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착 붙는 오미자찐빵 맛보러 문경에 가다
[김수종 문경을 걷다 1] 역사가 살아숨쉬는 고장 문경읍
지난 8일(토) 아침 동서울터미널에서 8시 20분 버스를 타고 경북 문경읍으로 향했다. 버스는 충주 건국대학을 거쳐서 10시 30분경 문경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침 햇살이 무척 좋은 날이라 눈이 부신 가운데,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선크림을 얼굴에 바르고는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는 바로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식육점 뒤편에 있는 오래된 창고를 발견하고는 둘러보았다. 낡은 농협 창고인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철문과 외벽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워 사진을 한 장 찍어 둔다.
이런 창고를 개조하여 카페나 식당,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100명 이상은 동시에 수용이 가능해 보이는 크기다. 일본 북해도에는 수로 옆에 있는 해산물 창고를 수십 개 개조하여 다양하게 쓰고 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골에서도 새롭게 무엇을 짓고 만들기 보다는 사용하지 않는 비어있는 창고를 개조하여 재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비용도 절감되고. 창고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식육점 주인 아주머님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뭐 볼 것이 있다고 사진을 찍어여."
나는 그저 웃으며 "이뻐서여"라고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다시 길로 나와서 전진하다가 앞쪽 골목에 있는 낡은 정미소 간판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이곳도 없어진 정미소지만, 낡고 오래된 건물이며, 외벽이 멋지고 특이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목욕탕 건물도 재미있다. 목욕탕의 붉은 색 간판도 웃기지만, 낡은 건물을 방치하여 곳곳에 얼룩이 많아 마치 흐려진 벽화 같다.
지금은 효용이 없어진 시골 정미소와 목욕탕을 살펴 본 나는 길을 우측으로 잡아서 조금 가다가 오미자찐빵을 판다고 하는 글씨를 발견했다. '다올오미자찐빵'이라고 하는 작은 가게인데, 도넛, 찐빵, 크로켓 등을 팔고 있었다.
난 오미자찐빵이라는 말에 무조건 빵 하나를 달라고 하여 먹어보았다. 향이 진하지는 않았지만, 식감이 좋았고 약간의 오미자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주인장인 강치구씨에게 몇 가지 물어보았더니 "우선 문경에 오미자가 유명하여 만들게 되었고, 오미자즙을 너무 많이 넣으면 식감이 떨어지고 향이 강하여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 몇 번의 실험 끝에 현재의 오미자찐빵을 만들게 되었다. 찐빵을 맛보신 분들이 체인점이나 분점 문의를 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여력도 없고 시설도 부족하여 고민만 하고 있다. 오미자찐빵은 씹히는 맛이 좋고 체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했다.
난 500원이라는 너무 싼 가격에 정말 맛있는 오미자찐빵을 맛본 다음, 추가로 크로켓을 500원 더 주고 하나 더 먹었다. 재료 구입비가 저렴한 시골이라 싼 가격에 맛있는 찐빵과 크로켓을 500원 정도에 팔고 있어 감동하면서 먹었다. 정말 감사하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이것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한 것 같아 나중에 이른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하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을 우측으로 잡아서 경북관광고등학교로 갔다. 예전 문경고등학교가 학생 모집이 어렵고 지역 특성화를 위해서 지난 2002년 관광고로 개편을 한 것이다. 학생이 많지 않아 보였지만, 실내 골프연습장도 있고 컴퓨터실, 도예실 등도 있어 제법 알차게 운영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 선배 한 분이 1980년대에 이곳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탄광지역이라 별로였지만 아이들은 순박하고 좋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대학 후배인 서연이가 문경고 졸업생이라 가끔 고향에 가면 홀로 산책을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이런 추억은 안고서 잠시 산책을 했다.
학교를 둘러 본 나는 좀 더 길을 올라 문경향교(聞慶鄕校)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더운 날이라 수돗가에서 잠시 세수를 하고는 길을 가는데, 길 옆 빈집 마당에 있는 뽕나무를 발견했다. 오디가 좋은 철이라 한참을 서서 오디를 따 먹었다.
오랜 만에 정말 오디를 맛있게 먹었다. 4년 전인가 영주 시골집 인근의 뽕나무 밭에서 오디를 왕창 따서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에 슬러시를 만들어 먹던 기억이 났다. 맛있게는 먹었는데 손과 입술 및 입 주변이 온통 검은 물이 들어서 다시 손과 얼굴을 씻어야 했다.
