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노르웨이오슬로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와 우토야 섬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는 무려 77명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청소년이었고 동일범이 단 한 번의 범행으로 낸 희생자 수에 있어 2차 대전 이후 최대로 기록된 대참사였다. 사건 자체보다 더 놀라운것은 노르웨이 정부와 시민의 대응이었다. 오슬로 광장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식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은 테러에는 사랑으로, 증오에는 화합으로 대답하자고 호소하는 연사의 말에 박수를 보냈다.
악이 살인을 할 수는 있어도 국민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는 총리의 추도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공포보다 자유, 열린 노르웨이 사회와 민주주의에 강한 신뢰를 갖자는 노르웨이 국왕의 호소가 슬픔에 빠진 시민을 위로했다. 노르웨이 법원은 범인 브레이비크에게 징역 10년에서 21년을 선고했다. 사형제 와 무기징역이 없는 노르웨이에서 이는 법정 최고형이었다.
국제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가 4월 10일 발표한 연례 사형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완전히 폐지한 나라는 97개국,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폐지국 8개국, 그리고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나라가 35개국 등 법적 혹은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은 140개국에 이른다.
100년 전 3개국에 불과했던 사형폐지국은 사형폐지 운동이 시작된 1976년 16개국에서 해마다 증가해 유엔회원국(193개국)의 3분의 2를 넘어섰다. 지난해 발트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가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한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고 코네티컷주가 미국의 17번째 사형폐지주가 되었으며 콜로라도, 메릴랜드, 뉴햄프셔주에서도 사형폐지법안을 준비하고 있는 등 사형폐지는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8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10년 이상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나라에 붙여지는 '사실상의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사형제는 여전히 논쟁적인 이슈임에 틀림없다. 고백컨대 사형폐지론자인 필자 역시 "너희 가족이 피해자라도 사형폐지를 운운할 것이냐"는 힐난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할 자신이 없다. 울산 자매 살해사건의 피해자 부모와 친구들이 범인을 사형시켜달라고 제출한 탄원서와 2만5천 명의 서명을받아 든 법원이 사형선고 이외 달리 선택여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는 사이코패스가 된 것이니 사회적 책임도 있다고 하면,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고다 성폭행, 납치, 살해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는 비판이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어쩌랴. 사형수의 대다수가 가족, 사랑, 희망, 꿈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극단적 환경이 꼭 살인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될 수 있다는 사실, 즉 극히 불우한 성장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극단적 범죄 행위를 저지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 국립연구회 산하 '범죄억제와 사형에 관한 위원회'는 2012년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사형이 살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는 사형이 살인율을 낮추는지, 높이는지, 아무런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이 연구가 사형에 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즉 사형과 살인율의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형폐지냐 존속이냐는 그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결단의 문제지 형사정책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며 생명권을 갖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생명을 앗아간 범죄에 대한 처벌이 똑같이 범죄자를 사형에 처해 목숨으로 되갚는 것이라면 인간 보편의 존엄성과 생명권은 설 땅이 없다. 사형제는 분노의 배출구일 뿐 두 번 다시 동일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근본해법은 못 된다. '죽음에는 죽음으로'라는 고리를 끊고 '모든 생명은 존엄하며 이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 그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되고 비전이 될 때 인간존엄은 굳건한 정치문화로 자리잡을 것이다.
악이 살인을 할 수는 있어도 국민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는 총리의 추도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공포보다 자유, 열린 노르웨이 사회와 민주주의에 강한 신뢰를 갖자는 노르웨이 국왕의 호소가 슬픔에 빠진 시민을 위로했다. 노르웨이 법원은 범인 브레이비크에게 징역 10년에서 21년을 선고했다. 사형제 와 무기징역이 없는 노르웨이에서 이는 법정 최고형이었다.
국제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가 4월 10일 발표한 연례 사형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완전히 폐지한 나라는 97개국,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폐지국 8개국, 그리고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나라가 35개국 등 법적 혹은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은 140개국에 이른다.
100년 전 3개국에 불과했던 사형폐지국은 사형폐지 운동이 시작된 1976년 16개국에서 해마다 증가해 유엔회원국(193개국)의 3분의 2를 넘어섰다. 지난해 발트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가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한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고 코네티컷주가 미국의 17번째 사형폐지주가 되었으며 콜로라도, 메릴랜드, 뉴햄프셔주에서도 사형폐지법안을 준비하고 있는 등 사형폐지는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8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10년 이상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나라에 붙여지는 '사실상의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사형제는 여전히 논쟁적인 이슈임에 틀림없다. 고백컨대 사형폐지론자인 필자 역시 "너희 가족이 피해자라도 사형폐지를 운운할 것이냐"는 힐난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할 자신이 없다. 울산 자매 살해사건의 피해자 부모와 친구들이 범인을 사형시켜달라고 제출한 탄원서와 2만5천 명의 서명을받아 든 법원이 사형선고 이외 달리 선택여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는 사이코패스가 된 것이니 사회적 책임도 있다고 하면,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고다 성폭행, 납치, 살해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는 비판이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어쩌랴. 사형수의 대다수가 가족, 사랑, 희망, 꿈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극단적 환경이 꼭 살인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될 수 있다는 사실, 즉 극히 불우한 성장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극단적 범죄 행위를 저지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 국립연구회 산하 '범죄억제와 사형에 관한 위원회'는 2012년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사형이 살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는 사형이 살인율을 낮추는지, 높이는지, 아무런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이 연구가 사형에 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즉 사형과 살인율의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형폐지냐 존속이냐는 그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결단의 문제지 형사정책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며 생명권을 갖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생명을 앗아간 범죄에 대한 처벌이 똑같이 범죄자를 사형에 처해 목숨으로 되갚는 것이라면 인간 보편의 존엄성과 생명권은 설 땅이 없다. 사형제는 분노의 배출구일 뿐 두 번 다시 동일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근본해법은 못 된다. '죽음에는 죽음으로'라는 고리를 끊고 '모든 생명은 존엄하며 이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 그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되고 비전이 될 때 인간존엄은 굳건한 정치문화로 자리잡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갈상돈님은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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