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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입영열차를 타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 (4) #2. 한국전쟁 발발 ①

등록|2013.07.03 10:46 수정|2013.07.15 15:58

▲ 한국전쟁 직전 인민군 기갑(탱크)부대 사열장면. ⓒ NARA


한국전쟁 발발 첫 신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 전선에서 북한 인민군 야포는 일제히 포문을 열고 불을 뿜었다. 서해안 황해도 옹진반도에서부터 동해안 강원도 양양에 이르기까지 38선 모든 전선에서 인민군의 야포들은 약 30분 동안 남쪽 국군 방어진지를 겨냥하여 마냥 포격을 가했다.

이른 새벽 38선 일대의 정적을 깨뜨린 그 포성은 이후 3년 넘게 계속된 한국전쟁 발발 첫 신호였다. 그 이전에도 38선 부근에서 남북간에 크고작은 군사충돌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04시, 북한 인민군의 기습적인 대남 야포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다른 이름은 이날을 되새기고자 '6·25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한국전쟁은 피아 수백만에 이르는 사상자와 일천만 이상의 이산가족을 양산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강대국 대리전쟁이 될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그리고 끝내 승자도 패자도 없는(서로가 승자라고 주장하는), 3년여 간 길고도 지루한, 한때는 정전의 명분을 쌓기 위해 전선의 병사들이야 죽든 말든 전쟁을 질질 끌었던 기묘한 전쟁이었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일천 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움집에서 천막촌에서 판잣집에서 살면서도 휴전반대 데모를 하는, 포로교환 문제로 살아있는 포로보다 더 많은 병사를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은 어처구니 없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총성이 멎었다. 끝내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정전이 되었다.

숱한 생명을 제물로 바쳤지만 그 사이 일직선 38선은 기형의 휴전선으로 변모하여 여전히 한반도 허리를 철조망으로 두 겹 세 겹 두른 채 정전협정 후에도 줄곧 우리 겨레에게는 원한의, 단장의 선으로 남아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 야포의 포성이 멎자 38선에 전진 배치된 인민군 전 병력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그러자 북한 전역은 마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전시 체제로, 거대한 병영처럼 변했다. 평양방송은 인민군의 남침 사실은 일체 함구한 채, 아나운서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새벽 1시 남조선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우리 공화국을 침범하였다.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께서는 김책 전선사령관에게 6월 25일 04시를 기하여 남반부 국방군 놈들을 가열차게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었습니다."

그날부터 평양방송은 아예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군가와 행진곡을 줄곧 쏟아냈다.

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

'용진가' 에 이어 '조선인민군 행진곡' '적기가' 그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이 하루 종일 반복하며 계속 울려 퍼졌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그러면서 중간 중간 아나운서가 결기에 찬 목소리로 인민군의 남침 사실을 숨긴 채 북침한 국방군을 단방에 쳐부수자고 핏대를 세웠다.

"영용한 우리 인민군 전사들은 북침한 남조선 국방군(국군) 괴뢰들을 전 전선에서 가열하게 물리치고 있습네다."

전황보도

이후 날마다 평양 방송은 국군의 북침을 계속 반복 강조하며 대한민국 정부에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구호를 마구 쏟았다. 북한 인민들은 아나운서의 우렁찬 목소리와 군가, 그리고 인민군이 38선 이남 남조선 주요도시를 삽시간에 해방시켰다는 전황보도에 들뜨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김준기는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면 소재 룡문(용문)중학교 3학년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월요일에 등교하자 오전에는 수업도 전폐한 채 운동장에서 남조선 국방군 침략자들에 대한 규탄대회가 열렸다. 학생회 간부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연단에 올라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쳤다.

"미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자!"

일부 학생들은 단상으로 달려 나아가 잇발로 약지를 깨물어 붉은 피로 '조국통일' '남조선 해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의 혈서를 썼다. 그런 뒤 그 혈서를 단상에서 펴 보이면 연단 아래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개전 사흘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평양방송의 전황 보도에 북한 인민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곧 이어 인민군이 7월 3일과 4일은 수원과 인천 점령에 이어, 7월 5일에는 오산 죽미령에서 미군 스미스부대를 단숨에 여지없이 격파했다는 전황 보도에 북한 전역은 승전 분위기로 평양 방송은 마치 조국해방이 눈앞의 닥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북한 주요도시의 시청이나 역 광장에는 남조선 지도를 그려놓고 인민군이 새로 점령한 도시에 인공기를 꽂고는 확성기로 군가와 행진곡을 크게 틀고 승전 분위기를 한층 드높였다.