길을 한참 올라가니 향교가 보인다. 향교 앞에 주차장이 있고, 바로 앞에 두 채의 농가 주택이 있다. 너무 향교와 가깝게 있어 신경을 쓰이기는 했지만, 나름 향교는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향교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들어가려고 하니 방법이 없어 월장을 하게 된다. 문경향교는 조선 태조 1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전사청·내삼문·명륜당·동재·서재·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뒤로 높아지는 지형에 대지를 3단으로 마련하고 앞쪽에는 교육 공간을, 뒤쪽에는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정문격인 외삼문을 통과하여 교육 장소인 명륜당을 지나면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소박한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조선 숙종 어필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예전, 문경향교의 교장격인 전교를 지내신 장인어른 덕에 한번 방문을 한 적이 있는데, 오랜 만에 다시 오니 무척 좋다. 잠시 쉬면서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를 살펴보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이런 곳에서 며칠 쉬면서 나도 공부를 하고 싶어진다.
무척 더운 날씨라 난 천천히 걷는다. 그래도 걷는 좋을 좋아해 즐기면서 길을 걸으니 언제나처럼 행복하다. 또 기쁘다. 많이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서. 천천히 다시 읍내 방향으로 나오는데 우측에 작지만 아름다운 문경성당(聞慶聖堂)이 보인다.
이곳은 지난 1958년 가은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도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할 때 관문역할을 하였던 문경은 신유박해(1801년)를 전후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때에는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던 문경의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3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103위의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여우목 출신의 이유일 요한도 이때 순교했다.
박해 이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로베르 신부는 1883년 문경 지역 최초의 먹방이 공소를 설립하는 한편, 경상도 지역을 분담하여 맡게 된 파이야스 신부에 의해 가실 본당이 설립되면서 많은 문경의 공소들이 이 관할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가은 본당의 지베르츠 신부에 의해 문경에 새 본당 설립이 계획되고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수녀원이 완공됨과 동시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분원이 개설되어 사목을 돕게 되었으며, 1989년에는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를 개발하여 마원 성지를 조성하고 순교자 현양 대회를 개최했다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리고 있는지 사람도 많고, 앞에 버스도 여러 대 서 있었다. 본당은 30~40년은 되어 보이는 건물임에도 무척 깨끗하게 깔끔했다. 난 본당과 사제관, 교육관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 장례미사를 지내시는 분의 천국행에 멋진 기도를 잠시지만 함께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다시 계속 전진하면서 읍내를 거닐다 보니 문경읍사무소가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다녀오고는 바로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식육점 뒤편에 있는 오래된 창고를 발견하고는 둘러보았다. 낡은 농협 창고인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철문과 외벽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워 사진을 한 장 찍어 둔다.
▲ 문경읍낡은 창고 ⓒ 김수종
이런 창고를 개조하여 카페나 식당,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100명 이상은 동시에 수용이 가능해 보이는 크기다. 일본 북해도에는 수로 옆에 있는 해산물 창고를 수십 개 개조하여 다양하게 쓰고 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골에서도 새롭게 무엇을 짓고 만들기 보다는 사용하지 않는 비어있는 창고를 개조하여 재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비용도 절감되고. 창고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식육점 주인 아주머님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뭐 볼 것이 있다고 사진을 찍어여."
나는 그저 웃으며 "이뻐서여"라고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다시 길로 나와서 전진하다가 앞쪽 골목에 있는 낡은 정미소 간판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이곳도 없어진 정미소지만, 낡고 오래된 건물이며, 외벽이 멋지고 특이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목욕탕 건물도 재미있다. 목욕탕의 붉은 색 간판도 웃기지만, 낡은 건물을 방치하여 곳곳에 얼룩이 많아 마치 흐려진 벽화 같다.
지금은 효용이 없어진 시골 정미소와 목욕탕을 살펴 본 나는 길을 우측으로 잡아서 조금 가다가 오미자찐빵을 판다고 하는 글씨를 발견했다. '다올오미자찐빵'이라고 하는 작은 가게인데, 도넛, 찐빵, 크로켓 등을 팔고 있었다.
▲ 오미자찐빵만두, 찐빵 등을 판다 ⓒ 김수종
난 오미자찐빵이라는 말에 무조건 빵 하나를 달라고 하여 먹어보았다. 향이 진하지는 않았지만, 식감이 좋았고 약간의 오미자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주인장인 강치구씨에게 몇 가지 물어보았더니 "우선 문경에 오미자가 유명하여 만들게 되었고, 오미자즙을 너무 많이 넣으면 식감이 떨어지고 향이 강하여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 몇 번의 실험 끝에 현재의 오미자찐빵을 만들게 되었다. 찐빵을 맛보신 분들이 체인점이나 분점 문의를 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여력도 없고 시설도 부족하여 고민만 하고 있다. 오미자찐빵은 씹히는 맛이 좋고 체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했다.
