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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문)에 '절대'는 없다....투퀴디데스를 의심하라

[리뷰]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등록|2013.06.16 10:52 수정|2013.06.16 10:52
'투키디데스'(Θουκυδίδης, 기원전 465년경~기원전 400년경)'. 고대 그리스 아테네 역사가다. 그가 쓴 <필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는 고대 역사서 중 최고 역사서로 꼽힌다. 이 책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 아테네 주도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Πόλεμος)을 기술한 '미완성'(411년까지만 다룸) 작품으로 8권이다.

국제관계와 전쟁사 연구자들 '바이블'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사람들은 <전쟁사>를 통해 고대 그리스 역사와 정치, 군사, 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 역사를 알려면 읽어야 할 책이었다. 1947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기획한 조지 마셜 (George Marshal)은 그해 2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나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와 아테나이의 몰락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되새겨보지 않은 사람이 현대 국제관계늬 몇몇 기본 문제들을 매우 자혜롭게 혹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재인용-<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휴머니스트) 11쪽


마샬 말 이후 국제관계와 전쟁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했다. 더 나아가 '가방끈이 조금 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꺼운' <전쟁사>를 들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전쟁사>을 읽은 '너도 나도' 투기디데스가 최고 역사가이고, 그를 능가할 이가 없다는 평으로 이어졌다. 한 번 부여된 권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일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학문은 '의심'을 통해 진보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2400년 전 투키디데스 눈으로 본 <전쟁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술했는지 의문을 통해 사실을 따져 묻는 것 역사가로서 당연한 도전이다. 그리고 틀린 부분이 있으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해온 도널드 케이건은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이하 투퀴디데스>에서 "투퀴디데스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사상의 세계뿐 아니라 행동의 세계에서 살아간 인간이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휴머니스트

역사서 '바이블'<전쟁사>...비판적 읽기

케이건이 <투퀴디데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투퀴디데스를 무시하고, <전쟁사>가 모두 틀린 것이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 읽기를 통해 8권이란 엄청난 분량의 <전쟁사>를 쓰면서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투퀴디데서 역사서술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투퀴디데스도 무오류가 아니며, 다른 모든 저자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린 결론도 검증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업을 한 뒤 그 결과를 투퀴디데스의 해석과 비교한 이후에야 비로소 투퀴디데스의 정신에 더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와 충돌을 살펴봄으로써 투퀴디데스의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투퀴디데스는 자기 시대에 통용되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사건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고 논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왜 투퀴디데스가 그토록 자주 동시대인의 견해와 확연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지 물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투퀴디데스의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37쪽)

케이건은 여기서 우리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학문(여기서는 '역사')연구에서 절대는 없다. 그 어떤 위대한 역사가라 할지라도 역사해석에서 오류가 있으며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를 최초의 '수정주의자'라고 칭한다. 조금 생각하면 투퀴디데스를 수정주의자로 부르는 케이건 주장에 고개를 갸웃뚱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전쟁사>를 가정 먼저 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케이건은 "역사가는 모두 수정주의자"라면서 "'수정주의자'란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투퀴디데스가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되기를, 그리고 '과거에 벌어진 일과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미래에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벌어질 일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면서 기록했기에 최초의 수정주의자로 정의해도 무방한 것이다.

'수정주의자' 투퀴디데스 "아테나이 민주정 아냐"...과연 그럴까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한 이유는 '동맹국들이 택한 논변에 설득되어사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고 주장"한 것을  반박한다.

"헬라스 독립을 위해 페르시아에 대항한 위대한 전쟁에서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는 협력"했고, "스파르트가 아테나이의 위험성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테나이가 막강한 힘을 갖췄고, 아테나이를 넘어설 능력이 능력이 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대인 대다수는 전쟁은 피할 수 있었으며, 메가라 봉쇄령을 비롯한 페리클레스의 실책이 전쟁을 일으켰다"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테나이(아테네)가 민주주의 기원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페리클레스)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같은 투퀴디데스 주장에 대해 "나라의 모든 결정은 민회에서 다수결로 처리"되었고,"매년 선거를 치르고, 공식적인 재무 감사를 받아야 했으며, 언제나 소환되거나 공식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에 이런한 체제가 진정한 민주정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케이건은 반박한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4쪽)

케이건은 이외에도 페리클레스 사후 니키아스와 아테나이 정치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한 클레온에 대한 평가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투퀴디데스 평가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클레온의 동시대인 중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클레온이 제시한 정책을 기꺼이 따랐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비길 데 없이 높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클레온이 큰 패배를 당하고 죽은 뒤에도 존경받고 성공한 장군에게 바치는 명예를 그에게 선사했다. 이와 달리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동시대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해석을 제시했다.(242쪽)

그리고 아테나이 쇠퇴로 이끈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 책임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선동가이며 난폭하고 야심찼던 알키바데스"와 "원정군을 내보낸 아테나이인이 실수한 것"이리거 말한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며 "온 생애를 '아레테'-덕 또는 탁월함-에 따라 살았다"고 칭송한 니키아스에게 있다고 반박한다. 이유는 "아테나인들은 공공 묘역에 비석을 세우고 시켈리아에서 싸우다 죽은 장군들의 이름을 새켰는데, 니키아스 이름은 고의로 누락"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한 재앙을 두고 니키아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문 없이 받아 들이는 것...비극

그럼 왜 투퀴디데스는 이처럼 동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대 역사 해석을 '수정하려고 했을까?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민주정 체제를 혐오했다"면서 "'페리클레스'와 그가 이끈 독재정이 틀렸다는 당대의 해석과 주장이 틀렸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수정해서 기술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투퀴디데스는 헤르도토스처럼 '역사의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사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일은 마차 1,2차 세계대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원스턴 처칠이 직접 자기 시대를 회고한 해석한 역사 서술을 아무 의문 없이 진실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고 경고한다. 사건과 역사, 학문에서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투퀴디데스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역사상 최초로 인간 사회의 발전에 무수한 질문을 던졌고, 여러 종류의 정체(政體)가 가지는 특징과 장단점 검토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들 주제는 아직까지도 인간사를 이해하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투퀴디데스가 수정주의를 취했을지라도 새로운 유형의 역사학을 발명하고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으며 그로써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사고의 품격을 높였다는 사실만은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덧붙이는 글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도널드 케이건 지음 l 박재욱 옮김 l 휴머니스트 펴냄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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