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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부터 10대 정종까지 '고려불교 역사' 살폈다

[서평] 진관스님과 지원 스님이 쓴 <고려전기 불교사 연구>

등록|2013.06.09 22:00 수정|2013.06.09 22:00

표지스님이 쓴 <고려 전기 불교사 연구> 표지이다. ⓒ 초롱

스님들이 고려 전기 불교 역사에 대해 바르게 고찰하고 탐구한 책이 나왔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인 진관 스님과 부산 문수사 주지인 지원 스님이 지난 초파일에 펴낸 <고려전기불교사연구>(2013년 5월 17일, 초롱출판사)는 고려사를 통해 왕건의 고려 건국과정에서 견훤, 궁예, 경순왕의 진실성을 고찰했고, 고려 왕건에서 정종까지 10대왕을 두고 연대기적으로 고려 전기 불교사를 연구한 책이다.

저자들은 서문을 통해 역사란 바로 자기 민족사에 대한 존재성이라고 밝히면서, 역사를 성찰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 초기 불교와 민족사관에 의한 고려시대의 역사성과 고려불교의 역사관을 논증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우선 태조왕건의 고려건국의 역사를 조명함으로써 고려불교사를 바르게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불교사는 신라하대에 전승된 불교와 후백제 지역의 불교의 통합적인 면이 없지 않다. 저자들은 고려 불교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왕사나 국사의 탑을 고찰한 흔적이 있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고려 불교사 역사를 논증하기 위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를 참고했다. 특히 고려불교연구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각훈의 <해동고승전>에 대한 고려 불교 연구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지 않고 있음도 아쉬워하고 있다.

이 책은 왕건이 고려 전기 국가를 선포한 이래 당나라에서 유입됐고 신라하대에 성립했다고 하는 불교 선종의 각 종파 연구를 통해 고려시대 전승했던 불교종파의 사상성을 바르게 알리고 있다.

"고려불교는 왕건의 통치에 의해 발전했다. 왕건시대 불교종파는 신라하대의 종파를 그대로 수용했다. 신라 말, 당나라 말에 전해진 불교는 그대로 전승됐을 것이며, 후백제 지역의 불교종파인 진표를 중심으로 한 법상종도 전해졌을 것이다. 당나라의 법장의 화엄불교사상을 전해 받은 신라 승녀 의상 때문에 신라하대의 불교는 원효 불교보다 의상의 화엄종사상이 흥행하고 있었다." -p24 본문 중에서-

신라하대 이후 불교 종파는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 등 교종 5파설이 있고 또한 고려초 고려에 전했던 선종 5가 7종(임제종, 양기종, 화용종, 조동종, 운문종, 위양종, 법안종)의 종파설이 있다.

고려 왕건시대 불교종파는 화엄종이 가장 강력한 힘이었고 신라하대 20여 년 간은 구산선문의 지방 토호족 유지들과의 연대를 통해 불교의 힘을 길렀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왕에 오른 뒤 철원에서 송악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평양에 10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고려건국과 수도를 송악으로 이전한 것은 고려건국의 발전을 말함이며, 불교를 신봉한 태봉국 궁예왕의 잔인성에 대한 여론을 선전하고 고려 백성들에 대한 지도력을 새롭게 전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고려 태조 12년 천축국 삼장법사가 불교의 위대성을 전법하려고 고려에 왔다. 고려불교 발전에 대한 답례의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고려왕이 삼장법사를 친히 맞이했다. 이는 국왕이 불교를 철저히 신앙해 왔다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 13년 학교를 처음 개설했고, 서학박사가 되게 했다는 것은 고려백성들을 위한 인재양성의 목적이 이었다. 이 때 실제 교육은 불교를 통한 교육이었다는 점이다. 불교계에서 교육은 불교경전을 통한 교육이었고 승녀들도 경전을 통해 문자를 알게 됐던 시기였다.

고려 왕건(935년)은 후백제 견훤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았다. 경순왕의 왕자 마의 태자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무너뜨리게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저항을 했다. 왕자는 통곡을 하며 왕을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해 집을 삼고 삼베옷과 나물음식으로 남은 일생을 마쳤다.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귀의해 범공이라는 승려로 법주사와 해인사에서 머물렀다.

