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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이 수영에게 내린 명령은 무엇이었을까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36] <서시(序詩)>

등록|2013.06.11 09:15 수정|2013.06.11 12:24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尖端)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停止)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령(英靈)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이십 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령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過剩)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ᅁᅮ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遲遲)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1957)


'서시(序詩)'는 책의 첫머리에서 머리말 대신으로 쓴 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머리말에는 대개 책이나 글 전체 내용의 대강이나 그에 관계된 사항을 밝혀 적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시는 그런 머리말에 해당하는 내용을 시의 형식을 빌려 적은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그래서 '서시'라는 제목이 붙은 시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점검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를 통해 지나온 날을 차분하게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삶의 전기로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윤동주 시인의 유명한 <서시>가 아주 정확하게 그런 시상 구조를 보여줍니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면서 지나온 날을 아프게 회상합니다. 그러고는 다가올 날들을 떠올리며 다짐합니다. 앞으로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고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서시>에서 보이는 윤동주의 그런 모습은 차분하면서 여려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차분함과 여림 때문에 내적으로는 오히려 아주 강렬한 느낌을 환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은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윤동주 시인의 실제 삶을 통해 그대로 확인됩니다.

수영의 이 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화자의 첫 마디,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1연 1행)는 지나온 날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점검이자 성찰입니다. 이곳의 "첨단의 노래"는, 수영의 초창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첨단'은 속도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첨단'은 "정지의 미"(1연 2행)를 갖지 못합니다. '정지'는 뒤처지는 것이고, 그것은 곧 첨단으로부터의 추락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은 1965년에 쓴 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자신의 시 수편을 냉철하게 자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수영은, 우리가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곤 하는 <아메리카 타임 지>나 <공자의 생활난>과 같은 모더니즘 계통의 작품을 "나의 마음의 작품 목록으로부터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첨단의 노래"에 대한 차가운 성찰입니다.

이제 수영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시, 새로운 삶에 대한 다짐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첨단의 노래"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그려보는 것이지요. 그것은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1연 12, 13행)라는 구절을 전제로,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1연 14행)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에 부르는 "부엉이의 노래"는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지한(보잘 것 없는) 노래"이자 "더러운 노래"이며 "생기 없는 노래"(2연 1, 2행)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과거의 "첨단의 노래"와는 결코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화자, 곧 수영이 지금까지 써 온 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노래를 부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명령"(2연 3행)이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처참한 전쟁을 마치고 어지러운 정치·사회적 격변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던 1950년대라는 시대가 내린 것입니다. <서시>는 수영이 시대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김수영 참여시의 최초의 뿌리, 혹은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영이 이렇게 시대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1955년, 이승만 독재 정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영구 집권을 획책했습니다(<국립 도서관> 편 참조). 그후 이승만은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과 야당 지도자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진보당 간첩 사건 조작 등을 통해 영구 독재를 위한 토대를 차근차근 닦아 나갑니다. 이 모두가 아주 비열하고 야비한 방식들이었지요.

서강 언덕에서 소박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던 수영에게 이런 야만적인 정치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런지요. 야만적인 격변의 시대는 양심과 상식을 가진 평범한 개인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마음을 들끓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앞서 본 <눈>(1956)이나 <폭포>(1957) 등도 그 어두운 시대 현실에 대한 수영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나 <폭포>에는 이 시에서와 같은 시대의 명령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안일과 나태함을 경계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반성만이 도드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 이르러서는 <눈>이나 <폭포>에서 벼려진 비판의 날이 시대의 명령을 받아 똑바로 우뚝 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때부터 "첨단의 노래"를 버린 수영의 눈속으로 하나의 거대한 시대가 본격적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시대가 1960년 4월 19일에 이르러 거대한 굉음을 내며 화산처럼 폭발했을 때, 수영의 시도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앞을 향해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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