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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닦기 알바요? 그런 거 없어요"

[정기자의 하루愛] 죽음에서 삶을 바라보는 장례지도사의 하루

등록|2013.06.29 10:23 수정|2013.06.29 10:23

▲ 비단 기자 뿐일까 싶지만 프로레슬링 선수 ‘언더테이커’(Undertaker:장의사)는 기자에게 장의사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쇄기골을 넣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26일 만난 장례지도사들은 그가 심어준 부정적 이미지를 한번에 씻어 내렸다. ⓒ WWE


지금이야 종합격투기가 대세이다 보니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한때 프로레슬링(WWE)은 최고의 눈요기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한 시절 WWE를 풍미했고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언더테이커'(Undertaker).

화려한 기술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이목을 끈 것은 그의 복장이었다. 검은 중절모와 가죽자켓, 긴 머리와 아이라인이 짙게 들어간 눈매는 기괴했다. 저주를 쓸고 다닐 것만 같던 그의 옷자락이 훑고 지나가면 링 위는 상대선수의 절규로 가득했다. 훗날 조금 더 컸을 때 '언더테이커'가 한글로 '장의사'라는 말을 듣고서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까닭도 바로 레슬링의 언더테이커 때문이었다.

장의사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그와 맞다고 떠올렸던 것은 나름 머릿속을 차지하던 장의사에 대한 기분이 스산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찾은 26일 부산의료원 장례식장에서 기자를 맞이한 '장의사'들은 그동안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요즘은 장의사라는 말보다는 장례지도사라고 합니다. 전문직종이라서 국가자격증을 받은 사람이 염습을 하고요. 장례 전반에 대한 모든 절차를 장례지도사가 책임집니다. 예전과 인식도 달라졌고 자부심도 큰 편입니다."

20여 년간 장례지도사로 일하고 있는 부산의료원 장례식장 서보문 실장이 레슬링에서의 언더테이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사무실에 앉아 기자를 안내했다. 기자가 하루 동안 견습생으로 따라다닐 민상호(34) 장례지도사와 박선영(28) 장례지도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박 지도사는 흔치 않는 20대 여성 장례지도사다.

대학에서 장례행정학을 전공하고 올해로 장례지도사 경력이 2년째다. 사람들은 박 지도사의 직업을 물어보곤 "예? 뭐라고 하셨어요"라면서 깜짝 놀란다는데 사실 기자도 많이 당황했다.

죽음과 삶이 엇갈리는 3평 공간 '염습실'

▲ 부산의료원 장례식장의 서보문 실장이 염습실로 들어서고 있다. 보통 한 분의 고인을 염습하는데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 정민규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장례지도사의 업무는 하루 동안 염습을 할 고인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염습을 3번 해야 한다. 두 장례지도사를 따라 염습실 문을 열자 침대와 각종 장례도구가 손에 잡히기 편하게 자리 잡은 3평(10㎡) 가량의 아담한 공간이 나왔다.

흔히 고인을 관에 넣어 동여매는 입관을 하기에 앞서 장례지도사들은 고인을 닦는 '습'과 굳은 몸을 곧게 펴는 '염'을 진행한다. 그리고 습을 하기 전 사전 작업으로 고인이 입을 마지막 옷인 수의를 정돈하고 염에서 고인을 묶는 역할을 하는 염베를 준비한다.

준비를 끝낸 두 장례지도사를 따라 안치실로 들어갔다. 온도가 0도에서 영상 5도 정도로 차갑게 유지되는 안치기 안에서 고인을 모셔올 차례다. 부산의료원 장례식장에는 모두 22기의 안치기가 있다. 부산에서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안치기 문을 열고 손잡이를 잡아 빼자 고인이 누운 철판이 미끄러져 나왔다. 첫 번째 염습 할 고인은 70대 노인이다. 하얀 시트를 벗기자 자는 듯 평온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잠을 자는 듯한 모습에 그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가끔씩 이러다 일어나시기도 하나요?"

기자의 어이없는 질문에 민 지도사가 "아직까지 깨어나신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며 기자를 타박했다. 장례지도사들은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할아버지의 몸 구석구석을 정성껏 닦아나갔다. 입과 코 안으로는 이물질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수시로 불리는 솜도 넣는다. 그렇게 고인을 닦은 솜이며 각종 장의용품은 전부 의료폐기물로 따로 버리도록 되어있다.

한때 '시체닦기 알바'를 했다느니 하는 식의 무용담을 술자리에서 듣기는 했지만 장례지도사들은 "들어만 봤지 그런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죽은 자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시간은 아르바이트생이 대충 할 만큼 쉽지도 않고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정성 들여 알코올로 목욕을 대신하면 이제부터 수의를 입을 시간이다.

잠든 모습의 고인... 울부짖는 유가족들

▲ 부산의료원 장례식장의 민상호, 박선영 장례지도사가 염습에 앞서 마지막으로 고인을 고정할 염베를 잘라 만들고 있다. ⓒ 정민규


한지와 솜을 누벼 만든 기저귀와 버선을 시작으로 악수(손싸개), 속바지와 속적삼,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도포, 꽃신 순으로 수의를 입혔다. 간혹 피부화장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유족에 따라 원치 않는 경우도 있고, 황달을 앓던 분들은 오히려 피부색이 이상해져 색조화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신 로션과 헤어젤로 얼굴과 모발을 정돈했다. 빗질로 머리카락까지 쓸어넘기면 유가족을 만날 시간이다. 장례지도사가 빈소로 가서 입관을 알리면 유가족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염습실로 옮긴다. 가족이 들어오자 박 지도사가 정중히 가족들을 맞았다.

