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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가수' 생가가 문화재?... "그는 여기 안 살았다"

[단독] '근대문화유산' 지정된 남인수 생가, "계부 본처의 집" 증언

등록|2013.03.28 11:12 수정|2013.03.28 11:15
문화재청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53호'로 지정했던 경남 진주시 하촌동 소재 '남인수 생가' 관련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 남인수가 그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자라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화재 지정 취소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와 함께 진주시 하촌동(일명 '드무실') 출신의 80~90세 노인들로부터 확보한 증언에 따르면, 문화재로 지정된 '남인수 생가'라고 하는 집은 남인수 계부의 본처가 살았던 집으로 남씨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가요 황제'로 불리던 남인수(南仁樹, 1918~1962)의 생가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때는 2005년 1월이다. 집은 본채와 사랑채, 2개 건물로 되어 있는데, 슬레이트 지붕이다.

▲ 경남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남인수 생가' 안내판과 집. ⓒ 윤성효


▲ 문화재청은 2005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집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대문 앞에 '남인수 생가'와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 윤성효


집 앞에는 '예술인 남인수 생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1915년 건립. 남인수는 … 시대 감각에 잘 맞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경남 서부지역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형식을 취하였으며, 사랑채의 구조와 입면에는 근대적인 건축 기법 사용하였다"고 설명해 놓았다.

현재 집 안을 보면 본채 방문 위에는 남인수의 사진과 함께 <애수의 소야곡> 악보가 걸려 있다. 집 대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으며,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 건물의 기반은 모두 시멘트로 보수공사가 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도 흙벽에 시멘트로 보수가 돼 있다.

개가한 어머니따라 강씨 문중으로... 친일 행적 뚜렷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장화방)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아버지 '강영태')에 들어갔고, 이름도 '강문수(姜文秀)'로 바꿨다.

남인수는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수로 데뷔했고, 1938년 <애수의 소야곡>을 불렀다. 그가 가수로 데뷔하기 전의 경력은 여러 설이 분분한데,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거나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으로 올라갔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런데 남인수는 친일(일제부역) 행적이 뚜렷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수록했다. 그가 부른 '친일 군국가요'가 많은데 <강남(江南)의 나팔수> <남쪽의 달밤> <낭자일기> <병원선> <이천오백만감격> <혈서지원> 등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1942~1943년 사이에 불렀다.

▲ 문화재청이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던 '남인수 생가'라는 집의 본채에는 지금 남인수의 사진과 <애수의 소야곡> 악보가 걸려 있다. ⓒ 윤성효


<강남의 나팔수>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약상을 찬양한 노래고 <남쪽의 달밤>과 <낭자일기> <이천오백만 감격>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기념하는 노래다. <혈서지원>은 1943년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조선인들이 혈서를 써서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그는 내선일체를 주장한 영화 주제곡 <그대와 나>(1941년(?)>를 장세정과 불렀는데, 이 영화는 대표적인 친일영화다. 해방 이후 남인수는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 군위문 활동(1950년)에 참여하고, 대한레코드가수협회 회장(1958년), 한국가수협회 회장(1961년),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1961년) 등을 지냈다.

남인수팬클럽에서 신청... 진주시는 당시 몰라

남인수 생가는 어떻게 근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을까. 문화재청은 2005년 '남인수 팬클럽'으로부터 서류를 제출받아 지정했다. 집이 소재하고 있는 진주시라든지, 강씨 문중, 남인수 후손 등이 신청했던 게 아니다. 남인수 후손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문화재청에서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던 '남인수 생가'의 현재 모습이다. ⓒ 윤성효


문화재청이 '남인수 생가'와 관련해 확보하고 있는 증거자료는 많지 않다. 1926년 학적부(진주제2공립보통학교, 현 봉래초교)가 있는데, 거기에는 주소가 '진주시 평안동(지금의 하촌동)'으로 되어 있고 아버지는 '강영태', 어머니는 '장화방'이라고 되어 있다. 집 주소에 정확한 번지가 나와 있지 않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 진주지역 호적부 자료는 소실되어, 남인수의 당시 호적자료는 찾을 수 없다. 이는 문화재청이 '남인수 팬클럽'의 신청에만 근거해 구체적인 증거자료나 증언을 확보하지 않고서 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신인사 2명 "생가는 계부의 본처가 살았던 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남인수 생가의 문화재 지정은 무효"라며 "남인수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남인수는 생모가 강씨 문중에 개가하면서 이름을 개명했기에, 남인수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생가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고 밝혔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와 <오마이뉴스>는 진주시 하촌동 출신의 팔순·구순 2명의 인사로부터 남인수와 관련한 증언을 들었다. 지금 '남인수 생가'라고 하는 집은 남인수 계부의 본처가 살았던 집이었다는 것.

팔순의 인사는 "지금 생가라고 하는 집은 남인수 아버지의 본처가 살던 곳이다, 남인수는 그 집에서 태어나지도 살지도 않았다"면서 "남인수의 어머니인 '장화방'은 인물이 좋았고, 당시 마을 어귀에서 주막집을 했다"고 말했다.

구순의 인사도 비슷하게 증언했다.

"나는 어렸을 때 남인수와 같이 자라고 놀기도 했다, 남인수와 친했고, 남인수 노래도 좋아했다. 남인수의 생모가 주막집을 했는데, 아버지의 본처가 살던 집에서 같이 살지도 않았다."

▲ 문화재청은 2005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집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대문 앞에 '남인수 생가'와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 윤성효


▲ 문화재청은 2005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집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대문 앞에 '남인수 생가'와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 윤성효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이기동 지회장은 "마을 출신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인수의 생모가 강씨 문중으로 개가하면서 이미 출생한 남인수를 강씨 문중으로 데리고 들어갔기에, 생가에서 출생했다고 볼 수 없다"며 "생가는 남인수 계부의 본부인만 거주했다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집은 현 소유주가 구매(1994년) 뒤 주택 전체를 재건축 수준으로 수리했다, 원형 그대로일 때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고 이를 전제로 지정되어야 함에도 원칙에서 어긋나 있다"며 "사랑채는 구입 당시 없었던 것을 현 소유주가 새로 건축한 것이며,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검증이 부실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진주시는 '남인수 생가 정비'를 위해 지난해 예산 1억3000여만 원을 배정했다가 올해로 이월해 놓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정비 계획을 보류할 것을 진주시에 요청한 상태다.

문화재청 "생가 가치는 다시 알아보고 판단"

문화재청 담당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일괄 등록할 때 함께 지정했던 것인데, 당시 팬클럽에서 낸 서류를 보고 했다, 당시 학적부도 집의 번지가 나와 있지 않고, 호적자료는 소실되어 없는 상태"라며 "다른 사례이기는 하지만,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가 취소된 사례가 한 건 있었다, 남인수 생가의 가치에 대해서는 다시 확인해 보고 난 뒤에 판단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진주시청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당시 문화재로 지정할 때 문화재청에서 일방적으로 했다, 당시 진주시에서 신청하거나 관련 자료를 냈던 사실이 없다"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지적에 따라 사실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 문화재청은 2005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집을 '남인수 생가'라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는데, 요즘은 대문이 닫혀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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