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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걸고 지킨 아빠의 약속, 고맙습니다

[공모-나의 아버지] "아빠가 엄마 몫까지 할 거니까 아무 걱정 마라"

등록|2013.05.28 20:51 수정|2013.05.30 10:36
몇 년 전 TV에서 <동행>이라고 하는 방송을 봤다. 그날 내가 본 방송 내용은 이러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이 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엄마가 집을 나가버린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결국 동생 둘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서 대학교를 가고자 하는 마음을 접고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며 학교를 다닌다.

둘째 동생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는 미장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막내는 초등학생이어서 이 학생이 막내 동생을 돌본다. 이 아이는 엄마를 애타게 찾았고 5년 만에 엄마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엄마가 5년 만에 만난 자식을 보면서 한 첫 마디는"너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여기 왜 왔어? 이러면 엄마 죽어"였다.

동생 둘을 데리고 어머니, 아버지 없는 삶을 힘겹게 살고 있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엄마를 찾은 이 학생은 엄마가 하는 말을 듣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한참 쳐다본다. 그리고는 "알았어. 갈게" 하며 차갑게 말하고서는 휙 뒤돌아서 산동네 언덕진 길을 마구 걸어내려간다.

그런데 그 학생이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다시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미친듯이 뛰어간다. 그리고 엄마에게 "이대로 돌아서면 엄마 얼굴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돌아왔다"며 눈물을 철철 흘린다. 이 학생은 엄마에게 한 번만 안아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하지만 엄마는 그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가 자기를 안아주지 않자 자기가 엄마를 부둥켜 안으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무거운 짐을 지고 외롭게 살았을 것 같은 아빠

<동행>을 보고 나서 나는 아빠 생각이 자꾸났다. 아빠는 우리가 크는 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우리 아기를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뿐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너무 어릴 적에 심한 고생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서 평생 맘 속에 남아 있어. 너무너무 가난해서 고생 징하게 했지. 나는 엄마한테 아주 많이 맞으며 커서 엄마 품 좋은 줄 모르고 컸지."

아빠가 해주신 이런 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대충 추측해보면 할머니는(아빠 어머니)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돈벌이를 거의 못하신 듯하다. 그래서 첫째인 우리 아빠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하면서 밑에 동생들을 다 거둬야했나 보다.

아빠 기억에 할머니는 늘 자기를 때리고 구박했던 기억만 남아있는 것 같고 내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함께 살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늘 하는 일 없이 술에 취해 있었던 모습만 남아있는 걸로 봐서 아빠가 돌봐야할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아빠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고 크기는커녕 <동행>에 나오는 그 아이들처럼 기댈 데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고 외롭게 컸지 싶다.

그렇게 부모사랑 모르고 험하게 살아온 아빠였지만 돌아보면 나는 크면서 아빠한테 손지검을 당한 적이 없다. 엄마한테는 때론 맞기도 했지만 아빠한테는 한 번 맞아 본 적이 없다. 아빠는 우리에게 욕이 섞인 험한 말도 하신 적 없다. 엄마가 나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 모두 몹시 힘든 시간을 오랫 동안 견뎌내야 했던 때조차도 아빠는 우리에게 험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술을 드셨지만, 그래서 늘 술에 취하면 어린 손주들을 당신 앞에 앉혀 놓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불쾌한 술냄새를 풍기며 잔소리를 하셨지만 아빠가 술에 취한 모습은 본 적은 없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는 예전에 한두 잔이었던 저녁식사 반주가 소주 반병쯤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한해에 한 번씩 꼭 도지는 허리병 때문에 하루쯤 일을 쉬는 날은 아빠가 낮에 등 붙이고 집에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아빠는 돈벌이가 되든 안 되든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빚을 지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만큼만 쓰며 산 셈이다. 당연히 나는 소비가 넘쳐나는 서울에 살면서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것을 거의 참아가며 살아야했다.

그 시절 그로인한 불만은 이루다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아빠가 왜 그토록 빚을 지지 않으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빠가 빚이 있는 채로 나이가 들면 그건 모두 자식들 몫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으리라. 그렇게 아빠는 늦은 밤까지 열심히 일을 하셨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면 못이 밖혀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잠든 우리들 등을 쓱쓱 쓸어주셨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묵묵히 키워오셨다.

예순이 다 돼서도 고된 일을 하셨던 아빠

이제 나는 결혼해서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산다. 내 동생도 결혼을 해서 남편과 한 아이와 함께 산다. 그리고 내 막내 동생도 얼마 전 결혼을 했다. 그야말로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다 키운 셈이다. 그런데 아빠는 몇 년 전까지도 이삿짐센터에서 자동차를 고치고 사다리차를 운전하고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내가 아빠가 하는 일은 자동차를 고치는 일인데 왜 운전하고 짐나르는 일까지 다 하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아빠는 이 나이에 돈받고 일하려면 이것저것 따지는 게 어디 있느냐며 시키든 시키지 않든 눈에 보이는 일은 다 해야한다고 하셨다.

기운 좋은 젊은 남자들도 하기 힘든 그 고된 일을 아빠는 나이 예순이 다 되어서까지 하셨다. 아빠는 그렇게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일을 하셨고 일을 그만두신 다음에는 당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미뤄왔던 자기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계신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 일들이다. 한자 공부 삼매경에 빠지셔서 밤낮없이 공부를 하시더니 한자능력검정시험1급까지 자격증을 얻으셨다.

▲ 아버지(이 이미지는 <아버지의 일기장>(돌베개)에 사용된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 돌베개


저소등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한자교실에도 나가시고 초등학교에서 방과후활동으로 한자도 가르치신다. 문화원에서 하는 한시 공부도 즐거이 하고 계신다. 굴삭기 운전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신데 필기는 합격했는데 아직 실기는 못따셨다. 그리고 아빠가 진짜로 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일이다.

아빠가 그리는 그림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한자를 가르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 엄마 묘가 있는 선산을 굴삭기로 예쁘게 더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빠는 차근히 자기 인생을 준비하고 즐기며 살아가신다. 그래서 요즘 아빠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보인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니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삼촌이 어느날 아침 우리를 낮은 목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지난 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한다. 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나는 들어가면 사실이 될까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삼촌이 끌다시피해서 들어가니 아빠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계셨다. 고개 숙인 아빠 모습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우리 셋이 아빠에게 달려갔고 아빠는 우리셋을 팔로 감싸 앉으며 등을 쓸면서 한 마디 한 마디 정성들여 말씀하셨다.

"걱정마라. 아빠가 엄마 몫까지 할 거니까 아무 걱정 마라."

그리고 아빠는 그 약속을 정말로 자기 인생을 걸어 지키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즐거이 자기 남은 인생을 열어나가고 계신다.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빠가 있어서 나도 있는 거예요."
덧붙이는 글 나의 아버지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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