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군사작전' 펼친 국정원, "끌려갈 수 없다"던 민주당

[현장] 'NLL 폭탄'부터 국정조사 합의까지 이틀간의 생생한 기록

등록|2013.06.25 20:27 수정|2013.06.26 15:29
오랜 침묵을 깬 박근혜 대통령,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국가정보원, 'NLL 회의록 공개' 폭탄에 초토화 된 국회. 24일부터 25일까지 국회·청와대·국정원은 그야말로 숨 가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야당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만천하에 공개됐지만,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 '본회의 보이콧' 카드까지 꺼내든 야당은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 사건' 국정조사를 얻어냈지만, 조사 범위나 증인 채택 등 여전히 지뢰밭 투성이다. 국회와 청와대, 청와대와 국회, 국정원과 국회를 오가며 벌어졌던 지난 이틀간의 현장을 되짚어봤다.

김한길 편지 받은 박근혜 "국정원 의혹 밝혀야"

▲ 김한길 민주당 대표 ⓒ 남소연


24일 오전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 한 통을 띄웠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박 대통령에게 "국민 앞에 사과와 해명을 하라"는 요구였다. 더불어 국정원 국정조사 실시를 즉각 수용하라는 내용도 편지에 담았다.

이 편지는 노웅래 대표비서실장을 통해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달했다. 제 1 야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서한을 통해 의견을 전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김 대표는 오전 9시에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편지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김 대표의 편지를 아직 열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날 오전 10시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가 끝난 뒤에야 김 대표의 편지를 전달받은 것이다.

수신인인 박 대통령보다 민주당 지도부와 국민들이 먼저 김 대표의 편지를 읽은 셈이 됐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오전에 회의가 많아서 바로 (편지에 대한) 보고를 드리지 못했고, 수석비서관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보고를 드렸다"며 "민주당이 그 사이에 스스로 다 공개를 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날 오후 2시 이정현 홍보수석의 입을 빌어 공개한 답장에서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자신이 무관함을 강조했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또 야당이 요구하는 국정조사에 대해 "국정원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여야가 제기한 국정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그 절차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회가 논의해서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연일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던 야당조차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민주당 '국정원 선거개입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는 곧바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환영한다"부터 "아직 부족하다"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여섯 문장도 채 되지 않은 박 대통령의 답장에 대해 "지금까지 민주당이 박 대통령에게 뭔가 정치적 입장 표명을 요구한 것 중에 가장 긴 답변이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신경민 특위 위원장은 "애매하게 밝히지 말고 국정원 국정조사를 (새누리당이) 받는 게 좋다고 말하라"며 명확한 뜻을 밝히기를 재차 촉구했다. 다만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조사를 거부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이제 여당만 마음을 바꾸면 되는 일처럼 보였다.

국정원 '전광석화' 공개... 민주당·새누리당 모두 '멘붕'

국정원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은 8페이지 분량으로 국정원이 제작했다. ⓒ 권우성


하지만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국정원이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전격 공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으로 뭔가 전향적인 조치가 이어질 것이라는 민주당의 '기대'는 일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국정원은 회의록 전문 공개를 마치 군사작전처럼 전광석화로 처리했다.

국정원이 회의록 전문 공개 방침을 발표한 것은 이날 오후 3시 30분께 보도자료를 통해서다. 그리고 20여 분만인 오후 3시 50분께 국회 담당 국정원 정보관들은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을 방문,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1인당 1부씩, 총 100여 쪽에 이르는 회의록 전문을 전달했다. 국정원은 민주당 의원에도 회의록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국정원의 발 빠른 움직임에 민주당뿐만 아니라 새누리당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누리당 지도부와 정보위원들은 한때 회의록의 공개 여부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정원 직원이 회의록 전문을 여당 정보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은 오후 4시께부터 국회 의원회관으로 달려갔다. 여당 정보위원의 의원실로 몰려든 기자들은 우선 8쪽짜리 회의록 발췌본부터 복사하기 시작했고,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대다수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문제는 103쪽짜리 전문인데, 복사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서 기자들이 기다리는 동안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보위원들을 소집,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야당이 동의 할 때까지" 회의록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고, 뒤늦게 여당 정보위원들에게 전화를 돌려 기자들에게 복사를 해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결국 기자들은 빈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당신들이 대화록 공개를 요구해놓고 이제와서 공개를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야당 때문에..."라는 궁색한 변명만 돌아왔다.

