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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 25만원에 대저택에 살았어요

[기획- 메콩의 햇빛⑦] 라오스 시골마을에서 월세방 얻어 살기

등록|2013.04.21 10:35 수정|2013.04.23 10:04
오마이뉴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착한여행과 함께 라오스 산간학교에 햇빛발전을 지원하는 공동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2009년부터 꾸준히 라오스 산간학교에 태양광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민족이 사는 메콩강 유역 산간 학교 학생들은 하루에 10km이상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합니다. 이들 산간학교 기숙사에 지원되는 태양광 시스템은 아이들이 안정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라오스 산간학교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햇볕발전 이야기에 오마이뉴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라오스 읍내에 있는 부잣집. 가까이 넓은 논과 채소를 키우느 밭이 있고, 물고기를 키우는 연못을 두고 각종 과일나무들을 주변에 심어 거의 울타리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집을 짓는 게 라오스 전통의 주거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영란


이상한 '라오스 엽서' 한 장 탓에 어딘지 모를 시공간을 떠돌던 내 시선이 이제 여기 발밑으로 잡아 묶인다. 당장 다섯 달을 살 집으로 짐을 옮겨야하기 때문이다. 노트북과 사진기, 전화기 두 대(하나는 한국에 쓰던 것 그대로 로밍해온 전화기, 다른 하나는 2007년 파견됐을 때 처음 사서 쓰던 라오스 전화기), 라오스어 사전 두 권을 넣은 묵직한 배낭을 빼고 화물로 부쳤던 큰 가방만 무려 19.8kg이다. 한 달을 넘게 그걸 이리저리 끌고 다녔더니 이젠 손잡이 부분까지 뜯어져나가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휴우, 이 무거운 짐들을 내일 그 뜨거운 햇볕 속에서 또 어떻게 옮겨야 하나!

3월 한 달은 지금까지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한 5개 산골학교와 앞으로 일을 함께 해야 할 라오스국립대학교(NUL), 라오스재생에너지연구소(LIRE)가 있는 수도 위양짠을 오가느라 집을 구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틈틈이 싸이냐부리 읍내에 있을 동안 아짠(본래 강사나 교수를 뜻하나, 보통 교사들을 부를 때도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많이 쓴다)들에게 미리 부탁을 해 두었다. 싸이냐부리 같은 시골 읍내에서는 집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오스에서 월세 방 구하기는 이번이 두 번째. 2007년 해외봉사단원(KOICA)으로 처음 라오스에 왔을 때도 2년을 살 방을 구해야 했다. 전세는 한국만의 독특한 임대방식이니 당연히 월세로. 그런데 그때 이 시골 싸이냐부리에서는 방을 임대하는 집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저택같이 큰 집 한 채를 통째로 임대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몇 건 있을 뿐이었다. 별 수 없이 침실 4개, 화장실 2개, 거실 2칸, 바깥 부엌, 안 부엌에 멋진 현관 계단까지 갖춘 집을 얻어 살았다.

이곳은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서 그런지(면적은 한반도보다 크면서 인구는 1/10정도니 말이다) 열 명 가까이 되는 대가족이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게 보통이어서 그런지, 대나무와 갈대로 짓는 집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라오스 집들은 아주 널찍널찍하다. 좀 심하게는 거실에서 배드민턴을 칠 수 있을 정도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책에 실은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라오스에서 고된 '봉사'는 안 하고 호사스럽게만 지낸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다. 또 그런 거래가 거의 없다보니 대략 정해진 가격도 없어서, KOICA에서 라오스 단원 주거비로 정한 250달러를 주기로 해서 월세 가격을 그렇게 정했다. 집이 좀 크긴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지나고 보니 그건 좀 과한 가격이긴 했다. 2007년 공무원 초봉이 50달러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때 싸이냐부리 같은 시골에서는.

