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 죽음도 차마 멈추지 못한 진보의 꿈
[서평] 낭만적인 레지스탕스의 마지막 책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발터 벤야민은 진보를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쳐드는 꽃들'과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에 비유한 적이 있다. 태양을 향하여 자신의 은밀한 시선을 고집하는 향일성(向日性)과 천사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여 마침내 미래로 떠밀어내는 거대한 폭풍에 순응하는 일은, 진보주의자의 사명과도 관련이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의 폭력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하고 호소하던 '낭만적인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은 우리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진보주의자의 전형에 가깝다. 2010년, 그의 나이 92세에 쓴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는, 무관심과 체념에 길들여진 이들을 한껏 자극하며 미국 월스트리트 오큐파이(occupy) 운동과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 운동 등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스테판 에셀은 2013년 2월 27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책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2012년 출간된 그의 마지막 책이다(한국에선 2013년 4월 출간).
'낭만적인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마지막 책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이면서 낭만주의자로 살았다.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가 부헨발트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세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처형될 위기를 넘긴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그는 외교관으로 유엔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인류의 인권과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은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았지만, 사실 그의 삶엔 성공보다 실패와 좌절의 시간들이 더 많았다.
'죽을 운명밖에 남은 것이 없어 보이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시간'이 그러했고, '따분한 서류들을 뒤적이고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했던 중재들을 반복하던 외교관 시절'이 그러했다. 하지만 에셀은 로자가 관찰한 대로,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 혁명의 시간에 한걸음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숱한 좌절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평생 레지스탕스로 살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담긴 과거에 대한 그의 회상과 현재의 고백과 미래의 다짐들은 놀랍도록 한결같다. 그는 피끓는 청년의 때에도 투쟁했고, 90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했다. 심지어 위태롭던 열일곱 살에도 뜨겁게 사랑했고, 결혼한 이후에도, 중년과 노년의 삶을 살면서도 충만한 에로스의 사랑을 견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사랑을 사랑하고 감탄에 감탄하는' 삶을 살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시를 낭송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낭송하던 시는 '절망에 썩어버리지 않고 미래를 향한 격렬한 희망으로' 그를 구원했다. '시는 우리 눈앞에 놓인 이 너절한 현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였고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였다.
나를 바르게 지탱해주었던 첫 번째 힘은 우리 집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내 부모님의 삶의 핵심이자 유익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들의 영향이다. 내 부모님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신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시를 내게 물려주었다.(중략) 내게 시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는 우리를 활짝 피어나게 해주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로부터 초월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본문 158쪽)
투쟁하면서도 지치지 않은 희망을 소유한다는 것,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진보가 소명인 삶을 산다는 것. 에셀은 위기에 처하거나, 좌절과 패배를 당할 때면 더욱 강렬한 희망으로 시를 읊고 뜨거운 사랑을 수행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갈망한다. 어쩌면 혁명가에게 필요한 한가지는, 굳센 낭만의 결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불꽃 같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_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 중에서(본문 36쪽)
스테판 에셀은 유럽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미국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비관적 전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의 지구에서 60억명의 인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헌신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자연 속에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온전한 민주주의의 구축을 위해 투쟁할 것을 요청한다. 그 투쟁의 방식은 분노하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실행될 것이다.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이 책은 자서전이면서도 일종의 유언 같은 책이다. 그러나 책의 갈피마다 흥미롭고 생동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탓일까, 책은 다소 산만해 보이기도 하고 동의하기 힘든 대목도 있다. 하지만 에셀의 불꽃같은 삶을 어찌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연대의 부름 앞에, 작은 차이를 고집하며 어찌 홀로 고착될 수 있겠는가. '죽음도 차마 멈추지 못할 진보에 대한 그 간절한 희망과 신념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역자 목수정이 쓴 대로, 사람들은 에셀을 이상주의자로 불렀지만,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인식했다. 역사의 진화를 명백히 관찰한 결과가 에셀의 현실주의 속에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하늘을 벗삼아 땅을 걷는 혁명가에게 요구되는 자질일지도 모른다. 그의 생전, 진보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의 놀라운 성공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진보의 꿈'에 대한 '현실적인 갈망의 표현'이자 희망의 작은 증거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한때 '불꽃'같았던 이 땅의 혁명가들의 과거가, 그들의 무기력한 현재가 떠올랐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일베'의 젊디젊은 청춘들의 야만과 그 이름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지지자들의 아집은, '노무현 정신'이 꿈꾸던 진보의 세계를 더욱 아득하게 한다. 5·18 광주항쟁을 왜곡하려는 음험한 시도 앞에, 그리고 강정과 밀양 등지에 계속되는 약자들의 투쟁과 그들을 거세하려는 온갖 폭력 앞에, 무관심과 망각의 시간을 견디는 비루한 나의 현실에게 에셀의 위로는 값지다.
결국 좋은 인생은 우리가 축적해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라고.(본문 162쪽)
우리의 혁명은 실패한 것일까. 스테판 에셀은 진보와 퇴보가 반복하고 '집단의 압박과 개인의 돌파 사이에 심한 모순들이 뒤엉킬지라도'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고 썼다. 만약 에셀이 이 땅, 우리 곁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패배는 숙명일지라도 진보는 소명이라고, 그러니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사랑하고 감탄하며 다시 시작하라'고. 뜨겁게 생동하는 목소리로.