게다가 새누리당의 '회의록 전문 비공개' 조치마저도 '뒷북'이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이미 새누리당에 전달된 회의록 전문이 일부 언론에 유출된 것으로 안다"며 "'민주당 동의' 운운하지만 새누리당은 이미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된 회의록을 무단으로 세상에 공개한 것"이라고 맹비판했다. 실제 다음날인 25일 오전 일부 보수 언론에 103쪽짜리 회의록 전문이 게재됐다.

"우리가 무슨 개새끼냐" 날선 민주당... 예상치 못한 국정조사 합의

국정원 국정조사 촉구민주당 의원들이 25일 오후 국회 본관 계단에서 국정원 대선개입사태 국정조사를 촉구하며 농성을 벌이며 김한길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국정원이 무단으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것은 여의도에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세간의 시선은 3개월여의 파행 끝에 25일 오전 10시 열릴 예정인 국회 정보위로 쏠렸다. 검찰 수사로 드러난 국정원의 불법 정치·선거개입 사건은 물론, NLL 회의록 열람·공개를 둘러싼 여야 간 격돌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날(24일) 회의록 공개를 진두지휘한 남재준 국정원장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점에서, 민주당 소속 정보위원들은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일치단결'해 전장에 나설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민주당이 내부 균열 조짐을 보였다. 25일 오전 9시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서 국정원의 회의록 공개를 둘러싸고 민주당 의원들의 대응 방안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쪽은 이날 오후 2시에 열릴 본회의 보이콧을 비롯해 국정원 국정조사 계획서 채택 시한인 26일까지 연좌농성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은수미 의원은 "본회의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무슨 개새끼냐. 목줄 잡고 들어간다고 들어가야 하느냐, 저들은 살인을 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은 '민생 입법'을 놓을 수 없으니, 본회의나 상임위 일정에는 참석하되 국정원 사건 대응을 함께 가져가자는 입장을 내놨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차는 2시간여의 토론에도 끝내 좁혀 지지 않았고, 의원총회는 오후 1시 30분 비공개 회의를 예고한 채 중단됐다.

오후 1시 20분, 점심식사를 마치고 온 민주당 여성의원 15명이 국회 본관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계단에는 "새누리당 국정조사 응하라,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대선 개입 입장 밝혀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깔렸다. 여성 의원들은 계단에 앉아 "국정조사 즉각 실시하라", "국정조사 외면한 새누리당 각성하라"고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는 새누리당 의원들을 향해 "약속을 지키세요"라고 다그쳤다.

오후 1시 35분 경, 의원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김한길 대표가 여성의원들을 향해 "의총 안 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 의원이 "이게 의총이에요?"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오전 의원총회에서 '본회의 사수'를 주장한 온건파 의원들에 대한 불만을 김 대표에게 표출한 것이다. 김 대표는 다시 의원들에게 의원총회 참석을 독려했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김 대표와 함께 2층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내 여론이 강경파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고, 따라서 오후 본회의 개회 여부가 불투명해보였다. 그런데 오후 1시 40분경, 새누리당 최경환·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가 함께 3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2층 민주당 회의장 앞에서 밝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옆에 있는 정성호 수석부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한 번 기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양당 원내대표가 6월 임시국회 내에서 국정원 사건 국정조사를 하기로 합의했어요."

기자들은 속보를 날리기 위해서 기자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한길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어제부터 여야 간 원내대표단이 애쓰면서 얘기해왔고, 오늘 오전 중에도 그런 상황이 계속돼왔다"고 배경 설명을 했다. 이후 전병헌 원내대표가 국정원 사건 국정조사에 대한 합의 내용을 설명했다.

최경환 원내대표도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쪽에서 오늘 오전 내내 의총을 열어 본회의 등 국회 일정을 보이콧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며 "(국정조사 실시 합의는) 산적한 법안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여야는 오는 26일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하고 27일 본회의에 이를 보고한 후 다음달 2일 본회의에서 국정조사 계획서를 처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3개월여를 끌고 온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국정조사 논란은 일단락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정조사를 실제 실시하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여전히 남아있다. 여야는 이날 국정조사의 범위와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즉, 새누리당이 '검찰 수사 완료'란 전제조건을 철회했더라도 여직원 감금 사건 및 매관매직 의혹 부분을 국정조사 범위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사건뿐만 아니라 'NLL 회의록' 공개의 불법성도 국정조사 범위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밖에 국정조사 증인 채택 등의 문제를 놓고도 여야는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또 어디에서 예상치 못한 폭탄이 터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