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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부터 '을'로 살았던 나, 지금도 '을'

[공모 - 나는 을입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로 지내면서 생각나는 사환 시절

등록|2013.05.18 11:46 수정|2013.05.18 11:46

▲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장 안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참석자


'사환'이란 말을 아십니까? 제가 중학교 졸업하던 시절인 80년대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대기업 현장직,사무직 정규직은 모두 '사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울산에서 자라고 직장 구해 다니고 지금까지 울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중학교 졸업 하면서 10대 후반 나이로 돈벌이 할 길을 찾다가 누군가 현재 울산 동구에 있는 대기업 현대중공업(그땐 조선소라 불렸음)에서 '사환'을 모집 한다고 해서 뭔지도 모르고 서류 내고 면접 후 출근하라기에 '사환'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환'이란 '사원'의 잡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비정규직 일자리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야간반이라도 다니려고 사환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환이 하는 일은 도면을 복사 하거나 서류를 인쇄해 갖다 바치거나 민원서류들을 찾아 오거나 사내 우체국에 보낼 것 보내고 찾아 올 것 찾아 오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출근 시간은 사무직과 같지만 퇴근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었습니다. 사환은 현대조선소 고 정주영 회장이 만든 학교재단 중 하나인 현대공고 야간 산업체 특별학급에 입학하여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오후 5시 30분부터 9시 넘을 때까지 4시간 수업을 했고 3년 다니면 졸업장이 수여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어떤 사원은 인간적으로 사환을 대해 주었는데 어떤 사원은 멸시하기도 했습니다. 여성 '사환'도 있었는데 어떤 여 사환은 가끔 무시 당해서 울기도 했습니다. 여성 사환은 여상을 다녔는데 사환은 퇴사하면 곧바로 학교 다니는 것도 퇴학 처분되어서 억울해도 그만 둘 수도 없었습니다. 2년은 넘게 다녀야 그만 두어도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울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못되어 그런지 2년후 차별과 무시 당하는 것이 불쾌해서 현대중공업 사환 일을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현대공고 야간특별학급 졸업장을 받은 후 쇠 만지는 일이 무서워 나무공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도 정규직을 뽑지 않아 하청업체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정규직을 뽑는다기에 서류를 제출해 보았습니다. 일용직을 다녔는데 하루 업체로 출근하면 이 공장 저 공장 필요한 일자리 소개된 곳에 가서 일하고 일당 받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도 정규직의 멸시와 조소를 많이 받으며 일했습니다. 지금도 그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1988년 1월 20일. 그날 저는 현대목재에 시급 520원 받는다 하고 정규직으로 입사 할 수 있었습니다.

정규직이면 사람 차별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없다보니 같은 또래인데도 저에게 마구 부려 먹었습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 사람들. 몇개월 일찍 입사 했다고 자기들이 할 일을 저에게 시키고 그들은 휴게실에 들어가 쉬거나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인간차별과 멸시받는 저에게 다가온 노조활동은 어쩌면 좋은 돌파구였는지도 모릅니다.

87년 8월경 현대목재도 노조가 만들어 집니다. 저는 88년 1월 초에 입사 했으나 노조가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조용필이란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취미도 특기도 없던 저는 음악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생기든 말든 저와는 상관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목재 생산직은 저의 첫 직장생활이었습니다. 여러지역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삭막하고 살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장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저는 90년대 초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됩니다.

90년대 초 노조는 있었지만 회사와 한통속인 사람이 노조를 장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영도란 사람이 나타나 "지금 노동조합은 어용이다. 갈아 엎고 민주노조 만들자"며 외치고 다녔고 많은 사람들이 그와 뜻을 같이 하여 노조민주화위원회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도 그들의 구성원에 동참하여 함께 선전물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고 출근 농성도 했습니다. 그땐 민주노조를 외치면 적색분자라 하던 공안정국이었습니다. 정경유착이란 말이 노동운동가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았을 정도로 노동탄압이 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민주노조운동 하면서 서서히 저의 의식이 바뀌어 나갔습니다. 조용필 노래를 좋아하던 저는 차츰 노동가요를 좋아하게 되었고 김소월의 진달래 꽃 같은 서정시 대신 박노해가 쓴 노동시가 좋아 졌습니다. 저는 노동운동을 접하면서 노동철학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됩니다. 한반도가 어떻게 해서 분단이 되었고 지금까지 왜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등한 입장이고 서로 계약관계이지 위아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목재에 12년 정도 다닌 것 같습니다. 1998년 IMF란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가 나돌더니 현대목재 울산공장은 통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저의 봄날도 사라집니다. 목재를 그만두고 인간시장이라 부르는 새벽노동시장을 통해 건설잡부 일도 해보고 은행 청원경찰 파견직도 해보았습니다. 말이 좋아 은행 청원경찰이지 파견경비업체가 사람을 모집하고 근무서는 형식였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파견노동을 시작했습니다.

