야 주인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이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가 알아보니 외손자도 건강이 좋지 못해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2월 필자가 선생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 무덤 주변을 멧돼지가 파헤쳐 놓아 보기에도 민망하였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소재의 이윤재 묘소.무덤 뒷면에 멧돼지가 파헤친 모습이 보임. ⓒ 박용규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이윤재 선생의 경우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안장함이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나라의 독립에 헌신한 분인데, 그의 묘소를 이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국가보훈처 등 정부기관이 나서서 이윤재의 묘소를 조속히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데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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