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중국 <인민일보> 기자는 왜 불쾌해 했을까

강원도 화천, 파로호에 얽힌 이야기

등록|2013.04.19 10:44 수정|2013.04.19 10:44

▲ 대붕호를 뜻하는 대붕제 표지석, 일본은 붕자 대신 명자를 썼다. ⓒ 신광태


일본은 1944년 조선 식민지정책의 확산을 위해 화천댐을 건설했다. 발전용량 5만4천 킬로와트 급의 시설을 위해 1백여 호에 이르는 민가를 강제 이주시켰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지금 파로호로 알려진 대붕제다.

그런데 그들은 조선 산골마을에 건설한 대규모 댐의 명칭을 '대붕'이라 표기해 주는 것이 못마땅했나보다. 식민지 국가에 세운 댐에 가치 있는 명칭을 부여하면 자신들의 자존심이 깎인다고 생각한 듯하다. 고민 끝에 붕(鵬)자와 비슷한 명()자로 대신했다. 표지석에는 대명제로 써 놓고 주민들에겐 대붕제라고 말했다. 준공표식도 서기 대신 소하19년 10월로 표기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에 정통한 한상룡 박사는 "그들은 대붕제라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겠죠"라며 "이것 또한 일본 사람들의 만행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붕제 라는 표기는 大鵬堤로 써야 하는데, 자세히 보세요, 대붕제가 아니고 대명제라는 표기가 맞죠"라고 덧붙였다.

▲ 대붕과 대명의 한자표기는 비슷하나 다르다. ⓒ 신광태


지금 파로호 물속에 잠긴 마을인 수하리와 수상리는 대붕이 살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산신숭배 사상이 아닌 대붕을 신성시했다. 대(大)를 뜻하는 수컷 봉황과 암컷을 일컫는 붕(鵬)이란 새가 이 마을에 날아온 해에는 늘 풍년이 들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두 마리의 봉황이 날갯짓을 하면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았다는데 착안해 인근 마을이름도 '구만리'라 지었을 정도로 그들에게 대붕은 특별한 존재였다.

일본이 댐 공사계획을 밝혔을 때 주민들은 댐 이름에 대붕을 넣어 달라고 간청했다. 수하리나 수상리라는 마을이름은 포기 하더라도 나라를 이롭게 할 대붕이 꼭 날아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일본은 어렵게 승낙했다. 그러곤 대붕이라는 이름대신 대명이라고 표기했다. '조선 사람들이 누가 알겠나'하는 얄팍한 술수였다는 것이 많은 지인들의 설명이다.

이 표지판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86년도다. 한국전쟁 당시 물속에 수장되었던 표지석이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파로호 물을 일제히 방류하면서 발견되었다. 호수명칭이 파로호가 아닌 대붕제 즉 대붕호였다는 것도 이 시기에 알려졌다.

숱한 아픔을 간직한 호수

▲ 산속의 바다라 불리는 파로호, 숱한 아픔을 간직한 호수이다. ⓒ 신광태


해방이 된 후 이 호수의 의미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북한 치하였던 이곳 사람들에게는 의식주가 먼저였다. 편한대로 화천댐이라 불렀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정부는 화천댐 탈환에 사활을 걸었다. 북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후 복구를 위해 전기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중공군을 동원한 북한군에 유엔군은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그 결과 3만여 명에 이르는 중공군들이 파로호에 수장됐다. 이후 화천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을 크게 무찔렀다는 의미로 깨뜨릴 파(破), 오랑캐 로(虜)를 붙여 파로호라 명명하고 친필 휘호를 남겼다.

▲ 파로호,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다. ⓒ 신광태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 호수를 대붕제라는 이름 대신 파로호로 기억하게 됐다.

"이 의미가 뭔지 알면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요?"

2011년 어느 날 <인민일보> 기자를 만났다. 의미 있는 관광지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에 아무생각 없이 '파로호(破虜湖)'라 쓰여 진 전망대에 올랐을 때 그 <인민일보> 기자는 내게 상당한 불쾌감을 표했다.   

한문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의미를 쉽게 이해했던 것이다.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 또한 이데올로기 잔재로 남겨진 전쟁 역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관광기획 담당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