"오시기 전에 저희들이 손수 닦아드리고 깨끗한 모습으로 모셨습니다. 아버님 마지막 모습 지켜보시고, 아버님 이마에 손 한번 올려드리면서 따뜻한 온기 전해주시고 좋은 곳 가시라고 빌어주십시오"

박 지도사의 말이 끝나자 유가족들은 고인의 이마에 손을 얹고 그동안 못 다했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장남은 "좋은 곳 가시고, 이제 더 이상 아프지…"에서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 이마에 손을 얹은 차남은 "왜 이렇게 차갑냐"며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버지의 죽음을 손끝으로 실감했다. 딸이 아버지를 부여잡고 "이제 정말 잘 살게요"라고 울부짖었지만 편안히 누운 고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인의 동생과 사위도 한마디씩을 끝내자 염이 시작됐다.

염은 유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다. 고인 밑에 놓인 칠성판(오동나무 판자)에 고인을 꽁꽁 묶어서 굳었던 몸을 펴게 한다. 얼굴까지 덮고 나면 관으로 모실 차례. 아들들이 고인을 부여잡고 관 안에 편안하게 아버지를 눕혔다. 평소 고인이 즐겨 입던 옷가지까지 챙겨 넣으면 이제 세상에서 고인의 흔적은 산사람들의 머릿속에만 남는다. 유족과 장례지도사가 고인에게 마지막 절을 올렸다. 기자도 따라 절을 했다.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어느 행려 사망자의 쓸쓸한 마지막

▲ 부산의료원 장례식장 내에 위치한 안치실. 안치실 안에는 22기의 안치기가 있고 각 안치기들은 0도에서 영상 5도 정도를 오가며 시신을 보관한다. ⓒ 정민규


"저 가족 분들은 참 좋으신 분들이에요."

유족들이 나가자 박선영 장례지도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가족들이 안 보러 오거나, 가족들에게 보여드리기 죄송한 경우도 많다"는 말이 이어졌다. 다음 염습으로 행려사망자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치실에서 모셔온 60대 행려사망자는 노숙자로 떠돌다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으로 왔고,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공공의료원인 부산의료원은 다른 병원에는 없는 행려병동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어 행려사망자도 많은 편이다. 좀 전에 염습을 끝낸 70대 노인보다도 마른 행려사망자의 앙상한 몸을 마찬가지로 정성껏 닦았다.

그래도 이번 고인의 경우에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경찰이 가족을 수소문해 혈육을 찾을 수 있었고, 그들이 장례비용을 대면서 염습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 않은 행려사망자는 '행정처리'라 부르는 이름으로 지극히 행정적으로 처리된다. 사망한 채로 가매장 한 뒤 유가족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화장을 한다. 한 사람의 존재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

수의를 입힌 다음 2명의 가족이 고인 앞에 섰지만 이전과 같은 큰 울음은 없었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2명의 유족은 별 말 없이 고인을 지켜봤다. "그동안 산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한 유족의 짧은 말로 쉽지 않았던 그의 인생을 대충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도 모두가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장례지도사가 말하는 생의 가치는...

▲ 부산의료원 장례식장의 민상호, 박선영 장례지도사가 마지막으로 고인이 누울 관에 베를 덧대고 있다. ⓒ 정민규


마지막 고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경우였다. 고인은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그에 대해서는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세 분의 고인을 모시면서 그가 남겨놓은 가족들의 울음이 가장 컸다는 것 정도만 말하고 싶다.

가족들은 "미안하다"는 울먹임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그의 잘못된 선택을 막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고 자책했다. 이런 죽음을 봐야하는 경우, 장례지도사들의 마음도 무거워진다. 기자에게는 순간 돌덩이를 가슴에 올린 것 같은 답답함이 찾아왔지만 가족들은 평생 이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

"자살을 하신 분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한 달에 장례를 120번 치르는데 그중 4~5건은 꼭 자살하신 분들입니다. '조금만 더 사시지, 남겨놓은 사람들은 어쩌고 이리 가십니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특히 젊은 학생들이 성적비관하고 자살을 택했을 경우에는 매일 하는 일이라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서 힘듭니다."

민상호 장례지도사가 염습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3시간이 넘는 염습 동안 장례지도사들은 한 번도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일했다. 어쩔 때는 7시간 이상씩 염습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장례식장 안내, 출상 등 장례 과정 전반을 장례지도사들이 책임진다. 사람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삶의 가치가 문득 궁금했다.

20년이 다되어 가는 베테랑 장례지도사 서보문 실장은 "우리는 그냥 유가족에게 고맙다는 한마디 듣는 보람으로 사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고, 5년차인 민상호 장례지도사는 "처음 이 일을 고민했을 때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가 '얼마나 고귀한 일이냐, 해봐라'고 말했다"며 웃음으로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대신했다. 민 지도사는 그녀와 결혼했다.

미혼인 2년차 박선영 장례지도사는 "아버지한테 전화 드려야겠어요"라며 수백만 원짜리 수의로 효도를 대신하진 못한다는 진실을 이야기 했다. 장례지도사들의 하루도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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