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완전히 굴복시킨 괴력, 그것은 바로...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27] <백의(白蟻)>
내가 비로소 여유를 갖게 된 것은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어서도 저 무시무시한 백의(白蟻)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이었다.
백의는 자동식 문명의 천재이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주에게는
일언의 약속도 없이 제가 갈 길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었다
그는 나같이 몸이 약하지 않은 점에 주요한 원인이 있겠지만
뇌신(雷神)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뮤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준다
질책의 권리를 주면서 질책의 행동을 주지 않고
어떤 나라의 지폐보다도 신용은 있으나
신체가 너무 왜소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고대 형이상학자들은 그를 보고 <양극의 합치>라든가 혹은 <거대한 희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19세기 시인들은 그를 보고 <도피의 왕자(王者)> 혹은 단순히 <여유>라고 불렀다
그는 남미의 어느 면공업자의 서자로 태어나서
나이아가라 강변에서 수도공사(隧道工事)에 정신(挺身)하고 있었다 하며
그의 모친은 희랍인이라고 한다
양안(兩眼)이 모두 담홍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오랜 세월을 암야(暗夜)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맏누이동생이 그를 <허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꼬워서
내가 어느 날 그에게 <마신(魔神)>이라는 별명을 붙였더니
그는 대뜸
<오빠는 어머니보다도 더 완고하다>고 하면서
나를 도리어 꾸짖는 척한다
(그가 나를 진심으로 꾸짖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의 은근하고 매혹적인 표정에서 능히 감득할 수 있었다)
―비참한 것은 백의이다
그는 한국에 수입되어 가지고 완전한 고아가 되었고
거리에 흩어진 월간 대중잡지 위에 매월 그의 사진이 게재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어느 삼류 신문의 사회면에는 간혹 그의 구제금 응모기사 같은 것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진과 기사를 볼 때마다
이것은 ≪애틀랜틱≫과 ≪하퍼스≫의 광고부의 분실(分室)이 나타났다고
이곳 저널리스트의 역습의 묘리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백의는 이와 같은 나의 안심과 태만을 비웃는 듯이
어느 틈에 우리 가정의 내부에까지 침입하여 들어와서
신심양면의 허약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를 독촉하여
「희랍인을 모친으로 가진 미국인에게 대한 호소문」과 「정신상(精神上)으로 본
희랍의 독립선언서」를 써서
전자를 현재 일리노이 주에 있는 자기의 모친에게 보내고
후자는 희랍 국립박물관 관장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무리한 요청에 대하여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은 나의 역량 이상의 것이므로 신세계극단의 연출자 S씨를 찾아가보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가지고 즉석에 거절하여 버렸다
오히려 이와 같은 나의 경멸과 강의(剛毅)로 인하여
나는 그날부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어저께 내가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가니
나의 친구들은 모조리 나를 회피하는 눈치이었다
그중의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나에게 욕을 하였다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
―백의의 비극은 그가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하였을 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1956)
수영이 쓴 작품의 최초 독자는 그의 아내 현경이었습니다. 수영은 시든 산문이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제일 먼저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현경은 집안에서 부엌일이나 다른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간에 수영에게 달려가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밥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중에라도 일단 밥솥을 불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재로 달려 들어간 현경은 자기의 뜻과는 무관하게 수영이 써놓은 글을 처음으로 보는 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경에게는 그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영이 현경에게 내놓은 원고에는 대개 깨알같이 써 놓은 글자들과 창작 과정에서 없앤 글자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현경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원고의 글자들을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이 옮겨 적는 일이었습니다. 상당한 공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요.
물론 전체가 몇 줄이 되지 않는 짧은 시는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긴 분량의 시나 산문은 정서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어린 자식들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경우도 있어서 난감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수영은 이 세상에 작품을 하나 내놓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산고'를 온 집안 식구가 함께 겪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수영은 아내 현경이 자신이 쓴 시의 첫 번째 독자여서 그랬는지, 그녀가 작품에 대해 묻는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하기도 하고, 수영이 앞장서서 그녀에게 작품 평을 요구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현경이 이 작품을 원고지에 정서할 때 일입니다. 그녀는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느껴졌지만, 제재인 '백의(白蟻)'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수영에게 '백의'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수영은 그것이 '밀가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그냥 밀가루가 아니라 미국이 우리나라에 원조용으로 들여온 밀가루라고 분명히 가려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흰 개미'라는 뜻의 '백의'는, 전 사회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버린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소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화자가 갖게 된 '여유'(1행)나 ('백의'를 향한) '사랑'(44행)은 진정한 '여유'나 '사랑'이 아닌 셈이 됩니다. 화자가 오래간만에 거리에서 만난 "어느 시인"(47행)의,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와 같은 구절에서 '백의'에 대한 화자(수영)의 부정적인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영이 1964년에 쓴 <히프레스 문학론>이라는 제목의 산문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수영은 일제 식민지에 비하면 미국의 달러 정책이 문학에서 훨씬 더 많은 조제품과 위제품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복 이후에 미국 대사관의 문화과를 통해서 나오는 헨리 제임스나 헤밍웨이의 소설 등을, 반공물이나 미 대통령의 전기나 민주주의 교본의 프리미엄으로 붙어 나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규정합니다.
