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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 그 이면에 대한 성찰 3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5.22-5.24)

등록|2013.06.05 18:12 수정|2013.06.06 14:30
로마에서 오르비에토를 거쳐 피렌체로

이탈리아 고속도로 공사 이야기(장기간의 공사와 더딘 공사 속도)를 가이드로부터 들으면서 이 나라의 문화와 환경을 짐작해 본다. 물론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모범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동시에 들었는데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 고속도로를 처음 건설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고 또 본질적으로도 이 나라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도로 주변으로 보이는 평원은 첫날부터 나를 놀라게 했는데 끝없이 펼쳐진 농토와 휴경지를 보면서 산지만 가득한 우리 땅과 비교해서 약간의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이 환경에서 농사를 지을 미래의 농부들이 다니는 농업계 실업고교를 방문할 예정이다.

오르비에토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96㎞ 떨어진 팔리아강과 키아나강의 합류점에 있다. 해발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위치하며, 케이블카로 오르내린다. 부근의 농촌에서는 포도가 많이 생산되며, '오르비에토'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철도와 도로를 통해 로마, 피렌체와 연결된다. 우리가 내려서 처음 본 것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유레일의 열차였다.

오르비에토195m의 산정에 세워진 오르비에토에서 내려다 본 풍경 ⓒ 김준식


산이래야 겨우 195m이지만 평지에서 오르기 때문에 케이블카로 5분 이상을 오른다. 이 케이블카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올라가면 우리나라 마을버스와 같은 버스로 마을 중심부에 있는 두오모 앞에 내려준다. 버스에 운전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거의 노인들이 전부인 마을 같았다. 청년이 없는 농촌은 우리나 이탈리아나 같은 흐름인 모양이다. 거리에는 특산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있고 골목들은 중세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산정으로 오른 당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이제는 슬로우 시티라는 다소 엉뚱한 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며 시간과 문화와 역사의 혼란스러움, 그리고 그 속에서 늘 생기는 사람들의 적응능력을 생각해 본다.

오르비에토 두오모마을에 비해 엄청난 성당의 크기와 화려함. ⓒ 김준식


서양의 문화는 광장문화다. 어디를 가든 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또 어김없이 교회당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큰 교회를 두오모라 부르는데 본래 뜻은 돔(Dome), 즉 둥근 지붕이라는 말에서 출발하여 큰 교회(주교가 있는 교회)로 발전하여 정착된 말이다.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는 마을 크기와 비교해서 몹시 웅장하다. 그 옛날 저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을까? 이국의 여행자의 눈에는 화려한 고딕양식의 중심인 장미의 창(고딕 양식의 성당 중앙에 둥글고 화려하게 장식한 창)이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플로렌스(피렌체-꽃의 도시)

학교(ISTITUTO TECHICO AGRARIO)를 방문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농업계 전문 고등학교인 이 학교에 들어서니 학교 부지가 정말 넓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내가 근무했던 경남자영고가 농업계 학교여서 나에겐 이 학교가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여러 재배포장(일종의 실험실)을 보면서 농업계 학교의 공통점을 본다.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실습중인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아이들과 비교해서 밝고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아이들이나 이 나라 아이들이나 모두 같은 또래이고 동 시대를 사는 아이들이므로 비슷한 감정과 느낌을 가졌을 텐데 이곳 아이들이 조금 밝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교육제도 탓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각자에게는 각자의 제도와 문화가 있는 법, 비관적인 시각으로 볼 문제는 아니다.

