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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묘소를 찾는 93세 노인의 사연

'비운의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와 김수임 할머니

등록|2013.04.03 11:54 수정|2013.04.03 21:43
어김없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한 달에 두 차례 영원(英園)을 찾아 나선다. '비운의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 4월 30일 87세로 생을 마감하고 '영원'에 잠든 이후 햇수로 25년째 이어 온 참배길이다.

▲ 93세의 노령에도 매달 2차례씩 이방자 여사의 묘소를 찾는 김수임 할머니. ⓒ 최육상


4월 1일 또 다시 '영원'을 찾아 간 주인공은 1921년생으로 올해 93세이신 김수임 할머니. 이방자 여사 서거 24주기를 한 달여 앞둔 지난 3월 17일 일요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위치한 할머니의 주공아파트를 찾았다.

"1965년 비전하(할머니는 이방자 여사를 이렇게 부른다)를 처음 만났어요. 이듬해 '자행회'가 발족됐을 때 비전하의 권유로 창립 이사를 맡으면서 함께 전력을 다해 봉사할 것을 굳게 맹세했지요. '병신자식의 효를 본다'는 말처럼 농아인 장남 덕분에 고귀한 신분이면서도 파란만장한 생을 사시는 비전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참된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었죠."

장애인 장남이 맺어준 이방자 여사와의 인연

할머니와 이방자 여사의 첫 만남은 말을 못하는 장애를 지닌, 할머니의 장남 덕분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 늦가을, 이방자 여사가 부군인 영친왕의 복지사업 뜻을 받아 특수학교 견학 차 할머니의 장남이 교사로 근무하던 수원농아학교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할머니는 일본말이 능숙했고, 중국에서 일본인과 같은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일본 음식도 곧잘 만들어 이방자 여사와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고 한다. 더욱이 복지사업을 구상하던 이방자 여사에게 할머니는 '장애인 교사'의 어머니로서 대단한 열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첫 눈에 인정받았다고.

이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967년 심신 장애아를 위한 복지단체인 자행회(慈行會)를 발족시켰다. 1971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명휘원(명휘는 영친왕의 아호)을 설립하는 등 그 당시 개념조차 정립이 안 돼 있던 '장애인 복지와 사회복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 아파트 내부 벽면에는 이방자 여사와 관련된 사진, 그림, 장식 소품 등이 단출하게 장식돼 있다. ⓒ 최육상


할머니가 사시는 아파트 내부는 단출했다. 집 안 곳곳에서 이방자 여사와 관련된 흔적이 묻어났다. 이방자 여사의 빛바랜 사진과 그림, 할머니가 직접 만든 장식 소품 등등. 그리고 눈도 밝고 솜씨도 좋아 수십 년째 손수 옷을 해 입는 모습에서는 이방자 여사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소탈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인터뷰를 위해 소음을 제거하고자 거실의 TV를 끄자 안쪽 방에서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으로 향하자 머리 희끗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얼떨결에 "누구시죠? 남편 분?"이라고 묻자, 할머니는 "남편은 무슨… 아들이야"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 보니 TV 옆에 낡은 팩스가 놓여 있어 의아했는데, 말 못하는 아들을 위한 용도였다.

▲ 족히 수십년은 돼 보이는 낡은 팩스기. 말 못하는 장애를 입은 장남을 위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왼쪽 옆,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금혼(결혼 50주년)기념으로 받은 시계가 있다. 1970년 4월 28일이라는 문구가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 최육상


할머니는 이방자 여사와의 첫 만남부터 계속되는 참배에 대한 소회를 풀어 지난 1월 15일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할머니는 이방자 여사와 얽힌 여러 가지 일화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본의 아니게 일생을 두 나라 국민으로 일본에도 한국에도 성(誠)을 다하신 그분을 곁에서 25년 동안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고, 아껴주신 고마움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하며 고집쟁이 내 인생의 역사를 바꾸어주신 덕분에 오늘도 남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나날이 나이를 잊고 힘에 겨운 목표를 향해 기적을 바라며 살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82세 최고령 통역 자원봉사 기록

할머니의 봉사 정신은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며 빛을 발했다. 특히 77세의 고령에도 1997년 열린 무주·전주동계유니버시아드경기대회에 일본어 통역 자원봉사를 자청해 일본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수원경기장에서 역시 일본어 통역 자원봉사를 능숙하게 해내며 최고령 통역 기록을 82세로 또 다시 바꾸었다.

▲ 1997년 무주전주동계유니버시아드, 2002년 한일월드컵 등에서 자원봉사하며 사용했던 표찰. 할머니는 각각 77세, 82세 고령에 일본어 통역을 했다. ⓒ 최육상


일본에서 황족으로 태어난 이방자 여사와 나라 잃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김수임 할머니의 삶은 태생부터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장애인 복지 실현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하면서 극적으로 닮아 간다.

일본 메이지왕의 조카딸 나시모토 마사코에서 대한제국 의민 황태자비가 된 이방자 여사는 광명시에 명휘원과 명혜학교, 수원에 자혜학교를 각각 설립해 농아와 소아마비 등 지체부자유 아동을 위한 복지와 교육 사업에 온 생애를 바쳤다. 일본 황족의 화려한 삶 대신 자선사업가로 힘겨운 한 평생을 살다간 이방자 여사에게는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주어졌다.

이방자 여사는 생전에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묻힐 곳은 한국"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영원'에 1970년 먼저 타계한 부군 곁에 잠들어 있다. 아들 이구 공은 영원의 오른쪽 건너편에 묻혔다.

친일파 낙인에 서러운 눈물 흘리기도

▲ 김수임 할머니는 지난 1월 15일 펴낸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를 이방자 여사가 잠든 '영원'에 올렸다. ⓒ 최육상


김수임 할머니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다. 장애인 아들을 둔 탓에 척박하기만 했던 장애인 복지를 일구느라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립농아학교를 졸업한 장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그 당시만 해도 생각하기 힘들었던 장애인 교사로 취직시켰다. 그리고 장남의 학교에서 극적으로 이방자 여사를 만나 봉사를 실천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 동안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서러운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기도 했다. 이방자 여사 이야기를 하고 묘소에 참배하고 전시회를 통해 추모하는 모든 행위들이 그런 억측을 낳았다고 한다. 더욱이 어느 대학 교수는 개성 출신인 할머니를 향해 "배일(排日) 정신이 전국에서 제일가던 송도 개성인이면서 왕족을 받든다"고 비난하기도 했단다. 이에 대해 할머니는 책에서 이렇게 하소연한다.

"비전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미흡한 내가 그 어른의 뜻을 받들어 그동안 많은 후원을 받아온 일본과의 교류에도 전력을 다해 진정한 교류의 길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실로 그분 영혼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여생을 외원의 신분으로 한일 교류에 전력을 다할 결심이다."

이방자 여사 생전 25년과 사후 25년, 그 질기디 질긴 인연의 끈을 할머니는 50년째 내려놓지 않는다. 할머니는 오늘도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고 '영원'을 향해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들고 정정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나이 어린 황태자를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식 교육을 시켰어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두 분은 황태자와 일본 황족의 조합이라는 정략결혼을 당했지요. 전쟁 후에는 신민(臣民)의 신분으로 강하된 뒤 귀국조차 이승만 대통령의 저지로 여의치 못했어요. 비전하는 1963년에서야 의식도 없는 영친왕을 모시고 귀국했어요. 그런데 한국의 장애인복지를 위해 온갖 고난만 겪다가 완성도 못 보시고… 두 분은 그렇게 영원에 잠들어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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