그런 면에서, 자본의 폭력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하고 호소하던 '낭만적인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은 우리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진보주의자의 전형에 가깝다. 2010년, 그의 나이 92세에 쓴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는, 무관심과 체념에 길들여진 이들을 한껏 자극하며 미국 월스트리트 오큐파이(occupy) 운동과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 운동 등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스테판 에셀은 2013년 2월 27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책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2012년 출간된 그의 마지막 책이다(한국에선 2013년 4월 출간).
'낭만적인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마지막 책
▲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스테판 에셀 지음│목수정 옮김│문학동네 펴냄│2013년 4월│1만4천500원) ⓒ 김진형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은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았지만, 사실 그의 삶엔 성공보다 실패와 좌절의 시간들이 더 많았다.
'죽을 운명밖에 남은 것이 없어 보이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시간'이 그러했고, '따분한 서류들을 뒤적이고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했던 중재들을 반복하던 외교관 시절'이 그러했다. 하지만 에셀은 로자가 관찰한 대로,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 혁명의 시간에 한걸음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숱한 좌절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평생 레지스탕스로 살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담긴 과거에 대한 그의 회상과 현재의 고백과 미래의 다짐들은 놀랍도록 한결같다. 그는 피끓는 청년의 때에도 투쟁했고, 90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했다. 심지어 위태롭던 열일곱 살에도 뜨겁게 사랑했고, 결혼한 이후에도, 중년과 노년의 삶을 살면서도 충만한 에로스의 사랑을 견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사랑을 사랑하고 감탄에 감탄하는' 삶을 살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시를 낭송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낭송하던 시는 '절망에 썩어버리지 않고 미래를 향한 격렬한 희망으로' 그를 구원했다. '시는 우리 눈앞에 놓인 이 너절한 현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였고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였다.
나를 바르게 지탱해주었던 첫 번째 힘은 우리 집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내 부모님의 삶의 핵심이자 유익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들의 영향이다. 내 부모님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신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시를 내게 물려주었다.(중략) 내게 시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는 우리를 활짝 피어나게 해주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로부터 초월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본문 158쪽)
▲ 스테판 에셀은 진보와 퇴보가 반복하고 '집단의 압박과 개인의 돌파 사이에 심한 모순들이 뒤엉킬지라도'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고 썼다. ⓒ EBS
투쟁하면서도 지치지 않은 희망을 소유한다는 것,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진보가 소명인 삶을 산다는 것. 에셀은 위기에 처하거나, 좌절과 패배를 당할 때면 더욱 강렬한 희망으로 시를 읊고 뜨거운 사랑을 수행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갈망한다. 어쩌면 혁명가에게 필요한 한가지는, 굳센 낭만의 결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불꽃 같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_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 중에서(본문 36쪽)
스테판 에셀은 유럽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미국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비관적 전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의 지구에서 60억명의 인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헌신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자연 속에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온전한 민주주의의 구축을 위해 투쟁할 것을 요청한다. 그 투쟁의 방식은 분노하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실행될 것이다.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이 책은 자서전이면서도 일종의 유언 같은 책이다. 그러나 책의 갈피마다 흥미롭고 생동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탓일까, 책은 다소 산만해 보이기도 하고 동의하기 힘든 대목도 있다. 하지만 에셀의 불꽃같은 삶을 어찌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연대의 부름 앞에, 작은 차이를 고집하며 어찌 홀로 고착될 수 있겠는가. '죽음도 차마 멈추지 못할 진보에 대한 그 간절한 희망과 신념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역자 목수정이 쓴 대로, 사람들은 에셀을 이상주의자로 불렀지만,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인식했다. 역사의 진화를 명백히 관찰한 결과가 에셀의 현실주의 속에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하늘을 벗삼아 땅을 걷는 혁명가에게 요구되는 자질일지도 모른다. 그의 생전, 진보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의 놀라운 성공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진보의 꿈'에 대한 '현실적인 갈망의 표현'이자 희망의 작은 증거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한때 '불꽃'같았던 이 땅의 혁명가들의 과거가, 그들의 무기력한 현재가 떠올랐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일베'의 젊디젊은 청춘들의 야만과 그 이름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지지자들의 아집은, '노무현 정신'이 꿈꾸던 진보의 세계를 더욱 아득하게 한다. 5·18 광주항쟁을 왜곡하려는 음험한 시도 앞에, 그리고 강정과 밀양 등지에 계속되는 약자들의 투쟁과 그들을 거세하려는 온갖 폭력 앞에, 무관심과 망각의 시간을 견디는 비루한 나의 현실에게 에셀의 위로는 값지다.
결국 좋은 인생은 우리가 축적해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라고.(본문 162쪽)
우리의 혁명은 실패한 것일까. 스테판 에셀은 진보와 퇴보가 반복하고 '집단의 압박과 개인의 돌파 사이에 심한 모순들이 뒤엉킬지라도'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고 썼다. 만약 에셀이 이 땅, 우리 곁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패배는 숙명일지라도 진보는 소명이라고, 그러니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사랑하고 감탄하며 다시 시작하라'고. 뜨겁게 생동하는 목소리로.
덧붙이는 글
저의 블로그(http://soli0211.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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