라오스 '줄방'에 살림 차리기

▲ 라오스 산골마을에 있는 보통의 나무집. 저지대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우기와 가축을 포함한 동물의 출입을 막기 위해 지면에서 높이 올려 2층 구조로 집을 짓는다. ⓒ 이영란


그런 싸이냐부리가 변했다. 빠듯한 연구소 재정을 알면서 올해 다시 한 달에 250달러짜리 집에서 지내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이제 공무원(KOICA 단원은 한국에서의 신분은 자원활동가, 민간인이지만 라오스에서 신분은 관용여권이 증명하듯이 한국 공무원이다)이 아니라고, 돈이 없다고 앓는 소리를 해가며 아짠들에게 100달러 이하짜리로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화요금 충전카드도 살겸 아짠 쌩짠(달빛이라는 뜻. 그는 휴대전화기, 가전제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부자로 믿따팝 중학교의 평교사지만 학교 대소사를 챙기는 실질적인 물주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마음이 더 큰 부자다)네 가게로 갔다. 나를 보자마자 아짠이 기억이 났는지 한군데 전화를 했다. 바로 50만낍(65달러 정도)짜리가 있는데 보겠냐고 한다. 아이고, 나의 앓는 소리가 무색하다. 그런데 아자, 신난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정오 무렵 오겠다던 아짠 껠라컨(믿따팝 중학교 영어 교사)이 오전11시도 안 됐는데 왔다. 아짠의 작은 오토바이 하나로는 나와 내 몸무게에 필적하는 짐을 한꺼번에 옮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짐 먼저 옮기라고 큰 가방 하나를 뒷자리에 눕혀 실으니 아짠은 한 번에 옮기자며 나보고 그걸 안고 타란다. 하긴, 배기량 얼마 안 되는  작은 오토바이에 아이까지 세 명은 보통이고 네 명까지도 타는 걸 봤으니. 그래도 나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큰 가방을 안고 뒷자리에 올라앉아 혹시나 오토바이 앞이 들릴 것만 같아 불안한데, 아짠은 이불, 베개, 수건, 그릇, 물.... 아무렇지 않게 내가 사야할 살림살이들을 외고 있다. 이제 이십대 후반인데 요즘 기억력이 안 좋다며 말이다.

이번에 내가 얻은 월세는 집이 아니고 방이다. '헝태오', 말 그대로 '줄방'이다. 집이 작은 방들로만 한 줄로 나란히 붙어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내가 얻은 집은 이 두 줄방이 지붕을 서로 맞대고 있어 넓게 그늘도 만들고 비도 막을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집들은 예전엔 위양짠의 국립대 근처에 주로 있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돈 없는 학생들이 주로 사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줄방에는 가재도구는 물론 심지어 전기 설비도 없는 집들도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내 집은 훌륭하다. 침대도 있고 탁자에 의자 두 개, 선풍기, 좌변기도 있다. 근데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에어컨에 냉장고, 텔레비전은 물론 여벌의 이불과 찻잔 받침들까지 모든 게 갖춰져 있던 2007년 집에 비하면 말이다. 아짠이 줄줄 외던 것들 말고도 침대 덮개, 베갯잇은 물론이고 따로 자물쇠까지 사야했다. 그래도 하룻밤에 10달러가 넘는 돈을 들이지도 매번 무거운 짐들을 챙기고 옮기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나의 라오스 고향, 싸이냐부리의 낯선 풍경