은행점장은 잠시 앉아 쉬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고객이 오면 깍듯이 인사하고 고객이 불편한 게 있으면 친절하게 하라면서 늘 주의를 주었습니다. 제가 한눈이라도 팔면 당장 호출을 했습니다. '자기 일은 안 하고 나만 감시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1999년에서 1년 정도 그렇게 다녔는데 임금이 80여만 원 이었습니다. 파견업체가 35%를 가져간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은행 다니다가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은행 통폐합과 합병이 자주 일어 났습니다. 제가 다니던 은행이 통폐합 해서 그 점포를 없애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파견업체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그 은행 없어져요. 다른 일자리 찾아 보거나 기다리세요. 다른 일자리 생기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고용이 불안해서 은행 청원경찰은 할 게 못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고용불안 없는 회사에 취직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찾다가 들어간 회사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업체 였습니다. 2000년 7월 초 일입니다.

하청업자는 "평생 일자리 보장한다" 면서 저를 오라 했습니다. 거기도 파견업체 였습니다. 공장안에 현대차에서 제공한 사무실과 전화가 있었습니다. 서류를 들고 출근시간에 맞춰 가니 하청업자는 저를 일자리로 데려가는게 아니라 현대차 현장 사무실로 먼저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현대차 생산공정 관리자에게 저를 소개시켰습니다. 그들이 현장에 가서 일시켜라고 하자 저를 현장으로 데려갔습니다. 제가 가기 전까진 정규직이 하던 일자리였다고 합니다. 저에게 하는 일을 연습시킨 정규직 노동자가 "여기 일이 힘들어 하청에 넘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차 울산공장 하청업체도 여전히 인간차별과 노동착취 당하면서 10여년 다녔습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건설 일용직을 다니기도 하고, 이곳저곳 하청업체 다니기도 했습니다. 교차로라는 무료 배포용 신문을 보고 찾아간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파견업체 였습니다. 임금도 적을 뿐 아니라 하는 일도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나이들어가는 몸이라 그런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가고 나오고 반복하다가 어느 분의 소개로 학교 비정규직 일자리를 얻어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에도 비정규직이 많았습니다. 저는 일반 기업이야 이윤추구가 자본의 기본논리라 여겨서 파견업체를 통해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간접고용해서 사용한다 손 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의 한 기관인 교육계에서조차 인간차별과 노동착취를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하는 일은 소사라는 직책입니다. 2년 정도 학교 소사(대체인력으로 다니는 비정규직 일자리)로 다니면서 드는 생각은 80년대 초 대기업 사환 일자리와 다를바 없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교사나 정규직 직원은 공무원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는 공무원이 아닙니다. 준공무원도 아닙니다. 일용직으로 근로계약서를 쓰고 잠시 다른 사람 대신 일하다 그사람이 오면 출근이 중단되는 일자리 '대체인력'입니다. 사무직도 기간제 대체인력을 썼습니다. 2년 다되어 가는 여직원을 정리해고 시키고 다른 여직원을 새로 뽑았습니다. 초보인 새로온 여직원은 다닌 지 5개월만에 "그만두겠다"며 관리자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직원이 하는 일은 회계직입니다. 회계직은 일이 복잡하고 처리할 일이 다양해서 항상 바쁜 일자리 입니다.

"제가 학교 일 처음 하는데 뭘 알아야지요. 전직 담당자가 저에게 인수인계라도 제대로 해주고 일을 시켜야지 완전 주먹구구식이예요. 몰라서 좀 알려 달라고 정규직 담당에게 물어보면 저보고 알아서 처리 하래요. 그게 말이 됩니까? 뭘 하는 방식을 알아야 알아서 처리 할거 아닙니까. 몰라서 물어보면 좀 가르쳐 주면 좋잖아요. 막 짜증을 내면서 알아서 하는 방식 찾아 해라니 어처구니가 다 없더라고요"

그 계약직 여직원은 저도 같은 비정규직 임을 알고서 저에게 그들 몰래 하소연 하곤 했습니다. 하소연 들어 주어서 고맙다고까지 말하더군요. 처음엔 학교 일 배워서 잘해 봐야지 했다는데 정규직들이 명령만 할 뿐 친절하게 가르쳐 주진 않으니 실망이 컸나 봅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화가 날 정도 이니 본인은 매일 출근하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일하니 얼마나 많이 불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촉탁직이라고도 하고, 계약직 이라고도 하고, 대체인력 이라고도 하고, 일용직 이라고도 하고, 기간직 이라고도 하는 비정규직 일자리는 대한민국에서 모두 '을'에 해당 됩니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계약을 맺고 있는 관계이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사용자는 돈으로 노동력을 산 것이지 그 사람의 정신까지 산 건 아니잖아요. 갑과 을 관계는 주종관계를 뜻한다 할 것이나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는 갑-을 관계가 아니라 돈과 노동력을 교환하는 동등한 관계가 형성 되므로 계약서를 쓰는 것 아닙니까? 갑과 을 관계로 계약서 쓰는게 아니라 갑과 갑의 관계로 계약서를 써야 온당한거 같습니다만.

현실은 그런 평등논리가 통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저는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만 하고 그러려면 그들이 부당하게 내미는 갑,을 관계로 계약서를 작성하자해도 그렇게 할수 밖엔 없는게 현실인거 같습니다. 속마음만 불평등한 관계라 생각 할 뿐 현실은 그 불평등 함을 감수 하면서 근로계약을 맺고 일다니고 있습니다. 인간차별과 노동착취를 감내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방법을 저는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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