수영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미국의 문학을 '국무성 문학'으로 부릅니다. 그 국무성 문학은 해방 이후 줄곧 서구문학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었지요. 그런데 수영은 우리 작가들이 그런 서구문학을 보지 않는 것을 명예처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수영은, 식민지문학을 벗어나지 못한 문학이 국무성 문학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거기에서 무엇이 자라날 수 있겠느냐고 일갈합니다.
이런 진술들을 통해 수영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저 원론적으로 미국 문화를 제대로 배워보자는 것이었을까요. 수영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주인의 언어'였습니다. 그는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당시 우리 민족의 처지와 상황을 잘 그려낼 수 있는 자유로운 언어를 바랐습니다. 그런 언어가 없는 사회는 노예의 언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시에서 '백의'로 상징된 미국 문화는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 그것은 "뇌신(雷神)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 뮤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6, 7행)줍니다. "어느 틈에 우리 가정의 내부에까지 침입하여 들어와서"(34행) '나'를 완전히 굴복시켜버리는 괴력까지 발휘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화자 스스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할 정도로 말이지요.
수영은 학창 시절부터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또한 그는 8·15 광복 이후부터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통역을 매개로 미군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영미 문학을 중심으로 번역 일에 지속적으로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수영에게 미국은 애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거대한 힘이 수영을 압도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요.
하지만 수영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가 비단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의 <히프레스 문학론>에서 특히 문단의 젊은 작가들을 향하여 '주인의 언어'로 부를 만한 "우리의 민족 문학"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영이 강조했던 문학의 현실 참여와 주체적인 민족 문학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어서도 저 무시무시한 백의(白蟻)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이었다.
백의는 자동식 문명의 천재이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주에게는
일언의 약속도 없이 제가 갈 길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었다
그는 나같이 몸이 약하지 않은 점에 주요한 원인이 있겠지만
뇌신(雷神)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뮤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준다
질책의 권리를 주면서 질책의 행동을 주지 않고
어떤 나라의 지폐보다도 신용은 있으나
신체가 너무 왜소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고대 형이상학자들은 그를 보고 <양극의 합치>라든가 혹은 <거대한 희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19세기 시인들은 그를 보고 <도피의 왕자(王者)> 혹은 단순히 <여유>라고 불렀다
그는 남미의 어느 면공업자의 서자로 태어나서
나이아가라 강변에서 수도공사(隧道工事)에 정신(挺身)하고 있었다 하며
그의 모친은 희랍인이라고 한다
양안(兩眼)이 모두 담홍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오랜 세월을 암야(暗夜)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맏누이동생이 그를 <허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꼬워서
내가 어느 날 그에게 <마신(魔神)>이라는 별명을 붙였더니
그는 대뜸
<오빠는 어머니보다도 더 완고하다>고 하면서
나를 도리어 꾸짖는 척한다
(그가 나를 진심으로 꾸짖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의 은근하고 매혹적인 표정에서 능히 감득할 수 있었다)
―비참한 것은 백의이다
그는 한국에 수입되어 가지고 완전한 고아가 되었고
거리에 흩어진 월간 대중잡지 위에 매월 그의 사진이 게재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어느 삼류 신문의 사회면에는 간혹 그의 구제금 응모기사 같은 것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진과 기사를 볼 때마다
이것은 ≪애틀랜틱≫과 ≪하퍼스≫의 광고부의 분실(分室)이 나타났다고
이곳 저널리스트의 역습의 묘리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백의는 이와 같은 나의 안심과 태만을 비웃는 듯이
어느 틈에 우리 가정의 내부에까지 침입하여 들어와서
신심양면의 허약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를 독촉하여
「희랍인을 모친으로 가진 미국인에게 대한 호소문」과 「정신상(精神上)으로 본
희랍의 독립선언서」를 써서
전자를 현재 일리노이 주에 있는 자기의 모친에게 보내고
후자는 희랍 국립박물관 관장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무리한 요청에 대하여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은 나의 역량 이상의 것이므로 신세계극단의 연출자 S씨를 찾아가보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가지고 즉석에 거절하여 버렸다
오히려 이와 같은 나의 경멸과 강의(剛毅)로 인하여
나는 그날부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어저께 내가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가니
나의 친구들은 모조리 나를 회피하는 눈치이었다
그중의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나에게 욕을 하였다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
―백의의 비극은 그가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하였을 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1956)
수영이 쓴 작품의 최초 독자는 그의 아내 현경이었습니다. 수영은 시든 산문이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제일 먼저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현경은 집안에서 부엌일이나 다른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간에 수영에게 달려가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밥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중에라도 일단 밥솥을 불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재로 달려 들어간 현경은 자기의 뜻과는 무관하게 수영이 써놓은 글을 처음으로 보는 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경에게는 그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영이 현경에게 내놓은 원고에는 대개 깨알같이 써 놓은 글자들과 창작 과정에서 없앤 글자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현경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원고의 글자들을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이 옮겨 적는 일이었습니다. 상당한 공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요.
