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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영프로를 알리던 '삐라'의 추억

옛날 영화 삐라, 포스터, 할인권은 어떻게 쓰였을까?

등록|2013.03.16 15:27 수정|2013.03.16 15:27
"항상 저희 극장을 애용해주시는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극장 가두 선전반입니다. 기대하고 기대하시던 영화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 오늘부터 당 극장에서 상영될 예정입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과 스릴의 결정판 <쌍무지개 뜨는 언덕>, 오늘은 저녁 일찍 드시고 가족동반 해서 만장에 성황을 이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쿵작쿵작···."

위는 '영화'보다 '활동사진'이 더 귀에 익숙했던 1950년대 군산시 극장들의 영화 상영 거리홍보 멘트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 기호를 작대기로 표기할 정도로 문맹자가 많았던 시절이어서 극장의 거리선전은 효과가 컸다.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와 상영 시간 등 주요 정보가 입소문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 골목집 안방까지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1960년 군산에는 군산극장(군산좌), 남도극장(희소관), 현대극장, 가설극장 등 네 곳이 있었다. 그러나 거리선전은 군산극장과 남도극장 두 곳만 했다. 현대극장과 가설극장은 재개봉관이어서 거리선전을 하지 않았는데, 개봉관이라고 해서 프로가 바뀔 때마다 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인기 배우가 출연하는 '버라이어티 쇼'나 기획·제작 때부터 화제가 됐던 영화만 했다.

▲ 1950년대 군산 시내에서 영업하던 7인승 택시(1959년 촬영) ⓒ 조종안


극장들은 거리선전 때 군용 지프를 재생한 7인승 택시를 이용했다. 차에서는 3~4명의 밴드가 신나는 곡을 연주하였고, 배우가 탑승할 때도 있어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다. 어쩌다 택시가 서면 영상으로만 보던 배우 얼굴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금방 에워쌌다. 구경꾼이 겹겹이 싸는 바람에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배우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행해졌던 거리선전은 일제강점기부터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동네를 빙빙 돈다'는 의미의 '마찌마와리'(町廻)라 불리었으며 영화 제목을 적은 깃발이나 악극단 깃발을 든 아이들이 앞서고, 악대와 배우가 그 뒤를 따르면서 작품을 알리는 식이었다고 한다. 하반영(96) 노(老) 화백의 경험담을 들어본다.    

"완구점에서 일하던 열네댓 살 때 희소관(남도극장)이나 군산극장에 새 굿(영화·연극)이 들어오면 삐라를 뿌리거나, 제목 깃발이 나부끼는 선전용 깃대를 들고 시내를 돌았지. 그렇게 도는 것을 '양치기'라고 했어. 돈도 받고 재미있었지. 오전에 삐라를 뿌리면 10전(錢)을 받았고, 깃대를 들고 저녁까지 돌면 10전을 더 받았어. 국밥 한 그릇에 5전씩 할 때니까 수입이 짭짤한 '알바'였지···."

용도가 다양했던 '삐라'의 추억

극장들이 거리 선전을 하던 50년대에는 도로가 좁고 대부분 비포장이었다. 더구나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택시가 천천히 달렸다. 차에서는 유리창 밖으로 삐라(광고지)를 한주먹씩 뿌려댔다. 당시에는 삐라가 선물이나 마찬가지여서 택시가 지나가는 동네 꼬마들은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흙먼지도 마다치 않고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경비행기를 이용해서 삐라를 뿌리기도 했다. 그때는 별난 굿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시내가 들썩했다. 수백, 수천 장의 삐라가 하늘하늘 춤추며 함박눈처럼 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사람들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펴지지 않은 삐라 무더기가 바람을 타고 금강(錦江)으로 떨어질 때는 여기저기에서 탄식 소리가 들리기도.