이 학교는 20세기 초에 세워진 학교로서 학교 역사관에 무솔리니가 방문한 사진을 보았는데 혁명의 어릿광대 무솔리니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학교 내부는 마치 오래된 건물들의 전시장처럼 노후했고 지친 듯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기에 나름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사용하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특유한 전통에 대한 태도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늦게 나타나시는 바람에 우리의 일정도 조금 미뤄졌지만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고 오히려 천천히 학교를 둘러보며 이곳저곳에 드러나 있는 이탈리아 교육의 현 주소를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농업은 우리와는 달리 노동 집약적 산업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냐하면 사철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질, 그리고 상대적으로 넓은 경작지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먹고 사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농업교육처럼 집약적인 재배의 기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단지 보조해주는 농업으로 정착된 듯 보였다. 우리의 농업처럼 땅에서 농작물을 쥐어 짜내기 위해 땅과 싸우는 농업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상호 협조하는 수준의 농업인 셈이다. 그러니 교육과정도, 방법도, 방향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우리의 농업이 이들을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땅의 농업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제도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피렌체를 보다

피렌체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 본 피렌체 풍경 ⓒ 김준식


피렌체를 조망하기 위해 일행은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랐다. 피렌체 시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그 언덕 위에는 비록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다비드 상이 서 있었다. 구약성경의 영웅적 인물인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한 최초의 왕이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언덕에서 보이는 둥글고 붉은 돔은 바로 피렌체의 두오모이다. 아르노 강을 사이에 두고 많은 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은 베끼오 다리다. 지붕이 있는 이 다리는 아르노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베끼오 궁의 관리들이 비를 맞지 않고 건너기 위해 지붕을 씌웠는데 그 후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남아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공습도 피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은 보석상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한다.

일행은 걸어서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다. 서양 어디나 모두 비슷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像)을 좋아한다. 광장에 많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봄으로서 뭔가 문화적 일체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여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언덕에서 보았던 다비드상이 또 있고 그 옆으로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페르세포네, 아폴론 등의 신들이 다양한 포즈로 서 있었다. 이런 조형예술은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정적이고 관조적인 문화와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에겐 다소 어색한 면도 없지 않다.

85m 높이의 조토의 종탑은 가히 압도적이었는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완성된 것이라 한다. 두오모의 앞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었는데 단테가 세례를 받은 이곳의 정문 조각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송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모조품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골목골목을 지나 르네상스의 주인공 단테의 생가가 있었다. 그곳에 단테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뭐 대수일까만 그곳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순수하거나 혹은 상업적 의도로 보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단테는 단지 '신곡'이라는 불후의 저작을 남긴 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사실 단테는 정치가이며 군인이며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을 망명자로 살았고 죽음도 망명지에서 맞이했다 한다.

다시 몇 골목길을 돌아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열다섯 때 처음 피렌체에 와서 살았던 집을 본다. 참 무의미한 일인듯 싶었지만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삶이 스쳐간 흔적을 보면서 르네상스를 완성한 위대한 천재의 유년기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공증인의 서자로 태어난 그가 불세출의 인물로 성장하는데 이 피렌체라는 도시가 크게 작용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메디치가

피렌체를 돌아보며 도시 국가였던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5~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시민 가문이며 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자였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가문은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 출발점이다.

그 뒤 무역업과 은행업을 통해 부를 키운 이 가문은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거의 400년 가까이 피렌체를 지배했다. 이 가문이 유명한 것은 그들이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인구 300만의 피렌체를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데 있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얻게 된 엄청난 양의 예술품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 루이사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예술품을 토스카나 대공국과 피렌체에 기증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그 결과 일체의 예술품들이 도시 밖으로 유출되지 않아 오늘날 피렌체는 세계의 관광객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되었다.

문득 우리의 현실을 이러한 역사와 비교해보니 우울해졌다. 타의에 의해 우리의 엄청난 문화재가 외부로 유출되고 소실된 반면 후손들의 무지로 인해(자의에 의해) 우리나라 밖으로 반출된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미국의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세계 각처의 유명 박물관에 전시된 우리의 문화재와 피렌체의 문화재는 기막힌 대조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기적의 피사

피사는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여,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아르노 강 하구 부근에 있는 도시로서 도로·철도 등 교통의 요지이며 기계공업을 비롯한 많은 근대공업, 대리석 가공업 등이 성하다. 주변 농업지대에서는 포도·올리브·곡물 등의 재배와 목축이 활발하다. 특히 지나는 길가 어디든 대리석 가공 공장이 있었는데 멀리 보이는 산 전체가 모두 대리석이라 하니 이 나라 사람들은 조상 복이 참 대단하다.