왕건의 장자 혜종은 왕건의 정신을 바르게 이끌지 못하고 훈요십조의 정치적인 지도력이 상실됐다. 고려왕위를 계승했으나 정치력이 전혀 없었다. 혜종이 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왕규의 외척들이 살해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어 고려 3대왕이 된 정종(왕건의 둘째 아들)은 고려 태조가 건국이후 26년간 통치기반으로 삼았던 불교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정종은 도선의 도참사상을 신봉했고, 왕건이 건립한 사찰에 대해 국가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고려사에서 정종은 직접 10리 나 되는 거리에 있는 사찰을 향해 부처님을 사리함을 들고 행진을 했다는 기록은 정말 불심이 충만한 임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왕건의 셋째 아들 4대 광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두 형의 단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도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를 정치적 대안으로 삼았다.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위해 불교정책을 이어갔다.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개성에 태조원당의 행사를 치렀던 대봉은사와 모후 유씨원당의 행사를 치렀던 불일사, 모후 원찰의 불교 행사를 했던 숭신사와 구법사 등을 창건했다. 광종은 후주에서 온 쌍기의 건의를 받아드려 노비구제책인 노비안검법(과거 양인이었던 노예를 다시 양인이 될 수 있게 한 법)을 실시했다. 토호족들이 전횡하고 있는 권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통제 차원이었다. 고려 광종은 무수한 사람을 죽이는 실로 폭군이었다. 고려 광종시대 최고의 화엄종 승려 균여대사 의문 죽음과 혜거 스님의 의문사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게 한 대목이다.

고려 5대 경종은 아버지 광종이 사람을 많이 죽여 면피하기위해 선정을 베풀려고 했으나 실패한 임금이다. 임금이 된 지 7년 지나 불교를 택한 아버지 광종의 모습을 목격한 인물이다. 부왕인 광종이 무수히 잔인하게 죽였던 토호세력과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는 선정을 베푸는 작업을 폈다. 광종 때 만들었던 감옥을 허물었지만 토호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6대 성종은 태조가 실시했던 훈요십조를 전면 부정했고 불교적 행사를 중지하거나 폐지하는 등 불교탄압을 일삼았다. 고려 불교정신을 완전히 뒤엎는 역할을 했다. 성종은 유학을 숭상하면서 기우제를 지냈다. 유교를 숭상했지만 불교정책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상국 송나라가 불교 정책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대 목종은 고려 불교 정책 변화를 시도했다. 송나라보다 거란을 숭상하고 거란의 불교를 숭상했다. 목종 2년 진관사, 목종 3년 숭교사 등을 세우면서 불교부흥에 힘썼다.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의 섭정으로 정치를 바르게 할 수 없었고, 김치양의 힘과 천추태후의 권력남용으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교를 신앙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부도덕한 행위로 아들을 낳았고,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해도 목종은 손수무책으로 방관했다.

고려 8대 현종은 어린 시절에 강제로 절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어린 시절 스님들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현종은 등극을 하면서부터도 불교를 버릴 수 없는 관계였다. 현종은 신라 김부 혈족이다. 김부는 경순왕인데 경순왕이 고려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현종이 있을 수 없었고, 현종은 김부의 외손자로 알려지고 있다. 훈요십조 정신을 이어 팔관회와 연등회를 다시 실시했다. 침체된 고려 불교를 회복하는 데 노력했다.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명분은 강조가 목종을 시해했다는 이유였다. 거란군은 서경을 침략해 중흥사 탑을 불사르기도 했다. 이 때 현종은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

현종은 승려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현종 9년(1018년) 헌화사가 창간되고 현종 18년(1027)혜일중광사, 21년 중광사가 창건됐다. 현종 20년에는 장경도량을 마련해 불교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현종의 아들이 고려 9대 덕종이다. 덕종왕이 보살계를 수지했다는 것은 불교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서원을 세우기 위함이다. 불교의 이념을 실천하고 불교의 바른 덕을 정치적 이념으로 여겼다. 덕종은 봉은사를 참배하고 법경을 국사로 봉했다.

고려 10대 정종은 고려불교를 통해 정치적인 정책을 실시했고, 불타의 가르침대로 고려를 이끌려고 불교사상에 의한 정책을 실천했다. 아들이 4명이상일 때 불가에 출가하도록 했다. 불교승려들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종은 승려 1만 명을 초청해 공양을 내었는데, 이것은 고려 승려가 많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열었고, 장경도감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백성들은 물론 정치가들도 불교정신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했다. 12년 재위 동안 고려를 정치적으로 안정되게 했다.

이 책은 고려 전기 불교의 역사관을 왕을 중심으로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또한 불교역사 뿐 아니라 고려 전기의 역사적 사실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미 고려말기 불교역사를 책으로 편찬했고, 현재 고려 중기 불교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으며, 마무리된 시점에서 책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달마도진관 스님의 달마도 그림이다. ⓒ 김철관


저자 진관 스님은 중앙승가대학 실천응용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이며,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이다. 그는 지인들에게 달마 그림을 그려 나눠주는 승녀로도 알려져 있다. <불교 생명관>, <근대불교 정화운동사>, <사형제에 대한 불교의 관점>, <빼앗긴 일터>, <문수의 자화상> 등 수많은 저서가 있다.

지원 스님은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와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부산 문수사 주지이다. <산문에 부는 바람>, <걸망도 내려놓고 마음도 내려놓고>, <이별연습>, <백유경> 등 수많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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