삐라는 아이들은 물론 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에게는 딱지 만드는 재료가 되었으며, 어른들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연초를 말아 피웠기 때문이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화장지로도 그만이었다. 변두리 가난한 움막집들은 모았다가 벽지로도 사용했다. 흑백으로 인쇄된 영화의 주연 배우와 멋진 '베스트 신'을 보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 상영은 신문광고를 통해서도 홍보를 했는데, 50년이 넘었음에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1957년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잠자리에 누우면 항상 장롱 위에 얹어놓은 밥상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부의 사나이 게리 쿠퍼와 미모의 잉그리드 버그만 얼굴이 밥상을 싼 신문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던 것.

남녀 고등학생들이 탐내던 '영화 포스터'

▲ 군산의 어느 대폿집 냉장고에 붙여놓은 영화 <전쟁과 평화> 포스터 ⓒ 조종안


1950년대 극장들은 신문광고, 거리 선전, 삐라 살포 등 홍보를 다양하게 했다. 그중 비용이 가장 저렴하면서도 효과가 컸던 홍보는 천연색으로 인쇄된 포스터였다. 화려하고 멋진 남녀 배우 모습과 액션과 스릴 넘치는 장면이 인쇄된 영화 포스터는 남녀 고등학생들이 보관하고 싶어 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장면이 담긴 포스터를 공부방에 걸어놓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대부분 학생은 외국의 미남미녀 배우를 좋아했는데, 단골 빵집이나 동네 가게 주인에게 부탁하거나 슬쩍(?)해서 반공영화의 전쟁 장면이나 김지미·최무룡 부부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포스터를 걸어놓는 학생도 있었다.

상영을 예고하는 영화 포스터는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대중음식점이나 다방, 당구장, 제과점, 이발소, 미장원, 자전거포, 동네 빵집, 재래시장 입구, 창고 벽 등에 붙였는데 주인과 언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쩌다 포스터를 욕심낸 손님이 포스터를 몰래 떼어가기 때문이었다.  

형님과 함께 사용하던 내 공부방 벽에도 나탈리 우드·워런 비티 주연의 <초원의 빛> 영화 포스터가 몇 년 동안 걸려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형님이 어디선가 구해왔는데, 남녀 배우가 포옹하는 장면이어서 아버지에게 혼나는 바람에 한동안 떼었다가 고개를 들어야 쳐다볼 수 있도록 천장 바로 아래에 붙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영화 마니아들에게 인기 최고였던 '할인권'

영화 포스터는 세 사람이 한 팀을 이뤄 붙이고 다녔다. 그중 우락부락하게 생긴 스무 살 남짓 청년은 붙이는 장소를 알려주는 팀장, 17~18세 정도의 소년은 포스터를 벽이나 유리창에 붙이는 행동대원, 13~14세의 코흘리개 꼬마는 풀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형들을 따라다녔다. 팀장이 꼬마에게 굼뜨다고 욕하면서 신경질 낼 때는 안쓰럽게 보이기도.

다방이나 식당에 영화 포스터를 붙이려면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는 청년은 물론 꼬마도 인기가 좋았다. 왜냐면 그들이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할인권'을 한주먹씩 쥐고 다니면서 포스터를 붙인 가게 주인들에게 2~3매씩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광들은 꼬마에게 빵을 사주면서 할인권을 얻었다.

할인권을 '반액권', '포스터 권' 등으로도 불리었는데, 극장 매표구에서 입장권을 구매할 때 입장료의 50%를 할인해주었다. 그러니 인기가 좋을 수밖에. 그러나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늘고, 이용자가 많아지자 극장은 프로를 한정해서 20%~30%만 감해주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할인권이 사라지는 날까지 그 인기는 식지 않았다.

요즘엔 여드름이 덕지덕지 했던 사춘기 시절 가슴을 뜨겁게 달궈주었던 포스터도 보기 어렵게 되었고,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발이 닿도록 뛰어다니던 삐라도, 아버지 단골 이발소로 심부름 다니며 얻어오던 할인권도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좋은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헷갈릴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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