피사의 사탑일행 중 한 분께서 힘껏 받치고 있는 모습 ⓒ 김준식


피사의 두오모 옆에 종탑이 그 유명한 斜塔이다. 갈릴레오의 실험으로 더 유명해진 이 탑은 보기에도 매우 기울어져 있어 정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건축된 지 거의 9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저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 이탈리아 정부는 경사각을 수정하기 위한 보수공사를 착수하여 10년에 걸쳐 보수작업을 진행한 결과로 기울어짐 현상은 5.5˚에서 멈춘 상태이다. 2001년 6월 일반에 다시 공개하였으나 보존 및 유지의 관계로 인해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었다.

밀라노와 밀라노 두오모

밀라노로 가는 길 주위의 평원이 그 유명한 롬바르디아 평원이다. 알프스산맥 남쪽 기슭에 있는 포강과 그 지류로 이루어진 복합선상지로서, 토지가 비옥하여 이미 13세기경부터 수로의 정비 등 토지개량이 진전되었다. 특히 여름에는 비가 적으나 관개수로가 도처에 마련되어 있어 낙농 ·양잠 및 밀 ·쌀 등의 곡물재배로 생산력이 높은 농업지대를 이룬다. 이 평원의 생산력이 오늘날의 밀라노를 만든 원동력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중심지다. 동시에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미 11세기경 롬바르디아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여 이후 밀라노 공국으로 주변을 통일하였다.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밀라노에는 비스콘티 가문이 있었다. 이들도 메디치 가문처럼 교황과 긴밀한 협조아래 세력을 키워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이탈리아 지배하면서 르네상스의 수호자로서 문화 예술을 장려하였다.

밀라노 시내를 지나가면서 라 스칼라극장을 보았는데 이 극장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따라 건설된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이 이탈리아의 밀라노에도 그녀의 손길이 미쳤고 그 결과 저 유명한 극장을 남겨 놓았다. 때로 제국주의는 혐오의 대상이지만 이런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만은 반드시 혐오의 대상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니 모든 일에는 분명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는 흔히 말하는 명품의 거리다. 우리가 잘 아는 명품상표의 대부분이 밀라노 출신이 많다. 그런 이유로 엄청난 가격의 명품 상표를 단 가계들이 즐비하다. 이탈리아의 명품산업은 그들의 독특한 장인정신에 기초하여 현재 전 세계의 명품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그 소비국의 상위에 속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사 하는 바 있지만 딱 꼬집어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밀라노 두오모한 화면에 넣기가 곤란할 정도의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하는 밀라노 두오모 ⓒ 김준식


갤러리를 지나오니 무엇인가 거대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밀라노 두오모, 즉 대성당이다. 밀라노 대성당은 위에서 언급한 비스콘티가의 영향력 아래 있던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의견에 따라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 기공하였다. 프랑스나 독일의 대성당에 필적할 만한 것을 원했기 때문에 이들 나라의 건축 기술자를 대거 참가시켜 당시의 건축양식이던 고딕양식으로 그 시대 최고 최대의 건축물을 짓고자 했으나 너무나 방대한 규모와 복잡한 설계 탓에 여러 가지 공사의 어려움을 겪었다. 최종 건축이 완성된 것은 시공한지 거의 600년이 지난 1951년이었으니 공사의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로 성당을 보니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완성되었을 만큼 웅대하고 동시에 화려하였다. 흰 대리석이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는데 600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쏟은 피와 땀이 오늘의 후세들에게 엄청난 자산으로 남았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베로나를 스치며

베로나는 영국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다. 줄리엣의 집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그곳을 찾아, 그들의 못다 이룬 사랑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동시에 현재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과연 집 앞과 골목은 발 딛을 틈이 없을 만큼 혼잡했고 멀리서 바라보는 난간은 로미오가 세레나데를 부르고 줄리엣이 화답할 만큼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벽면에 엄청나게 그려진 낙서들을 보면서 사랑의 공식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장소에 무관함을 본다.