▲ 라오스 싸이냐부리 중심가에 새로 생긴 간판 가게. 이미 만들어 기대 놓은 것은 비야라오(라오스 맥주)에서 제공하는 음식점 간판들 ⓒ 이영란


며칠 안 됐지만 나와 같이 줄방에 살면서 인사를 나눈 이웃은 겨우 다섯 가구다. 방 8개로 지붕을 맞대고 있는 줄방 말고도 바깥쪽에 5개 방이 붙어있는 한 채가 더 있는데 대부분 잠겨 있는 것만 보아서 그렇다. 내 방 바로 건너편엔 라오스 농업진흥은행 싸이냐부리 지점에 다니는 빡라이(Paklay, 싸이냐부리 도道 남쪽의 위양짠, 타이와 가까운 군(郡)) 남자가 산다. 마침 부인과 아들이 며칠 와 있었다. 내 방과 같은 줄에는 싸이냐부리 고등학교로 유학 온 남학생이 한 명, 농림부 농업국 소속으로 독일 원조기관(GIZ)과의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온 청정농업개발센터 소장 '통싸왓'이 산다. 수도 중앙부처 관료답게 말끔한 명함을 건네주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깥채에는 장거리로 엄청 큰 화물차를 운전하는 남편과 부인, 젊은 부부 두 쌍이 산다.

다른 비어 있는 방에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남자들이 홀로 살고 있는 듯 보였다. 학생이나 나처럼 읍내 안에서 이동할 때 주로 쓰는 자전거도 석 대, 가까운 군(郡) 정도까지 움직일 수 있는 오토바이도 석 대. 화물차 말고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4륜구동 차량이 다섯 대. 번호판을 보면 같은 싸이냐부리 도(道)지만 다른 군(郡)에서 왔을 싸이냐부리 번호판을 단 차가 두 대, 도시간(전국) 번호판을 단 차가 석 대다. 그럼 정말 이들은 모두 라오스에서는 꽤 잘사는 사람들이란 거다. 그리고 이젠 이 시골 소읍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일을 하러 온다는 거다.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싸이냐부리 읍내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실 몇 해 전부터 내게 감지되긴 했다. 2009년 여름 귀국 후 여섯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찾은 싸이냐부리엔 그새 중국 사람이 집단으로 가게를 연 중국 시장이 들어섰고 그 겨울엔 재래시장이 터를 옮겨 확장 신축됐다. 2010년엔 메콩 본류 최초의 댐, 싸이냐부리 댐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1만 명의 타이 노동자가 거주할 컨테이너들 양철지붕을 인 숙소들이 메콩 가까이 깊은 산속에 새로 큰 마을을 이뤘다. 댐을 위해 확장 보강된 도로를 통해선 그 공사를 위한 중장비뿐만 아니라 타이 상인들, 댐 건설노동자 가족들, 보통의 관광객들도 많이 들어왔다. 2012년엔 싸이냐부리 저수지 근처에 코끼리보호센터도 만들어졌다. 거기서 활동하는 서양인 여행자, 자원 활동가들도 많이 보인다.

어느 것이 원인이든, 무엇이 먼저이든 싸이냐부리는 불과 4년 사이 무척 많이 변했다. 어느 가게든 쌓인 물건도 많아졌고 상품 유통을 위한 창고들도 많이 보인다. 한창 상점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는 커다란 간판 가게도 싸이냐부리 중심가에 새롭게 열렸다. 도청보다 더 높이 지은 은행들이 두 곳이나 생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전 일구는 재와 구름같이 일어나는 먼지로 하루 종일 뿌옇게 보이는 건기의 싸이냐부리지만 전에 없이 활기가 있어 보인다.

▲ 라오스의 토종 돼지들. 50cm 정도의 크기다. ⓒ 이영란


그런데 덩달아 외지 사람들이 늘면서 함께 느는 흉흉한 소문들도 수도 위양짠을 거쳐 여기까지 번졌다. 전엔 아무렇지 않게 풀어놓고 키우던 닭과 오리, 물소, 돼지도 이젠 집안에서 잘 간수해 키워야 한다. 나도 침대하나 달랑 있는 좁은 방에 화장실 문에 바짝 붙여 자전거를 들여놓았다. 아마 이게 발밑에 잡아 묶인 나의 시선일 게다. 그래, 이렇게 나의 싸움은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한다.

☞[캠페인] 라오스 산간학교에 햇빛 발전소를 짓자
☞[착한여행] 지속가능한 여행지 만들기 프로젝트
덧붙이는 글 필자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연구원이며, <싸바이디 라오스>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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