난 500원이라는 너무 싼 가격에 정말 맛있는 오미자찐빵을 맛본 다음, 추가로 크로켓을 500원 더 주고 하나 더 먹었다. 재료 구입비가 저렴한 시골이라 싼 가격에 맛있는 찐빵과 크로켓을 500원 정도에 팔고 있어 감동하면서 먹었다. 정말 감사하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이것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한 것 같아 나중에 이른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하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을 우측으로 잡아서 경북관광고등학교로 갔다. 예전 문경고등학교가 학생 모집이 어렵고 지역 특성화를 위해서 지난 2002년 관광고로 개편을 한 것이다. 학생이 많지 않아 보였지만, 실내 골프연습장도 있고 컴퓨터실, 도예실 등도 있어 제법 알차게 운영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 선배 한 분이 1980년대에 이곳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탄광지역이라 별로였지만 아이들은 순박하고 좋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대학 후배인 서연이가 문경고 졸업생이라 가끔 고향에 가면 홀로 산책을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이런 추억은 안고서 잠시 산책을 했다.
학교를 둘러 본 나는 좀 더 길을 올라 문경향교(聞慶鄕校)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더운 날이라 수돗가에서 잠시 세수를 하고는 길을 가는데, 길 옆 빈집 마당에 있는 뽕나무를 발견했다. 오디가 좋은 철이라 한참을 서서 오디를 따 먹었다.
오랜 만에 정말 오디를 맛있게 먹었다. 4년 전인가 영주 시골집 인근의 뽕나무 밭에서 오디를 왕창 따서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에 슬러시를 만들어 먹던 기억이 났다. 맛있게는 먹었는데 손과 입술 및 입 주변이 온통 검은 물이 들어서 다시 손과 얼굴을 씻어야 했다.
▲ 문경향교 장인어른이 전교를 지내신 곳이다 ⓒ 김수종
길을 한참 올라가니 향교가 보인다. 향교 앞에 주차장이 있고, 바로 앞에 두 채의 농가 주택이 있다. 너무 향교와 가깝게 있어 신경을 쓰이기는 했지만, 나름 향교는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향교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들어가려고 하니 방법이 없어 월장을 하게 된다. 문경향교는 조선 태조 1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전사청·내삼문·명륜당·동재·서재·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뒤로 높아지는 지형에 대지를 3단으로 마련하고 앞쪽에는 교육 공간을, 뒤쪽에는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정문격인 외삼문을 통과하여 교육 장소인 명륜당을 지나면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소박한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조선 숙종 어필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예전, 문경향교의 교장격인 전교를 지내신 장인어른 덕에 한번 방문을 한 적이 있는데, 오랜 만에 다시 오니 무척 좋다. 잠시 쉬면서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를 살펴보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이런 곳에서 며칠 쉬면서 나도 공부를 하고 싶어진다.
무척 더운 날씨라 난 천천히 걷는다. 그래도 걷는 좋을 좋아해 즐기면서 길을 걸으니 언제나처럼 행복하다. 또 기쁘다. 많이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서. 천천히 다시 읍내 방향으로 나오는데 우측에 작지만 아름다운 문경성당(聞慶聖堂)이 보인다.
이곳은 지난 1958년 가은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도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할 때 관문역할을 하였던 문경은 신유박해(1801년)를 전후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때에는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던 문경의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3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103위의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여우목 출신의 이유일 요한도 이때 순교했다.
▲ 문경성당아름답다 ⓒ 김수종
박해 이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로베르 신부는 1883년 문경 지역 최초의 먹방이 공소를 설립하는 한편, 경상도 지역을 분담하여 맡게 된 파이야스 신부에 의해 가실 본당이 설립되면서 많은 문경의 공소들이 이 관할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가은 본당의 지베르츠 신부에 의해 문경에 새 본당 설립이 계획되고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수녀원이 완공됨과 동시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분원이 개설되어 사목을 돕게 되었으며, 1989년에는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를 개발하여 마원 성지를 조성하고 순교자 현양 대회를 개최했다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리고 있는지 사람도 많고, 앞에 버스도 여러 대 서 있었다. 본당은 30~40년은 되어 보이는 건물임에도 무척 깨끗하게 깔끔했다. 난 본당과 사제관, 교육관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 장례미사를 지내시는 분의 천국행에 멋진 기도를 잠시지만 함께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다시 계속 전진하면서 읍내를 거닐다 보니 문경읍사무소가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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