비 오는 베로나의 아레나는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역할, 즉 검투장 이었는데 지금은 몹시 퇴락하여 보수작업이 한창이었다. 불현듯 우리 문화재의 유지와 보수가 생각났는데 석조건물은 이렇듯 이천년을 넘겨 유지하는데 우리의 목조 건물은 천년을 넘기기 어려우니 우리 역사가 아무리 오천년이라 해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남아 있어야 할 정신문화조차도 이제는 희미해지는 현실 아닌가!

베니스(베네치아)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베네치아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 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 섬이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베네치아 풍경하늘과 조화를 이룬 베네치아 풍경 ⓒ 김준식


베네치아만 안쪽의 산호초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육지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는 섬 어귀에 차를 반드시 주차하여야 한다. 시내에는 차가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와 사주(모래로 이루어진 제방)를 연결한 것이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여 오염과 지반침하로 인해 내부 수로의 배 속도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베니스는 역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데 그 배경에는 금융자본에 대한 당시의 냉소적 시각이 깔려있다. 실제로 베니스는 이러한 무역업으로 생긴 자본을 다시 금융업으로 이동시켜 성장하였고 희곡에 나오는 것처럼 샤일록은 유대인이었는데 실제 베니스의 금융업은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들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을 '게토'라고 부르는데 게토는 이탈리아 말 '게타(gheta)', 즉 대포 주물공장을 뜻하는데, 유대인 밀집지역이 그 근처에 있어서 붙인 유대인 게타라는 말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1516년 4월 이탈리아는 기독교도들로부터 유대교도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베네치아에 유대인 게토를 설치하였는데, 이후 유럽 다른 국가들도 유대인 거주 지역을 '게토'라고 부르게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 사실의 배후에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유럽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자 동시에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다는 사실도 동시에 말해준다.

베니스의 중심 산마르코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산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며,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 불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테오도르상이 있고 동쪽으로 산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베네치아 풍경중앙 종탑에서 바라 본 베네치아 풍경 ⓒ 김준식


마르코 대성당의 종탑에 올라보니 거의 100m(정확히 98.6m) 높이에서 보는 베니스는 유럽의 특이한 지붕색(붉은 벽돌색)으로 가득한 중세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서 갈릴레오가 천체를 관측했다는 표식이 있었는데 이 나라의 과학적 탐구정신은 높이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형수 혹은 무기수가 재판을 받고 형무소로 가는 길에 놓여 있었던 다리를 '탄식의 다리'라 불렀는데 죄수들이 작은 창으로 보는 베니스의 바다와 광장의 마지막 풍경은 아마도 지극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곤돌라를 타고 지나가다 본 마리아 칼라스 폰다멘따 ⓒ 김준식


클로드 모네의 유명한 그림 '베니스의 곤돌라'를 보면 기둥에 묶여진 곤돌라가 바다에 고적하게 묶여 있는 풍경을 모네만의 독특한 빛으로 묘사한 작품으로서 곤돌라에 대한 당시의 감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실제 11세기 베니스가 번영할 당시부터 낭만적 교통수단이던 이 곤돌라는 선두와 선미가 모두 휘어져 있는 선체와 그 위에 서서 긴 노를 젓는 사공의 모습이 너무나 낭만적인 배다. 5-6인이 탈 수 있는 이 배는 이제 베니스 관광의 꽃으로 불리는데 베니스 곳곳의 좁은 수로를 옮겨 다니며 몇 백 년 된 집들과 그 속에 사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예술적인 교통수단이다. 본래 뱃사공이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며 노를 저었다 하는데 우리 일행 중 음악 선생님 두 분께서 노래를 불러 뱃사공이 부르는 노래와는 비교되지 않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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