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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 꺼내 입은 어머니와 김광석 만나고 왔습니다

[관람기] 주크박스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록|2013.04.19 15:56 수정|2013.04.19 15:56

▲ 김광석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1천여회나 공연을 했다. 김광석 노래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열리는 대학로의 한 소극장. ⓒ 김대홍


"어머니, 저랑 오늘 뮤지컬 보러 가실래요?"
"그냥, 너희들끼리 가라, 나이 든 사람 끼면 젊은 사람 불편하다."
"저희는 괜찮아요."
"무슨 뮤지컬인데?"
"김광석이요."
"...."

새 옷 꺼내신 어머니의 난생 첫 뮤지컬 나들이

지난 17일, 어머니랑 난생 처음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 말을 꺼낸 건 뮤지컬을 보러 가기 4시간 전.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바빠지셨다. "잠깐만"이라고 하시더니 바쁘게 움직이셨다. 잠시 뒤 처음 보는 옷을 입고 나타나셨다.

"무슨 옷이에요?"
"응, 오래 전에 산 옷. 이런 날 입으려고 아껴 둔 옷이야."

어머니는 7년쯤인가, 8년쯤인가 산 뒤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꺼내셨다. 보기에도 근사한 옷이었다. 기억으로 평생 어머니랑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없다. 하나마나한 질문이었지만 혹시 이전에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으신지 물었고, 어머니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답하셨다. 아마 TV에서 본 것이나 연극을 본 것을 뮤지컬이라 생각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일행은 어머니 외에도 지인 네 명이 더 있었다. 여자친구를 포함해서 30대 2명, 40대 3명이었다. 어머니는 유일한 60대.

우리가 보러 가는 작품은 과거 김광석이 부른 노래가 20곡 정도 나오는 주크박스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주크박스 뮤지컬은 과거 인기 있는 대중음악을 엮어서 극으로 만든 뮤지컬). 주인공은 뮤지컬 <울지마 톤즈> 주연배우인 배우 최승열과 현존하는 가수 가운데 김광석과 가장 음색이 닮았다는 가수 박창근(극 중 이풍세)이 주연이었다.

▲ 공연 전 팸플릿을 살펴보시는 어머니. ⓒ 김대홍

평일인 수요일 저녁 공연장 안에는 절반 정도 관객이 들어차 있었다. 관계자에게 확인하니 220여 석 가운데 90여 석이 찼다고. 수요일에 제일 관객이 적게 들어온단다. 관객층은 꽤 다양했다. 20대부터 60대까지 골고루였다. 중년여성층이 의외로 많았다.

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조명이 꺼지고 배우들이 등장한 뒤 이풍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곁눈질했다. 의자에서 등을 떼는 모습이 보였다. 노래에 빨려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극은 199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연배우인 이풍세가 대학교 95학번으로 나온다. 나머지 배우들 또한 1990년대 초반 또는 중반 학번으로 나온다. 삐삐나 대형 휴대전화, 큼직한 머플러 등은 그 시대 정서를 끄집어냈다. 1996년곡인 룰라의 <3!4!>가 잠깐 들어간 것도 시대를 반영한 것으로 보였다.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게 1996년이니 그때를 기준으로 삼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김광석의 퇴장과 함께 김광석 시대가 막을 내린 시대였다. 기타와 하모니카 하나로 소극장에서 1000여 회 공연을 한 김광석을 떠올린다면 김광석 시대란 소박함, 푸근함, 따스함 등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야기는 1990년대 대학교 밴드로 활동하던 이들이 흩어졌다 재결성하는 과정을 담았다. 2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인공인 이풍세는 군대에 다녀오고 어머니가 암에 걸리는 아픔을 겪고, 아이돌 그룹에 잠시 몸을 담았다 '팽' 당하며 막노동판을 전전한다. 오해가 생겨 여자친구와 헤어지지만 결국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후원자를 만나 다시 연주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야기는 투박하고 담백하다. 특별히 기발한 반전은 없다. 무대장치는 소박하고 배우들 연기 또한 풋풋하기만 하다.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인 20대와 처음 연기에 도전하는 박창근은 잘 어울렸다. 어설퍼서 싱그럽고, 어색해하는 모습이 오히려 풋풋했다. 40대 배우가 20대를 연기하는 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건 오로지 초연배우 박창근 덕분이었다.

극이 중반을 넘어서서 1시간을 지났을 무렵 다시 어머니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의자에서 등을 뗀 상태. 눈은 무대에 '꽉' 박힌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박수를 치다, 가끔씩 눈시울을 훔쳤다.

1인 다역 '멀티맨'이 웃음 선사... 투박함이 오히려 강점

▲ 앙코르 공연을 펼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배우들. ⓒ 김대홍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는 이야기는 1인 다역을 맡은 '멀티맨'이 해결했다. 사회자·의사·기획사 사장·술집 주인·여고생·이풍세 아버지(목소리)·막노동자 등으로 나온 멀티맨은 막간 행사까지 진행하며 지루할 틈을 빼앗았다.

사람들은 멀티맨이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기대했고, 매번 기대를 배반(?)하는 모습에 큰 박수와 웃음을 보냈다. 어머니 또한 그때마다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지향하는 바는 투박함과 소박함이었다. 김광석이 부른 노래를 편곡하지 않고 이풍세의 목소리에 그대로 얹었다. 연출진이나 작가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노래와 이야기를 엮었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많은 관객들이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울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풍세역을 맡은 박창근 노래가 세 곡 들어간 것 또한 재미있는 양념이었다.

극이 끝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땠느냐고. "2시간 30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다"는 말에 어떤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풍세가 신나는 음악을 칠 때 손목으로 살짝살짝 기타를 두드리는데. 하이구. 죽겠더라."(너무 좋다는 뜻)

▲ 어머니와 함께 사진촬영을 한 박창근씨(극중 이풍세). ⓒ 김대홍

그날 공연을 보기 전 어머니와 어릴 적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몇 해 전 어머니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가했다. 그때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놀라워하며 "너는 절대 주부는 안 할 줄 알았다, 네가 얼마나 활발했는데"라고 말했단다. 그 말에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극 중 이풍세 또한 가수라는 꿈을 접고 막노동판을 전전하지만 결국 다시 밴드생활로 돌아온다. 이풍세 역을 맡은 박창근 또한 TV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작곡만으로 20여 년째 가수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벌써 3집 가수로 4집 발매를 앞두고 있다.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한 발 한 발 내디딘 점은 이풍세나 박창근이나 한몸이다. 그런 점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꿈에 대한 이야기이자,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중년들이 그렇게 뜨겁게 호응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극이 끝난 뒤 공연을 본 이들이 갖가지 소감을 털어놨다.

"1995년 김광석 공연을 봤어요. 아 그때 소극장에서 본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김광석이 떠나버린 게 참 안타까워요. 그게 벌써 20년 전이란 것도 놀랍고요."(40대 프리랜서)

"김광석 공연을 본다고 한 게 1주일 전인데, 그때부터 가슴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아, 지금도 가슴에서 바람이 불어요."(30대 주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끝난 뒤에도 어머니 표정은 여전히 상기돼 있었다. 혹시 어머니 마음에도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일까. 평생 어머니한테 한 일 가운데 함께 이번 뮤지컬을 본 게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덧붙이는 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5울 19일까지 대학로 아트센터K네모극장에서 상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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