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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 계약직 박봉희씨, 이건 모르셨죠?

[게릴라칼럼] 정년 연장돼도 청년 일자리가 줄지 않는 이유

등록|2013.05.03 08:54 수정|2013.05.03 15:38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KBS 2TV <직장의 신>의 한 장면 ⓒ KBS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직장인들의 답답한 처지를 거침없이 풀어내며 공감을 얻고 있는 KBS드라마 <직장의신>이 마침내 '세대간 일자리 갈등'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건드렸다.

이번 주(4월29일과 30일) 방영된 9·10회에서는 입사 28년차 고정도(김기천 분) 과장에 대한 회사의 권고사직 결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다뤘다. 회사는 지난해 매출 감소를 이유로 인원 감축을 결정했고, 마케팅영업지원부에서는 정년퇴직을 앞둔 고 과장이 권고사직 대상으로 뽑혔다. 마케팅영업부 황갑득(김응수 분) 부장과 입사동기이면서도 만년 과장에 머물고 있는 고 과장은 본인의 말마따나 "있어도 없는 사람"이다.

고 과장의 권고사직 결정이 알려지자 마케팅영업부·영업지원부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회사의 갑작스런 해고 결정을 두고 비인간적 처사라며 서운함과 불안함을 드러냈다. 정규직 직원들에겐 회사란 존재가 언제든 자신들의 목에 해고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계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모두의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고 과장님은) 별일 안 하시면서 우리 월급의 4배는 더 받잖아."

5년째 이 회사 저 회사를 옮겨 다니는 스물아홉 살의 계약직 노동자 박봉희(이미도 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계약직 동생들에게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곧 있을 재계약을 앞두고 임신 사실까지 숨겨 가며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던 그녀에게 '별일 안 하는' 고 과장의 엄청난 연봉은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든 '차별'로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조심스레 희망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가령, 고 과장이 회사를 그만두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비정규직 노동자 4명이 고용불안 없이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거나, 아니면 다른 동료 1명과 함께 그토록 바라던 정직원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희망 말이다. 그녀, 박봉희의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정년 연장되면 정말 청년 일자리 줄어들까

▲ KBS 2TV <직장의 신>의 한 장면 ⓒ KBS


노동절을 앞둔 지난 4월 30일 마침 국회에서는 박봉희의 기대를 저버린 법이 통과되었다. '정년 60세 연장법'(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이 법에 따라 2016년 1월 1일부터 우선 공공기관과 대기업부터 정년이 60살로 늘어나게 된다(그렇다 해도 여전히 권고사직은 가능하다).

법은 이미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이 법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계는 곧바로 정년을 늘리는 만큼 신규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며 바짝 말라버린 청년들의 마음에 불을 당기는가 하면, 임금피크제 없는 정년연장은 있을 수 없다며 벌써부터 임금 삭감이라는 젯밥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고 있다. 언론들도 재계의 목소리를 부지런히 실어 나르며 우리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재계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보고서 <기업의 정년 실태와 퇴직 관리에 관한 연구>(하갑래 외, 2012)는 "한국의 중·고령자 고용 증가가 청년층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증거가 없어 세대간 고용 대체 가설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재계의 걱정과 달리 어느 한 계층의 일자리가 줄거나 느는 것이 다른 계층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한때 프랑스를 비롯한 OECD 나라들도 청년층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고령층의 조기 퇴직을 유도하는 정책을 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일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른바 '세대간 고용 대체 가설'은 이미 오래 전에 휴지통에 버려진 이론이다.

▲ '정년 60세 보장법' 국회 환노위 법안소위 통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23일 오후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근로자의 정년을 60세까지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정년 보장법'을 통과시켰다. 김성태 법안심사소위원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근로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의무화하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킨 뒤 박수치고 있다. ⓒ 남소연


한국노동연구원의 또 다른 보고서 <세대간 고용대체 가능성 연구>(안주엽, 2011)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보고서는 두 계층이 서로 일자리를 대체할 여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직종격리지수(0~100)'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29세의 청년층과 55세 이상의 고령층은 보건복지와 금융보험, 사업지원과 공공행정 등의 분야에서 약 70~80의 직종격리지수(100에 가까울수록 대체가 어려움)를 보이고 있다. 이는 두 계층이 주로 몰려있는 직종이 서로 다르며, 따라서 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이 펴낸 보고서 <청년층과 고령층 간 고용대체 관계 분석>(박종현 외, 2012)에도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보고서는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고령층이 청년층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통계적으로는 유의하지 않"다면서, 이는 "고령층 고용이 호조를 보인 반면 청년층 고용은 둔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재계가 걱정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처럼 얻은 좋은 법 앞에서 더 이상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성이지 말자.

계약직 박봉희가 기억해야할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경제공동체에서 스물아홉 살 박봉희들이 5년째 계약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4배나 많은 연봉을 받는 쉰일곱 살 고 과장들 탓은 아니다. 고 과장들이 사라진다고 박봉희들이 빛나는 사원증을 목에 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 과장들의 일할 권리와 박봉희들의 일할 권리는 모두 그 자체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고 과장들은 그들대로, 박봉희들은 또 그녀들대로 자기 세대의 '일할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박봉희들과 고 과장들이 같은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일은 별로 없을 테니까. 아울러 고 과장들이 더 오래 일할수록 박봉희들의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고령층 고용률이 높을수록 청년층 고용률이 유의하게 높게 나타났다. 세대간 일자리 대체설과는 달리, 대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임을 말해준다."(<OECD 20개국 청년고용과 중고령자 고용의 대체관계>, 지은정, 2012)

▲ 장주영 대전청년유니온 위원장이 21일 오후 대전 서구 타임월드네거리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미용실들의 스텝 노동착취실태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장재완


박봉희들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정년 60세 연장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던 날, 우리나라의 첫 청년세대 노조인 '청년유니온'도 고용노동부로부터 설립신고필증을 받아 정식 노동조합이 되었다. 이로써 구직자까지를 포함한 모든 청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할 권리를 위해 힘을 모을 든든한 공간이 하나 생겼다. 

동화 같은 드라마가 끝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잠 못 이루는 박봉희들이여, 혼자만 '직장의 신'이 되길 꿈꾸기보다 모두가 함께 '인간의 직장'을 만들어가는 꿈을 꾸는 건 어떨까. 비록 무슨 일이든 거뜬히 해내는 '미스 김'은 우리 곁에 없지만, 내가 손만 내밀면 기꺼이 손을 맞잡아줄 비슷한 처지의 박봉희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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