물론 전체가 몇 줄이 되지 않는 짧은 시는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긴 분량의 시나 산문은 정서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어린 자식들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경우도 있어서 난감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수영은 이 세상에 작품을 하나 내놓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산고'를 온 집안 식구가 함께 겪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수영은 아내 현경이 자신이 쓴 시의 첫 번째 독자여서 그랬는지, 그녀가 작품에 대해 묻는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하기도 하고, 수영이 앞장서서 그녀에게 작품 평을 요구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현경이 이 작품을 원고지에 정서할 때 일입니다. 그녀는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느껴졌지만, 제재인 '백의(白蟻)'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수영에게 '백의'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수영은 그것이 '밀가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그냥 밀가루가 아니라 미국이 우리나라에 원조용으로 들여온 밀가루라고 분명히 가려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흰 개미'라는 뜻의 '백의'는, 전 사회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버린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소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화자가 갖게 된 '여유'(1행)나 ('백의'를 향한) '사랑'(44행)은 진정한 '여유'나 '사랑'이 아닌 셈이 됩니다. 화자가 오래간만에 거리에서 만난 "어느 시인"(47행)의,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와 같은 구절에서 '백의'에 대한 화자(수영)의 부정적인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영이 1964년에 쓴 <히프레스 문학론>이라는 제목의 산문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수영은 일제 식민지에 비하면 미국의 달러 정책이 문학에서 훨씬 더 많은 조제품과 위제품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복 이후에 미국 대사관의 문화과를 통해서 나오는 헨리 제임스나 헤밍웨이의 소설 등을, 반공물이나 미 대통령의 전기나 민주주의 교본의 프리미엄으로 붙어 나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규정합니다.
수영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미국의 문학을 '국무성 문학'으로 부릅니다. 그 국무성 문학은 해방 이후 줄곧 서구문학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었지요. 그런데 수영은 우리 작가들이 그런 서구문학을 보지 않는 것을 명예처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수영은, 식민지문학을 벗어나지 못한 문학이 국무성 문학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거기에서 무엇이 자라날 수 있겠느냐고 일갈합니다.
이런 진술들을 통해 수영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저 원론적으로 미국 문화를 제대로 배워보자는 것이었을까요. 수영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주인의 언어'였습니다. 그는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당시 우리 민족의 처지와 상황을 잘 그려낼 수 있는 자유로운 언어를 바랐습니다. 그런 언어가 없는 사회는 노예의 언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시에서 '백의'로 상징된 미국 문화는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 그것은 "뇌신(雷神)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 뮤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6, 7행)줍니다. "어느 틈에 우리 가정의 내부에까지 침입하여 들어와서"(34행) '나'를 완전히 굴복시켜버리는 괴력까지 발휘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화자 스스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할 정도로 말이지요.
수영은 학창 시절부터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또한 그는 8·15 광복 이후부터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통역을 매개로 미군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영미 문학을 중심으로 번역 일에 지속적으로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수영에게 미국은 애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거대한 힘이 수영을 압도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요.
하지만 수영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가 비단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의 <히프레스 문학론>에서 특히 문단의 젊은 작가들을 향하여 '주인의 언어'로 부를 만한 "우리의 민족 문학"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영이 강조했던 문학의 현실 참여와 주체적인 민족 문학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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