전시동원령

▲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 측의 모병 홍보 벽보 ⓒ NARA

1950년 7월 1일 북한 당국은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 인민들에게 전시동원령을 내렸다.

그러자 18세부터 36세에 이르는 젊은이들은 다투어 인민의용군에 입대했다. 각 직장과 학교에서는 인민의용군 입대 열풍이 몰아쳤다. 중학생들은 대부분 전시동원령에서 제외된 나이였다.

하지만 전쟁 발발 열흘이 지나자 젊은 교원은 물론 나이 많은 교원들도 자원 입대자가 나오는가 하면, 중학교 상급 학생 대부분은 인민의용군에 자원입대하여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과 후배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전선으로 떠났다.

김준기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16세로 징집연령 미달이었지만 언저리의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인민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무렵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북한 측에서 일컫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사람 축에 들어가지 못할 분위기였다.

준기는 부모님에게 입대의 뜻을 밝혔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라."

용문탄광 광부인 준기 아버지 김만돌은 아들의 입대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머니 강말순은 눈물어린 눈빛으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머이! 네 어깨에 총이나 멜 수 있갓네?"
"기럼요. 오마니, 내레 이번 조국해방전쟁에서 꼭 영웅훈장을 따 오가시오."

"야, 네 어깨에 총을 메믄 땅에 닿가서. 기만 두더(주저) 앉을 수 없네?"
"오마니, 사나이가 이미 입대하기로 약속한 이상 내레 기럴 순 없습네다."

"기렇다면 이 오마니는 네레(네가) 훈장을 따오기보다 기더(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가서."
"오마니, 아무 걱정 마시라요."

"둔기야, 네레 무사히 돌아올래믄(돌아오려면) 아무튼 전쟁터에서 입이 바우터럼(바위처럼) 무거워야 돼. 약속 하갓네?"
"예, 오마니. 내레 오마니 말 꼭 명심하여 반다시 살아서 돌아오갓시오."

"기럼, 기래야디. 내레 살아있는 한 끝까디 기다리갓서."
"예, 알갓시오."

"꼭 살아 돌아오라 야."
"예, 오마니. 안심하시라요."

"네(예)로부터 난리 통에는 기더 입을 다무는 게 살아날 수 있는 디름길(지름길)이야. 내 말 알아들엇네?"
"알갓시오. 오마니 아들은 어떤 고난과 환란에서두 꼭 살아서 돌아오갓시오."
"기럼, 기래야 당한 내 아들이디. 우리 아들 김둔기 만세다!"

입영열차

인민군 초모(招募, 모병) 군관 지동수 상위(북한군 위관 계급)가 김준기의 입대지원서와 준기의 몸집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김 동무는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 인민 의용군 전사로는 좀 기렇구만(그렇구먼)."
"군관 동무, 프랑스 나폴레옹은 키가 작아도 야전군사령관이 됐다고 하더만요."
"아, 기렇디(그렇지). 내레 기걸 미터(미처) 몰라서(몰랐어). 기럼, 닥은(작은) 고추가 더 맵디(맵지)."

지 상위는 큰 인심을 쓰듯이 김준기의 입대원서에 입대허가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1950년 7월 10일 아침, 준기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고향 영변군 용산면 구장 역에서 남쪽으로 가는 입영열차를 탔다. 구장 역 플랫폼에는 각종 군가가 울려퍼지고 인공기들이 나부끼는 가운데 용산면 인민들과 관리들이 나와 전선으로 떠나는 의용군 입대자들을 환송했다. 구장 역 안팎에는 긴 장대에 입대자의 무운장구를 비는 펼침막과 걸개로 뒤덮었다.

이윽고 평양 행 증기기관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긴 기적을 울린 채 천천히 움직였다. 구장 역 플랫폼에서 준기 아버지가 소리쳤다.

"영용한 인민군 전사가 되라."
"알가시오. 아바지, 안녕히 계시라요."

준기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채 손만 흔들었다.

"오마니! 걱덩마시라요. 내레 꼭 살아 돌아오갓시오."

객차 내 인민의용군 입대자들 모두 차창으로 얼굴을 내민 채 그들 부모형제들과 주민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 휴식 중인 인민군 전사들(1953. 4. 13.) ⓒ NARA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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