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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나에게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

"빨갱이 새끼들 왜 이렇게 데모를 하는 거야?" 이랬던 내가...

등록|2013.05.19 20:53 수정|2013.05.20 08:03

▲ 부대 출동 대기전 모습 ⓒ 박정훈


유난히 더웠던 그해 여름.
96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리고 유독 왜 이리 데모가 많았는지 모르겠다. 군사정권 때의 큰 데모는 아니었지만, 물론 횟수도 적었겠지만 데모와 사건이 많았다. 96년 그해에 나는 처음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표정의 비장함이 내 가슴속에 각인되어서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96년 4월 군대를 가게 되다.
96년 4월의 봄, 21살이란 나이로 군대를 가야 했다. 현역으로 가는 것은 사회복귀에 시간이 걸릴 것 같은 걱정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길에서 포스터를 하나 보게 되었다. 경찰서 앞에 붙어 있는 포스터였는데, 의경하나가 멋진 경찰 제복을 입고 어린이들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주 훈훈한 의경 모집 포스터였다.

순간 머릿속에선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지나갔다. 그 후 바로 의경지원서를 넣고 합격 후 충주경찰학교를 가기 전 까지는 후회가 없었다. (참고. 그 당시 의경은 현역4주 군사교육 후, 경찰학교에서 4주 경찰업무관련 교육을 따로 받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방범순찰이나 민원봉사 교육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연병장에서의 데모진압훈련들이 많아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다. 자대에 가기 전까지는…….

본격적으로 눈치 채게 된 것은 서울의 1기동단 신병교육대 대기기간에 알게 되었다. 데모 진압에 전경이 아닌 의경들이 대부분 투입되고, 부대들이 의경위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다가 자대배치 될 부대들의 훈련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훈련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화염병을 던지고, 훈련 중 화염병으로 인해 몸에 불이 붙는 상황을 보면서, 공포감이 느껴지는 훈련분위기가 현실로 다가왔다.

▲ 부대원들과 함께 훈련대기중인 모습 ⓒ 박정훈


구보 훈련 중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뒤 나는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다. 서울에서 제일 데모 잘 막기로 소문난 부대로 배치가 되었다. 자대배치 첫날 공포스런 분위기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나의 훈련복과 진압복은 회색이었고, 온 사방이 다 회색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구보중 낙오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선임의 말에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연병장을 열 몇 바퀴 돌았을까? '깨스'란 구호와 함께 방독면 착용을 하라는 신호가 내려왔다. (추후, 이게 일상적인 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숨은 턱을 차고도 넘치는데, 방독면 착용이라니? 가까스로 아니 억지로 난 방독면을 착용하였지만 결국, 몇 바퀴 더 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선임의 말은 귀를 내내 맴돌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그 뒤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정확히 1주 뒤 체중은 72킬로에서 57킬로도 바뀌어 있었다.

이런 훈련 뒤에 첫 데모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사방엔 뉴스로만 듣던 최루탄 냄새를 직접 맡고, 고참 들과 함께 정신없이 뛰게 되었다. 새벽마다 긴급출동이 빈번하였고, 거의 쪽잠과 야외 취침 등, 내무반과 버스 안에서의 군기는 어찌나 힘들던지……. 

'아, 저 빨갱이 새끼들 왜 이렇게 데모를 하는 거야? 빨갱이새끼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그 당시 내 마음 속에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했다. 어느 누구도 내게 왜 저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저들 때문에 수많은 훈련과 공포스런 부대분위기가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적개심은 데모 진압시에도 격한 행동을 하게 되는 부대원을 보고도 즐기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사랑도 명예도~이름도 남김 없이~'
그러던 유난히 무덥던 어느 날, 연일 계속되는 데모상황 출동에 지쳐있고 예민해 있던 날이었다. 부대 분위기는 살벌했고, 나는 탈영을 생각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런 상태로 시위진압 상황에 나가서 시위대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평소 시위 상황 때 자주 듣던 노래였다. '사랑도 명예도~이름도 남김 없이~'란 가사의 노래였는데 첨에 제목도 몰랐다. 그날은 시위대들이 왜 인지는 몰라도 덥고 땀에 찌들어 보이는 사람들인데도 그들의 울컥한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눈물에 왠지 모를 짠한 마음이 느껴졌다고 할까? 그날은 나도 모르게 그 노래 가사가 들리게 되었고 나도 모르는 그렁그렁한 마음이 내 몸에 베어듦을 느꼈다. 그 이후로 그 노래 제목을 찾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 날의 기억은 제대할 때 까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예전엔 시위대를 잡아서 경찰서에 인계할 때는 마치 독립투사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비웃기도 하였는데(난 속으로 빨갱이라고 생각했다.), 그 노래의 가사가 들리는 그날 이후로 나는 제대할 때 까지 그 노래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였다. 그리고 친한 선임에게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현대사의 뒷얘기를 듣게 되면서 나는 빨갱이라고 부르던 그들을 더 이상 비웃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빨갱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제대 후 나는 그 노래 덕분인지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4.19, 5.16, 12.12, 5.18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몰랐던 한국의 현대사의 그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관련 방송들도 챙겨보게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왜 그들의 눈에 그렇게 그렁그렁한 그런 눈물이 보였는지.

최근 며칠, 5.18 기념식에 '임을 위한 행진곡' 하나로 나라가 난리였다. 제창을 안 하고 왜 합창을 해야 하느냐? 대통령이 참석하느냐 마느냐? 그해 여름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그 노래가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그해 여름 전까지 내가 듣던 잡음의 노래처럼 들리는가 보다. 아직 그 가사가 들리지 않는지. 아님 듣기 싫은 것인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들의 5월의 눈물을 자신의 가슴 속 눈물로 안아줄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이제 매년 5.18이 되면 나의 가슴 속에는'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리고 있다. 난 광주에 친척도 없고, 아무 연고도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96년 여름에 보았던 그들의 눈에서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만 들으면 나의 눈에도 그렁그렁한 눈물이 내리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나의 가슴을 그들의 눈물과 같은 눈높이를 바람이 맞춰주고 가버린 걸까? 아님 노래가 나를 안아준 것일까? 5.18의 아픔을 내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해 여름 내가 본 그들의 눈물과 내 가슴속에 있는 눈물이 이제 부터는 서로 안아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들의 5월의 눈물을 자신의 가슴 속 눈물로 안아줄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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