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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닳도록 일만 하셨던 아버지가 우셨다

[공모-나의 아버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가 보고 싶다

등록|2013.05.22 10:52 수정|2013.05.22 10:52
1939년생인 아버지는 평생을 무학(無學)으로 사셨다. 4남 1녀 중 둘째였던 아버지는 6.25 전쟁으로 늦게 들어간 학교마저 중도에 그만 두었다. 전쟁 지원군으로 차출되어 포탄을 메고 국군의 뒤를 따르던 할아버지가 양구 어디쯤에서 폭사당해 뼛가루가 되어 할머니에게 안긴 날부터 큰아버지와 함께 책가방 대신 나무지게를 졌다고 한다.

죽령(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 사이는 소백산 큰 고개)의 험한 산에서 나뭇짐을 해서 풍기 시장에 내다팔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십리나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는 나이 마흔 일곱에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얻었다. 머리 가장 깊숙한 곳에 핏줄이 막혔고, 그것이 뇌종양으로 발전(지금의 의학으로는 충분히 수술이 가능한 것이지만, 당시엔 머리를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했다고 한다. 의사가 "어릴 때 머리를 크게 다친 적 없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나뭇짐을 지고 일어나다가 고꾸라져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몇 달을 앓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희미한 기억 속에 끄집어냈다.

병이 들기 전 아버지는 강건했다. 어머니와 결혼해서 이불 한 채와 수저 두벌만 가지고 고모할머니네 외양간에 딸린 방에 살림을 나셨다는데, 내가 철들 무렵에는 과수원도 있었고 집도 꽤 컸다.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문이 안 찍혀 몇 번이나 면소재지에 다시 갔던 아버지와 어머니. 황무지 같은 돌밭을 사서 사과나무를 심어 어엿한 과수원으로 만들기까지, 지문이 닳아 없어지는 중노동을 해야 했음을 안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뒤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

아버지 영정 사진 속 새마을 포장70년대 새마을 관련 상장을 타시고 기념사진을 찍으셨는데 돌아가시고 영정 사진이 되었다. ⓒ 안호덕


아버지는 오랫동안 마을 새마을 지도자로 사셨다. 내 기억 속엔 아직도 파란 새마을 모자를 쓰고 동네 지붕 개량 사업과 골목길 정비 사업을 할 때 맨 앞에 서던 아버지 모습이 남아있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어머니의 만류에 부딪혀 한바탕 부부 싸움으로 비화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네 대소사나 면에서 새마을 사업 관련 회의라도 있는 날이면 아버지에게 집안일은 항상 뒷전이었다. 홀로 사시는 노인들을 대신해 하는 관공서 출입도 언제나 아버지 몫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버지는 병나서 돌아가시지 직전까지 새마을 지도자 생활을 하셨다. 초가집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마을에 전기를 끌어 들이기까지 마을 이장님과 더불어 새마을 지도자였던 아버지는 새마을 사업의 마지막 집행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동네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해주고 막걸리라도 한 잔 대접받는 날이면 일이 잘 해결되어 술한 잔 얻어먹었노라고 아들을 앉혀 놓고 자랑처럼 말씀하셨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이야기했다. 넘어져 우는 아들에게 "울면 덜 아프냐"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 어린 자식들에게 어떠한 이유에도 눈물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과 싸워서 울고 들어오면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게 엄하게 꾸짖는 것이 아버지의 자식 훈육 방법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나에게 다가가기 두려운 존재였고 무서움 자체였다.

그런 아버지가 우셨다. 새마을 사업에 한창이던 70년대,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을 마지고 표창 수여식이 있었다는데 아버지가 장관 표창 후보자로 올랐지만 무학이라서 중도에 탈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참 급이 낮은 상장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버지는 그 상장을 내보이며 초등학교 졸업장만 있었더라고 표창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며 우셨다. 너희들은 아버지 같이 되지 말라며, 뼈가 부서지더라도 자식 공부는 시키겠다며 술도 안 드시고 꺼이꺼이 우셨다. 그게 내가 본 아버지의 유일한 눈물이었다.

배우지 못한 한을 감추고 강건하게 사셨던 아버지

병은 아버지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몸의 오른쪽에 마비가 왔다. 입은 비뚤어졌고 오른쪽 팔은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렸다. 오른쪽 다리에도 마비가 와 지팡이를 짚고 옆에서 부축하는 사람이 있어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 다녔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당시로는 대학 병원에서 기약도 없이 병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가족 모두의 생계가 위협받는 일이었다. 거의 1년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하고, 병세가 악화되면 또 입원하길 반복했다.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는 최종 결정을 강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니 소개장을 가지고 외국 나가서 수술을 하든지, 아니면 병원에서 퇴원을 하라는 거였다. 퇴원을 결정하는 날 어머니는 병실에서 아버지를 안고 통곡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커다란 눈만 황소처럼 껌뻑거렸다.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아버지는 오히려 담담했다. 집안의 일상도, 닥쳐올 앞날을 부정이라도 하듯 평온했다. 대학을 휴학하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하던 농사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무섭던 아버지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한없이 작아지는 아버지, 자식의 어깨에 기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설 수 없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어주지 않으면 쩝쩝 입맛만 다시던 아버지. 오히려 자식이 아버지에게 왜 운동을 게을리 하냐고 야단치는 모양새가 되었을 때 아버지와의 긴 이별은 현실이 되었다.

추석을 나흘 남겨놓은 날 새벽,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숨소리, 식어가는 몸의 온기... 입관 전에 혹시라도 깨어나실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병풍 뒤에 안치된 아버지 손을 몇 번이나 꼬집었다. 아버지는 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혔다. 일년 뒤 탈상하는 날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새마을 모자와 각종 상장, 표창, 대통령 휘장이 그려진 만년필을 묘소 앞에서 태웠다.

민방위복을 입고 새마을 모자를 쓰고 대통령 휘장이 그려진 멋스러운 만년필을 윗 주머니에 꼽은 사진은 영정 사진이 되어 제삿날이 되면 자식들과 마주한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대하는 날이면 못 배운 한을 감추고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살고자 했던 아버지의 억척스러움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않은 강건함 뒤에 숨겨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한 몸부림이 생각난다.

살아 계셨으면 일흔 넷의 노인의 되셨을 아버지

아버지의 접이 나무 자아버지가 사용하셨던 접이 나무 자.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준 유품이다. ⓒ 안호덕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서 해방을 맞고, 연이은 6.25 전쟁에서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 잃고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셨던 아버지. 자식들에게 무학의 설움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지문이 다 닳도록 돌밭을 과수원으로 만드셨던 아버지. 이제 그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옛 사람이 되었고 과수원도 큰 도로와 온천에 자리를 내 주었다. 그 땅에서 먹고 자란 자식들은 늙은 어머니 혼자만 남겨 놓은 채 민들레 홀씨처럼 타향으로 흩어졌다.

살아 계셨으면 일흔 넷의 노인의 되셨을 아버지. 때때로 삶이 고달프다고 느낄 때면 아버지에게 어리광도 부려보고, 정신 번쩍 들도록 야단도 한 번쯤 맞아보고 싶은데 이제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의 빈자리. 그 자리에 나는 세 딸의 아버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출간 기념 기사 공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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